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알리는 "통~통~" 경운기 소리

광양 하포마을 봄 들녘풍경

등록 2009.03.05 09:35수정 2009.03.05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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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가 내린다. 이 비는 무더운 한여름 짜증스럽게 내리는 장마 비와 다르다. 큰 소리를 내면서 직선으로 쏟아지는 소나기와도 다르다. 봄비는 부슬부슬 소리도 곱게 내린다. 마치 새 생명을 빨리 싹틔우기 위해 속삭이듯 내린다. 어제(3일) 야근이라 아침에 퇴근을 했다. 이런 날은 승용차를 이용하지 않고 일부러 우산을 쓰고 퇴근을 한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는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아침 6시부터 담양, 장성, 함평 등 전란남도 일부 지역에서는 대설주의보가 발효되었다. 꽃피는 봄에 무슨 날벼락이람. 일부 지역에서는 한 겨울에나 걸리는 비상이 걸려 폭설 피해에 대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광양은 일 년에 눈 한번 올까 말까 하는 지역이라 눈 대신 봄비가 내렸다. 긴 겨울 가뭄에 밭작물 해갈에 딱 좋은 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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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리 ⓒ 조도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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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 ⓒ 조도춘


어제 밤부터 내린 봄눈은 백운산 자락을 하얀 설산으로 만들어 놓았다. 텃밭에서 겨울을 이겨낸 봄동은 노란 꽃을 피웠다. 하루 종일 내릴 것 같은 비는 오후가 되자 그치고 구름이 점점 걷히기 시작한다. 봄비는 보리 싹에 투명옥구슬을 매달아 놓고 촉촉한 매화꽃에 반한 아낙네는 걸음을 멈추고 춘경에 빠져 들게 한다. 겨울가뭄에 잔득 움츠렸던 보리는 봄비에 생기를 되찾고 매화꽃 핀 들녘 보리논은 푸름이 짙어간다.  

새 생명의 씨앗을 심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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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갈이 ⓒ 조도춘


"고구마도 놓고… 저기 밭이 있는데. 여기는 나무 때문에 묵가 놓았더만 그것이 공사에 싹 들어 가부러 고구마 놓을 데가 없어."
"콩도 숨고 깨도 갈고 되는대로 마늘도 심고……."

봄비가 그친 오후. 경운기소리가 요란하다. 농부는 거친 묵정밭을 갈고 있다. 문명선(78·하포마을) 할아버지는 "봄비가 스며든 촉촉한 땅을 경운기로 갈기에 적합한 때"라고 한다. 올봄에는 묵혀놓은 밭에 콩, 깨, 고구마, 마늘 등 다양한 밭작물을 심을 계획이라고 한다.  


묵정밭에 심어놓은 매화나무가지 사이사이마다 하얀 꽃이 활짝 피었다. 할아버지는 "빈 밭을 그냥 묵혀놓기에 뭐해서 매화나무를 심어놓은 것이여"라고 설명한다. 많던 논밭이 건설공사 부지로 편입되는 바람에 농사지을 땅은 이제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묵정밭은 그중에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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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갈이 ⓒ 조도춘


할아버지는 경운기 회전괭이가 닿지 않은 매화나무 한 뼘의 땅까지 꼼꼼히 갈아엎는다. 평생을 일구어온 땅이 공사부지로 없어지자 그동안 손길이 닿지 않은 묵정밭에 온 정성을 쏟는다. 어부가 바다를 떠나서 살 수 없듯이 농부의 땅 사랑이 느껴진다. 봄비를 머금은 꽃에서는 싱싱한 봄의 기운이 느끼게 한다.      


