나는 학벌사회의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학벌사회>에서 엿본 암울한 내 과거, 그리고 우리가 갈 길

등록 2009.03.05 12:07수정 2009.03.05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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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학교에서 사람을 훌륭하게 만드는 것은 마음의 선량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 성적이다. 시험성적만이 인간을 탁월하고 훌륭하게 만든다. 성적은 학교의 최고선인 것이다."

<학벌사회>(김상봉 지음, 한길사)에 나오는 글이다. 밑줄 그을 땐 잘 몰랐는데 이렇게 옮겨 놓고 보니 몸서리쳐질 만큼 무서운 이야기다. 하지만 난 이 무서운 이야기를 무섭기는커녕 '진리'인 것처럼 믿고 누구보다 '잘' 실천하며 살아왔다. 그것도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우등상장을 놓쳐본 적 없는, 흔히 말하는 모범생이었다. 내 모범생 생활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작된다. 얼마나 모범생이었는지 초등학교 성적표에 담임선생님이 써 준 글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a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행동이 모범적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통지표. 학벌사회를 열심히 동경하고 추종하는 학생으로 나는 죽 살아왔다. 선생님도 나도 부모님도, 그런 모습에 대하여 한 번도 '그르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학업성적이 우수하고 행동이 모범적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통지표. 학벌사회를 열심히 동경하고 추종하는 학생으로 나는 죽 살아왔다. 선생님도 나도 부모님도, 그런 모습에 대하여 한 번도 '그르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다. ⓒ 조혜원


'전 과목 모두 못하는 것이 없고 성실합니다.' - 1학년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행동이 모범적입니다.' - 2학년
'규칙 잘 지키며 각과 성적 우수합니다.' - 3학년
'학업 성적이 우수하고 행동이 모범적입니다.' - 4학년
'수업태도 모범이고 실험과 관찰에도 열심입니다.' - 5학년
'성적이 우수하고 행동이 모범적입니다.' - 6학년

낱말 몇 개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말이다. 2학년, 4학년은 아예 토씨도 안 다르고 똑 같다. 이렇게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모범생'에서 한 치도 벗어남 없이 살았던 나.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험 잘 보는' 삶에 더욱 더 빠져들었고, 급기야 반에서 1등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게 된다. 전교 1등자리를 탐하게 된 것. 결국 중·고등학교를 거치면서 꽤 여러 번 전교 1등을 해보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전교 1등을 했을 때 얼마나 짜릿했는지. 그 짜릿함을 계속 이어가기 위해 책상 앞에서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더욱 무서운 건, 그렇게 책상 앞에만 앉아 있는 시간들이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는 거다. '왜 우리가 이렇게 앉아서 공부만 해야 하지?'하는 물음을 한 번도 던져보지 않았다. 오히려 난 공부하지 않는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시험을 앞두고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땐 난 정말로 그게 궁금했다. 그런 내 모습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그땐 정말 몰랐다.

이렇게 사회가 원하는 모범생 인형으로 살아온 내가 고등학교 졸업할 때 얻어낸 성적은 전교 2등, 들어간 학교는 서강대학교다. 나를 누르고 1등으로 졸업한 친구는 이화여대를 갔고.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이 사실 때문에 무척 괴로워했다. 전교 1, 2등 하던 놈들이 모두 '스카이'를 못 갔으니 학교 수준 낮아져 큰일이라는 거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때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학교가 엄청 분발(?)해서 다음 후배들부터는 서울대를 조금씩 갔다나. 선생님들과는 달리 난 별 고민 없이(그때까지만 해도 '스카이' 다음으로 쳐주는 학교라 믿었던) 서강대에 들어가 무사히 졸업까지 했다.


