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경 판사 "여론에 굴복한 대법관 사직 안 돼"

법원 내부통신망에 글 올려... "판사가 다른 판사 사직 운운해서도 안 돼"

등록 2009.03.18 17:04수정 2009.03.18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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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경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자료사진). 정 판사는 지난 2월초 '막말 재판' 보도와 관련 <조선일보>를 상대로 2억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정진경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자료사진). 정 판사는 지난 2월초 '막말 재판' 보도와 관련 <조선일보>를 상대로 2억 손배소를 제기하기도 했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현재까지 판사가 너무 쉽게 사직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판사의 사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오늘 여론의 압박에 굴복해 대법관이 사직한다면 내일 또 다른 여론에 의해 다른 대법관이 공격받고 사직하게 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정진경 부장판사는 18일 법원내부통신망에 올린 '최근의 사건에 관한 소견'이라는 글에서 "판사가 여론의 압박에 불복해 사직하는 것은 장기적으로 사법부 독립을 해하게 될 것"이라며 이 같이 주장했다.

 

정 부장판사는 먼저 "신영철 대법관의 행위가 다소 지나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신 대법관을 옹호하고자 하는 생각도 없다"며 선을 긋고, "하지만 최근 일련의 논의과정을 지켜보면서 몇 가지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할 필요가 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신 대법관의 거듭된 의견개진을 문제 삼는 가장 큰 이유는 법관의 독립성을 침해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라며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과거 법원장이 정치권력의 주문을 그대로 재판부에 전달했던 시기와는 현저히 다르다"고 밝혔다.

 

이어 "최근의 사건은 법조 선배로서 경험이 앞서는 법원장이 법관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후배들에게 제시한 것으로서 문제의 본질은 법관의 독립에 대한 침해라기보다는, 사법관료화와 의사소통의 부재"라고 진단했다.

 

법관 경험 부족 문제

 

그러면서 정 부장판사는 우선 '법관의 경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법관의 독립이 '법관의 독단을 용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현재 사법연수원을 수료하면 바로 법관이 되고, 군법무관 제대자의 경우 불과 수 년 만에 재판장을 맡게 되는 경우도 있고, 행동의 제약으로 폭넓은 인적 교류가 제한돼 타인을 판단하는 법관이 그 경험과 연륜에 있어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기에는 현저히 부족한 경우가 많다"고 경험과 연륜이 짧은 판사의 경력을 우려했다.

 

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장이 되면 타인이 자신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최근의 사건도 법관은 촛불시위의 목적이 아무리 순수한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시위의 형태가 현행법에 저촉된다면 그에 따라 결론을 내면 그만이다"고 말했다.

 

"판사의 입장에서는 진보세력이 보수정권에 대항해 시위를 했건, 보수세력이 진보정권에 대항해 시위를 했건 그것은 큰 의미가 없다"며 "그리고 시기를 놓친 형사처벌은 마치 김빠진 맥주처럼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정 부장판사는 "국가 형벌권의 행사가 신속하고도 적절하게 이루어져 입법자의 의사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은 판사의 중요한 의무이고, 판사는 시위가 헌법상 보장된 표현의 자유의 범위 내의 것이라면 무죄를, 그 범위를 넘어서 실정법에 위반된 것이라면 유죄를 선고하면 그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법원장은 단독판사에 비해 경험이나 연륜에 있어 앞선 법관이고 사법행정의 담당자로서 개개의 재판장보다 더 넓은 시각에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경험이 부족한 재판장의 입장에서 이러한 법원장의 의견 제시는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조언"이라고 설명했다.

 

"판사가 언론에 제보해 문제 해결하려는 것은 온당치 않아"

 

정 부장판사는 그러나 "법원장의 의견제시가 경청할 가치가 있는 조언이기는 해도 재판장의 의견과 다른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다"며 "이와 같이 재판권과 사법행정권이 충돌하는 경우에는 사법행정은 재판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므로 사법행정이 후퇴함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어 "재판장은 법원장의 의견을 충분히 검토한 후 그에 따르는 것이 자신의 법적 양심에 반한다고 생각한다면 법원장에게 정중하지만 정확하고도 단호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해야 하고, 개인적으로 하기가 어렵다면 동료들과 의논해 함께 찾아가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다"며 "그럼에도 법원장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면 판사회의를 소집해 문제를 거론함으로써 사건의 재발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타인의 권리침해를 구제해야 하는 판사들이 법원 내부의 절차를 생략한 채 외부의 언론기관에 제보해 여론의 힘에 의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온당한 태도가 아니다"며 "비록 효과적이고 손쉬운 방법이긴 해도 법관의 독립을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사법부의 독립을 침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것"이라고 경계했다.

 

또한 "최근의 사건을 계기로 가뜩이나 부족한 사법행정권자와 재판장들의 의견교환이 아예 단절되고 재판장의 재판이 독단에 흐를 위험성을 인식해야 한다"며 "비록 성가시고 다소의 압력으로 느껴진다고 해도 법원 내부에서 재판진행과 관련한 이견을 듣고 이를 충분히 소화해 재판에 반영하는 것은 신뢰받는 재판을 함에 있어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관료화된 사법제도와 소통의 단절

 

이와 함께 정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의 근본적인 문제는 현재의 관료화된 사법제도와 소통의 단절에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법원장과 의견을 같이하는 경우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고, 의견이 다른 경우라도 법원장에게 (인사)평정권이 없다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리고 개개의 재판장의 나이나 경험이 자신과 유사하다면 감히 법원장이 재판절차의 진행과 관련해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개진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이 한 법원 내에서도 판사 사이의 경력에 있어 30년 정도의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모든 판사를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경력에 따라 승진을 거듭하는 관료제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며 "헌법에는 대법관과 일반법관밖에 없어 모든 판사는 동등해야 함에도,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먼 상황이 돼 버렸다"고 지적했다.

 

정 부장판사는 "제가 임용된 1989년에 비해 20년이 지난 지금 판사의 수가 증가하고 인사의 투명성을 위해 도입한 법관평가제의 영향으로 법원의 관료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이로 인해 거대 법원에서는 법원장과 일반판사 사이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은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이어 "우리와 같이 피아(彼我)를 구분하는 사회에서 아무리 판사가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판사가 남으로 인식되는 한 사법에 대한 국민의 신뢰확보는 불가능한 것이니, 제대로 된 배심제를 도입해 국민으로 하여금 직접 재판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며 "이번 사건이 이러한 근본적인 사법시스템에 대한 검토와 개선으로 이어지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판사가 판사 사직 운운해서는 안 돼"

 

끝으로 정 부장판사는 판사들이 다른 판사에 대한 사퇴를 말하는 것을 삼가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판사는 어떤 경우라도 다른 판사에 대해 사직을 운운해서는 안 된다"며 "판사가 법관의 독립을 이유로 법원장을 공격하면서, 그 판사의 헌법상 신분보장을 침해하는 언동을 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된 행동"이라고 지적했다.

 

또 "현재까지 판사가 너무 쉽게 사직하다 보니 우리 사회가 판사의 사직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도 꼬집었다.

 

정 부장판사는 "판사의 거취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을 뿐"이라며 "오늘 여론의 압박이 있다하여 이에 굴복해 대법관이 사직한다면 내일 또 다른 여론에 의해 다른 대법관이 공격받고 사직하게 될 수 있으며, 이는 장기적으로 사법부의 독립을 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그러면서 "판사는 헌법상 독립된 기관으로서 그 지위에 걸맞게 무게 있는 처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2009.03.18 17:04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신영철 대법관 #정진경 #대법관 #로이슈 #촛불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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