까치는 텃밭 언덕에서 꼬리를 끄덕이며 먹이를 찾고 있다. 농사일을 돌보는 시골 농부의 모습이다. 날개를 접고 걷는 모습은 두 손을 뒷짐 짓고 논밭 이곳저곳을 살피는 농부 모습과 흡사하다. 녀석은 시끄러운 경운기 소리에 아랑곳 않고 밭두렁 사이를 유유자적 하면서 먹이사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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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새 ⓒ 조도춘


딱새 한 쌍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아서 짧은 꼬리를 끄덕이면서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주위를 살핀다. 녀석의 모습을 카메라 영상에 담아볼까 욕심을 내며 가까이 다가서자 "탁~ 탁~" 소리를 내면서 조금 먼 곳에 있는 나뭇가지로 자리를 옮겨 간다. 다시 가까이 가려고 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자리를 옮긴다. 놀림을 당하는 느낌에 괘씸한 마음이 든다.

반대로 텃밭 모퉁이로 돌아 다시 가까지 다가서려 하자 녀석들은 약 올리듯이 원래 앉았던 가지로 또다시 자리를 옮겨 간다. 영상에 닮으려는 욕심을 접고 먼 거리에서 녀석을 지켜보았다.

이 텃밭을 떠나지 않고 나를 피해 자리를 옮겨가는 이유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한참 동안 녀석들 살펴보았다. 녀석들은 경운기가 갈아엎은 풋풋한 텃밭에 욕심이 있었던 것이다. 겨우내 땅속에서 잠자던 곤충애벌레를 쉽게 잡는 횡재를 한 것이다. 녀석들의 속마음도 모르고 숨바꼭질을 하던 나의 모습이 우습다.

경운기과 함께한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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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기 소리 지난 3일 광양 하포마을 텃밭갈이를 영상에 담았습니다. ⓒ 조도춘


"경운기하고 몇 년 사신 거예요."
"오래 되었지"
"30년 40년 되었나요 경운기가"
"50년 되었지. 50년."

"이게 맨 처음에 나올 때 경운기 구입한 거라"
"그런게 이게 구가다(구형)가 되어갔고 부석(부품)을 못 갈아 "

"엔진은 잘 돌아가는 디. 저 저 발구락(회전괭이) 저런 것이 땅을 파야 되는데 그걸 안 맨들어 살디가 없어"

할아버지는 경운기 소리가 이상하자 일을 멈추고 잠시 기계를 살펴본다. 경운기도 많이 낡았다. "통통~" 돌아가는 기계소리로 경운기의 이상상태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50년을 경운기과 함께 한 삶. 기계와 도란도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할아버지의 젊은 날의 고락을 함께 했던 녀석이라 삶의 동반자나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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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꽃 ⓒ 조도춘


할아버지는 쉬지도 않고 오랫동안 밭 갈기에 여염이 없다. 까치는 까치대로 박새 커플은 박새 커플대로 모두 바쁜 모습이다. 서로서로는 관심이 있는 듯 없는 듯 하는 모습은 한적한 시골풍경 그 자체 모습이다. 밭고랑사이에는 냉이가 하얀 꽃을 피웠다. 할아버지의 작업은 계속되고 쪽파, 마늘도 봄기운에 제법 키가 쑥쑥 자랐다.  

"경운기가 어르신하고 같이 사시다 보니까 어르신을 자꾸 닮아 가는 것 같아요" 하자 "허 허" 웃는다.

"고장 나면 다 고쳐서 사용하세요."
"하. 고장 나면 나가 다 고쳐 쓰지. 보링(엔진내부청소)도 내가 해갔고 써"

벌써 폐기처분을 해도 여러 번 했을 경운기다. 할아버지의 세심한 기계관리 덕분에 텃밭농사에 아직도 제 역할을 발휘하고 있다. 

"괜찮은디. 아직까지 큰 병원은 한번도 안 가는디. 감기정도 들면 가서 약 사먹고 자꾸 나이가 들어간께 자꾸 아픈 데가 생기는구먼"

할아버지가 관리하는 50여년이 넘은 기계는 많이 낡았지만 사용하기에는 상태가 좋은 편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할아버지의 몸은 점점 이곳저곳이 아픈 데가 생긴다고 한다.

덧붙이는 글 | u포터에 송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u포터에 송고했습니다.
#경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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