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노근리 학살, 이렇게 이루어졌다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18] 제5장 '우주와 노근리'

등록 2009.03.15 16:11수정 2009.03.15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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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전투사령관을 맡은 미 제1사단장 호바트 케이 소장은 피난민을 위장한 북한 인민군의 침투를 우려했다. 그래서 그는 전투 지역의 민간인을 격리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을을 비우게 한 후, 나타나는 민간인들은 무주건 사살하라는 명령도 추가되어 있었다.

1950년 7월 23일 정오 무렵이었다. 미군 지프 한 대가 주곡리 마을로 들어왔다. 미군 장교는 대동한 한국인 통역을 시켜 말했다.

"주곡리에서 곧 전투가 벌어질 테니 주민 전원은 즉시 마을을 떠나시오."

미군 장교와 통역은 이 말만을 남기고 곧 지프에 올라 어디론지 가 버렸다. 주민들은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식량과 취사도구가 우선이었다. 노숙에 대비해 침구도 가져가야 했다. 닭이나 돼지를 끈으로 묶는 사람도 있었다. 가보나 족보는 따로 마당에 묻기도 했다.

500명의 주민들은 가까운 임계리로 향했다. 김성식의 6촌 정구헌은 아직 말라리아가 다 낫지 않은 동생 구학을 지게에 태워 짊어졌다. 막상 임계리에 와 보니 그들을 다 수용하기에는 집이 턱없이 모자랐다. 사람들은 헛간은 물론 처마 밑, 나무 아래, 심지어는 산의 동굴을 찾아가서 짐을 풀었다. 한낮에 유난히 날이 덥더니 저녁이 되자 비가 쏟아졌다. 방과 마루와 부엌에 꽉 들어찬 사람들은 대포 소리와 네이팜탄의 섬광에 두려움을 느끼며 꼬박 밤을 새웠다.

한편 미 공군은 육군의 요청을 받아들여 움직이는 피난민들에게는 기총소사를 한다는 방침을 정해놓고 있었다. 8명이 넘는 사람이 모여 있으면 공격하라는 지침이 공군 조종사들에게 내려져 있었다.

7월 25일 화요일 미 공군 대령 터너 로저스는 미군의 노골적인 비전투원 공격이 난처한 상황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경고 메모를 상부에 올렸다. 영동에서 황간으로 이어지는 대로상에서 50여 명의 피난민들이 미군의 공격을 받은 이후의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현장 지휘관의 사려 깊은 경고는 묵살되었다.


7월 25일 오후 늦게 경비행기 한 대가 임계리 상공에 날아와 저공으로 선회했다. 비행기는 어찌나 낮게 날았는지 헬멧을 쓴 조종사가 다 보일 정도였다. 아이들은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저녁 무렵에 무장 병력 10여 명을 태운 미군 트럭이 임계리로 들어왔다. 그들은 주민을 다 모이게 한 후 통역을 시켜 말했다.

"남쪽으로 떠나야 합니다."


미군들은 총구를 들이대고 주민들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짐을 챙길 틈도 주지 않았다. 불과 이틀 전 주곡리에서 임계리로 피난 온 주민들이었다. 그런데 다시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노인들은 피난길이 내키지 않았지만 미군이 총을 들이대고 위협하는 데야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다시 남자는 짐짝을 짊어지고 여자는 보따리를 머리에 인 피난민 행렬이 만들어졌다. 피난민들이 마을을 벗어나 밭가에 이르자 한 미군이 나서 일본말로 물었다.

"여기 군인 없느냐?"

이미 미군에게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 사람들은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 군인 없어?"

누군가가 일본말로 대답했다.

"나이데스(없어요)."

하지만 미군은 20명의 젊은이를 솎아내 어디론가 데리고 갔다. 그러자 주민들의 불안과 공포는 극에 달했다. 수백 명의 피난민들은 한밤중까지 걸었다. 어둠 속에서 도랑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아까 끌려간 20명의 젊은이들이 공포에 질려 웅크리고 있었다.

한 청년이 나서 통역에게 우리는 모두 무고한 양민임을 전해달라고 애원했다. 마지못해 미군에게로 간 통역은 미군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통역은 주민들에게 와서 무조건 엎드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만약 고개를 들면 미군이 사살할 거라고 위협했다. 그러고 있다가 내일 아침 10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했다.

주민들은 아기 울음소리와 총성과 포성을 들으며 밤을 지새워야 했다. 바로 옆에 나 있는 철길 위로는 미군이 줄을 이어 후퇴하고 있었다.

아침이 되어 고개를 든 주민들은 미군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들은 미군에 의해 초토화된 마을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남행을 시작했다. 그것은 피난이 아니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하기 위한 사투였다. 북쪽은 전선이니 남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어느 사이에 난민 대열은 6,7백 명을 헤아리는 정도로 불어나 있었다.

