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업자의 청혼, 언감생심일까요?

"저 오늘 여자친구에게 청혼합니다"

등록 2009.03.07 16:43수정 2009.03.10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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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겐 동갑내기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79년생 양 띠입니다. 우리는 지난해 10월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났습니다. 오산에 사는 여자 친구와의 첫 만남은 수원역부터입니다. 산책과 운동, 독서를 좋아한다는 점에 교제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고 여자친구도 다행히 저와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 후로 저희는 주말이면 오산, 그녀가 다니는 교회와 교외에서 만나왔습니다.


그렇게 우린 서로 마음의 문을 열고 알아나갔습니다. 하지만 난관도 있었습니다. 바로 불투명한 회사 사정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계속되는 불안한 회사 상황은 자연스러운 교제에 있어 앓던 이와 같았습니다. 급기야 구조조정이 이뤄졌고 여자친구에게는 이런 사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미련하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전 그녀와 결혼 생각을 했습니다. 그 만큼 훌륭한 성품과 긍정적인 태도가 제 마음을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곧이어 난관이 닥쳤습니다. 수당과 상여금이 줄자 전체 연봉도 삭감됐고 당장 결혼 자금 마련은 언감생심일 정도로 암울했습니다.

이는 비단 저만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다행히 아직까지 직장을 갖고 있지만 아직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수 백 만 청년들에게 이 땅에서 꿈꾸는 행복한 미래는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입니다. 또 재직한다 해도 언제 또 다시 감원 태풍에 휩쓸려 거리로 나앉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저는 점점 자신감을 잃어갔습니다. 암울한 경제 상황에 살림살이마저 팍팍해 지다보니 삶의 여유도 그만큼 없어졌습니다. 회사가 당장 휴업에 들어가면 저는 출근하지 않습니다. 급여는 정부 보조로 나오겠지만 문제는 앞으로입니다. 언제 휴업이 끝날지도 모르고 다시 예전처럼 경기가 좋아져 회사가 다시 제2 도약을 하리란 보장도 없기 때문입니다.

경기 불황과 소득 감소, 최악의 고용 대란 파고 속에서 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2030세대들은 지금 절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고 설사 취업을 한다 해도 허울뿐인 잡셰어링 정책에서부터 불평등과 불합리를 감수해야만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이대로 고개 숙일 수만 없습니다. 저에겐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서럽기도 하지만 차디찬 이 현실을 함께 이겨나가고 저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여자친구의 존재는 저에게 큰 위안이 됐습니다.

사실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회사 문제로 의기소침한 저 자신을 생각해보니 여자 친구에게 혹시나 서운함을 주지 않았는지 염려가 됐습니다. 제가 기분이 좋지 않거나 힘이 없을 때도 항상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따뜻한 사람입니다.

통장에 얼마 남지 않은 잔고는 커플링 제작에 요긴했습니다. 회사에서 언제 다시 급여가 들어올지 기약할 순 없어도 저는 희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일수록 저와 여자친구가 함께 지혜를 모아 알뜰하게 산다면 금방 일어설 것이라 믿습니다.

빛을 내서라도 청혼은 근사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과 지인들을 통해 알아봤지만 저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호텔 급은 100만원, 웬만한 레스토랑도 30만원은 있어야 가능하더군요. 물론 카드로 긁어 결제할 수 있지만 전 순수하게 마음을 전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 장문의 청혼 편지를 썼습니다.

혹시나 평생에 한 번 뿐인 청혼에 찌질하게 돈 아끼느냐고 손가락질 하실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녀와 결혼은 하고 싶고 주머니 사정은 여의치 않으니 말입니다. 장소는 그녀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출석해 온 종교 기관 앞 잔디 마당입니다. 전 이제 촛불과 커플 반지 장미꽃 한 다발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녀가 저의 청혼에 어떤 선택을 할지 모릅니다. 분명한 건 그녀가 저의 진심을 받아줄 것이라는 믿음이고 행여나 경제적 아니면 여건상 어렵다면 내년에라도 다시해 볼 생각입니다. 몇 시간 후면 그녀와 만납니다. 가슴이 조마조마 합니다. 그녀의 '예스'만을 간절히 기원하며 부족하지만 저의 글을 이만 줄일까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프로포즈 #청혼 #사랑 #경제 #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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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세 자녀를 키우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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