<학벌사회>를 읽는 내내 사무치도록 부끄러웠다

a 전교 1등 자리를 탐하다. 중학교 때 성적표. '한번 최고가 되어 보아야지' 하던 선생님 말씀에 내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초등학교 땐 잘 몰랐던 '전교 1등'이라는 자리, 중학교때부터 내 학창 시절에서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전교 1등 자리를 탐하다. 중학교 때 성적표. '한번 최고가 되어 보아야지' 하던 선생님 말씀에 내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렸는지. 초등학교 땐 잘 몰랐던 '전교 1등'이라는 자리, 중학교때부터 내 학창 시절에서 가장 큰 목표가 되었다. ⓒ 조혜원


여기까지가 맨 앞에서 말한 그 '무서운 이야기'에 충실하게 살아온 모습이다. 학교 때 공부 깨나 했다고 자랑하는 거냐고? '아니다!' 전교에서 놀았지만 서울대는 못 갔노라고 하소연이라도 하려는 거냐고? '그 또한 아니다!' <학벌사회>를 읽는 내내 나를 사무치도록 부끄럽게 만든, 암울한 내 과거를 고백하려는 것뿐이다. 물론 이 고백이 쉬운 건 아니었다. 어떤 식으로든 '오해'나 '비아냥'을 받기 쉬울 것이기에.


"주체성의 본질은 반성적 자기관계에 있다. 나는 오직 반성적 자기관계 속에서 내가 된다. (…) 주체의 자기복귀는 일차적으로 자기에 대한 회상과 기억으로 발생한다. 반성적 자기의식이란 자기의 타자성을 지양하여 참된 동일성을 획득하려는 운동이다. 그런 한에서 주체의 복귀는 지나가버린 자기, 고정된 자기에 대한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할 자기를 향한 욕구와 동경이기도 하다. (…) 회상이 자기만의 것일 때 그것은 기억일 뿐이지만, 그것이 우리 모두의 것일 때에는 역사가 된다."

책에 나온 저 글을 읽으면서 고백할 용기를 얻었다. 부끄러운 과거지만 이렇게라도 돌아보는 것이 내 주체성을 찾을 수 있는 첫걸음인 것 같아서. 그 과거는 '나의 것'이면서 또한 이 사회에서 교육을 받은, 받고 있는, 받아야 할 모든 이의 것이기에 학벌사회를 동경하고 추종하며 살아온 '나'를 먼저 꺼내고 싶었다. 그래야만 '학벌사회를 없애야 한다'는, 어느새 내 안에 자리 잡은 그 새로운 욕구와 동경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적이데올로기가 너무나 편리하게도 성적을 인간성의 훌륭함 곧 인간 자체의 윤리적 가치와 동일시할 수 있는 권리를 교사에게 허락한다. (…) 성적이 최고의 가치인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들은 정말로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허위의식을 내면화시키게 된다."

나도 그랬다. 시험 잘 본 나한테만 워크맨을 사주는 부모님도, 내가 무슨 행동을 하건 선생님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게 여겼다. 이 책에도 사례로 나오는 것처럼 나 또한 보충수업을 빼먹어도 혼나지 않았고, 수업 시간에 딴 짓을 하다 걸려도 당당하기만 했다. 오히려 선생님이 주저주저하며 물으셨지, "요새 무슨 일 있니?"

"교육은 어떤 경우에도 다른 어떤 것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교육이 무엇인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유일하게 인간성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있다고 말해야 한다. 교육이 수단화된다는 것은 곧바로 인간성이 수단화 된다는 것을 반드시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도, 선생님도, 아니 우리 모두 교육의 본성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수단화하면서까지 '시험'을 숭배해 마지않았던 건, 그것이 '학벌'을 얻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그 '학벌'이 뭐길래?

"더 많이 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오랫동안 이 사회에서 자명하게 받아들여졌던 통치이데올로기였다. (…) 전통사회에서 권력을 재생산하는 실질적 바탕이 가족이었다면 권력을 재생산하는 형식이 바로 학문이었다. 우리 전통사회에서 학문이 권력과 도구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던 것이 오늘날 학벌체제의 역사적 시원이었던 것이다."