동생을 지게에 태운 구헌은 좌우를 둘러보았다. 언제나 관심에서 지울 수 없었던 이장 댁  소녀 계순과 댕기머리 희숙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뒤로는 처녀 선생님 정구옥이 있었다. 해찬네 대가족 15명, 춘자와 그녀의 남동생 태성이도 끼어 있었다.

너는 살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지

뙤약볕에 지친 그들이 쉼터로 자리 잡은 곳은 노근리 쌍굴다리 밑이었다. 쌍굴다리와 주변 철길에는 최소 500명으로 추정되는 피난민들이 더위와 굶주림에 지친 몸을 땅바닥에 붙인 채 쉬고 있었다. 그런데 푸른 군복을 입은 미군이 다시 나타났다. 모두가 낯선 미군이었다. 어제 주민들을 격리시켰던 미군이 아니었다. 느낌으로 보아 다른 부대원임을 알 수 있었다.

지휘관인 듯한 군인이 무전병과 얘기를 나눈 후, 미군들이 총을 들고 와 주민들을 한데 모았다. 주민들을 모두 다리 밑으로 몰아넣은 미군은 큰 길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구헌은 갑자기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동양인처럼 생긴 군인 하나를 붙잡고 더듬거리는 일본어로 애걸했다.

"우리는 양민입니다. 우리를 좀 도와주세요."

군인은 측은하다는 눈길로 구헌을 내려다보더니,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라고 말하더니 그냥 가 버렸다.

미군들이 모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러자 또 경비행기 한 대가 나타나 저공 선회 비행을 했다. 사람들은 이제 누구도 비행기에 손을 흔들지 않았다.

배고프다고 보채는 아이들, 더위 먹은 아이에게 부채질을 해 주는 엄마, 노인에게 미숫가루를 떠먹이는 며느리, 웃통을 벗어젖힌 남자들, 손자를 어르는 할머니, 아픈 다리를 주무르는 할아버지 등 모두가 기운이 빠져 시들시들했다. 숲의 매미들만 쉬지 않고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한국의 피난민들이 그 날 오전에 있었던 미군 수뇌부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피난민 통제 대책을 보고하라는 맥아더 미 극동사령부에 워커 미 8군사령부는 '피난민이 아군의 전방 지역을 통과하는 것을 일절 불허하기로 했다.'는 보고서를 올려놓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미군이 부는 호루라기 소리가 언덕 쪽까지 들려왔다. 서로에게 신호라도 보내는 것인지 이번에는 반대편에서도 호루라기가 화답했다. 불현듯 매미 소리도 멈춰 버렸다. 삽시에 사방에는 여름 정적이 감돌았다. 산 너머 황간 쪽에서 이상한 음향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그 소리는 금세 소름끼치는 굉음으로 변했다.

낮은 뭉게구름을 뚫고 나타난 세 대의 비행기가 쌍굴다리를 향해 곤두박질하듯 달려들었다. 순간 구헌은 하늘을 볼 틈도 없이 귀청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폭발음을 들었다. 이어서 한동안 기총 소리가 지축을 울렸다. 먼지 속으로 부채와 신발과 봇짐과 흰옷, 그리고 섬뜩하게도 사람의 팔다리들이 솟아올랐다. 구헌의 등에는 뜨겁고 물컹한 것이 떨어졌다. 그것은 몸체를 멀리 두고 떨어져 날아온 여자 아이의 머리였다. 순식간에 최소 수백 명이 즉사했음이 틀림없었다.

운좋게 아직 살아남은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언덕 쪽에서 총소리가 들렸다. 미군 병사들이 무차별로 총을 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리 밑에서 나와 산비탈로 기어오르다 미군의 총에 맞고 비탈 아래로 굴렀다. 구헌은 움직이지 않고 다리 밑 물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다시 옆에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진동했다. 미군이 쏜 박격포탄이었다. 그 후로는 총성이 잦아들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을 때는 어김없이 총성이 울렸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하루 종일 죽은 척하고 엎드려 있었다. 밤이 찾아들었고 달빛마저도 없어졌을 때, 구헌에게 다가와 그를 껴안는 소녀가 있었다. 평소 가슴을 설레게 했던 소녀 계순이었다. 그녀가 스스로 구헌의 품에 안겨 온 것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흉측하게 으스러져 있었다.

"구헌아, 난 널 좋아했어. 하지만 나는 곧 죽을 것 같아. 너는 살아 나가야 돼. 그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야지."

그녀는 머리를 떨어뜨리더니 낮은 신음을 한 번 토한 후 영영 저 세상으로 가 버렸다.
#노근리 #주곡리 #임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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