"권력과 자본 그리고 정신적 가치가 서울대로부터 무 학벌에 이르기까지 차등 분배된다. 그리하여 학벌은 현대 한국사회에서 계급 또는 사회적 신분의 징표인 것이다. (…) 학벌은 불변성과 폐쇄성, 그리고 계급적 동질성으로 인해 전통적 문중의 대체물이 되기에 적합하다. (…) 학벌의식이란 자기의 주체성을 양도하고 유보하는 대가로 얻게 되는 맹목적 집단의식이다."

우리들이 대학에서 얻으려 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권력'

a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학벌사회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이제는 정말 말하고 싶다. 학벌사회를 없애자고!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이 책은 그렇게 내 주체성을 찾아주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학벌사회의 가해자이자 피해자로서, 이제는 정말 말하고 싶다. 학벌사회를 없애자고! 읽는 내내 내 마음을 힘들게 했던 이 책은 그렇게 내 주체성을 찾아주는 데 큰 힘이 되었다. ⓒ 조혜원

사회에서 인정해 주는 '학벌'은 뻔하고, 그 특정 학벌에 들어갈 수 있는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도 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 학벌을 얻으려고 안달일까? 이유는 명확하다. 학벌은 내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 이익은 바로 '권력.' 책에 나오는 그대로 우리들이 대학에서 얻으려 한 것은 '학문'이 아니라, 권력이었다.

그에 발맞춰 대학도 '학문의 연구와 교수'라는 본래 목적은 팽개쳐버리고, 오직 구성원들의 권력 획득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려운 건 학벌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정당성'이다. 그 누구보다 내가 먼저 믿어 의심치 않았던 바로 그 '승자와 패자의 논리.'

"사람들은 학벌 집단 사이에 평등한 관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경쟁은 승자와 패자를 낳는 까닭에, 경쟁하는 학벌집단들 사이에도 불평등한 서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제고사도 없던 시절에 살았던 나, 십대 후반을 돌아보면 학교와 도서관을 오간 모습 말고는 아무것도 '추억'할 내용이 없다. 이 책을 읽기 전, 갑자기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밀려오던 허탈함과 절망감을 잊을 수 없다. 그 절망감이 있었기에 이 책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십대도 되기 전부터 학교랑 학원을 오가는 게 전부인 삶을 살고 있다. 그 아이들이 커서 지난 시간들을 돌아봤을 때, 아이다운 본성에 맞게 뛰어논 추억들이, 이런 나보다도 훨씬 적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저 끔찍할 따름이다. 나도 이리 암담한데 그 아이들은 오죽할까. 아니 암담함을 느낄 수나 있을까.

갑자기 항의라도 해보고 싶다. 왜 아무도 나한테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는지. 왜 난 언제나 '좋은 학생', '착한 딸', '부러운 친구'일 수밖에 없었는지. 그 왜곡된 찬사를 그대로 믿고 남을 눌러야만 행복한, 비인간적인 삶을 살아온 그 시간은 과연 누가 보상해 줄 것인지. 친구들한테는 비록 '가해자'였을지 모르지만, 나 또한 학벌사회 앞에서는 엄연한 '피해자'가 아닐는지.

"학교는 이미 파산할 만큼 파산했다. 학벌체계 아래서 학교는 결코 학원과 경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 그러므로 바로 지금이 학교가 입시교육과 결별할 수 있는 기회이다. 이제는 학교에서 입시교육을 원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입시학원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해야 한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르쳐야 할 참된 교육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

"학벌체제를 타파하는 것은 차별과 불평등을 철폐하기 위한 일종의 계급투쟁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문화혁명이다."

김상봉 선생님의 저 말씀, 이제라도 이 미친 학벌사회에 살아가는 모든 분들한테 돌려드리고 싶다. 학벌사회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두 얼굴을 하고 살아 온 한 사람으로서, 간절하게….

학벌사회 - 사회적 주체성에 대한 철학적 탐구

김상봉 지음,
한길사, 2004


#학벌사회 #김상봉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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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기타 치며 노래하기를 좋아해요. 자연, 문화, 예술, 여성, 노동에 관심이 있습니다. 산골살이 작은 행복을 담은 책 <이렇게 웃고 살아도 되나>를 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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