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째, 매일 아침 108배 하는 까닭

우울증이 찾아올 때 떠올리는 나만의 '주문'

등록 2009.03.23 16:20수정 2009.03.23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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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심해져서 늘 가족들이 돌아가며 지켰었는데 그날 잠시 자리를 비웠대요. 그때 15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네요."


J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 겨울이다. 3년 전 불교 공부를 함께 한 J가 자살을 했다니. 이유는 묻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J의 자살 소식을 듣던 날, 오래도록 새벽잠을 설쳤다.

J의 자살, 이유는 묻지 않았다

 J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 겨울. 15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
J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건 지난 겨울. 15층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이유는 묻지 않았다.최은경

J는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분신을 했었단다. 얼굴도 흉하게 일그러졌고, 손가락도 귀도 다 오그라 붙었다. J가 하는 말을 들으려면 아주 집중해서 귀를 바짝 들이대야 했다. 함께 밥을 먹을 때면 국물과 밥알이 자꾸 흘러내렸다. 난 J가 그걸 창피해 할까봐 고개를 들고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오늘 비 오는데 나오실 수 있겠어요?"
"어떻게든 갈 게요. 비 옷을 입고서라도…."

윤흥길의 '장마'가 생각날 정도로 지리한 비가 계속되던 어느 날, 약속과 달리 그 친구는 모임에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전화를 했더니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J는 우산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 큰 어른을 일일이 누가 데려다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비가 와서 모임에 못 나가도 전화해주는 사람이 없었는지, 일부러 전화해준 내게 여러 번 "고맙다"고 했다. 그때 1년간 함께 공부한 이후로 J를 보지 못했고, 최근에야 소식을 들었을 뿐인데. 자살했다는 소리가 아프게 나를 찌른다. 마치 그의 자살이 내 관심부족에서 비롯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이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살을 생각해보지 않을까 싶다. 학생 때는 성적 때문에, 성인이 돼서는 사랑 때문에, 결혼해서는 부부갈등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나이 들어서는 병 때문에, 자살의 충동을 느낀다.


나는 워낙 소심한 성격이라 자살 충동은 느끼지 않았지만 5년 전 갑자기 남편이 아프면서 우울증과 함께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왜 내가, 내가 뭘 잘못해서"라는, 해봐야 소용없는 말로 나 자신을 학대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가끔 심하게 가라앉을 때가 있다. 내 딸들은 어디서 들었는지 "엄마 갱년기 아니야?"라고 진지하게 물어 내게 매를 번다. 이제 겨우 마흔을 넘긴 엄마한테 갱년기라니.

"왜 내게 이런 일이... 뭘 잘못했다고"

"Y엄마가 불행하다 느끼면 아이들은 똑같이 느껴요. 그렇게 따지면 이 세상에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집 아이들은 다 불행하게요? 아이가 아빠와 살면서 행복했던 걸 추억으로 받아들이게 해주는 건 엄마 몫이에요."

"알아요. 그런데 그게 안 돼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나요? 내가 뭘 잘못하고 살았다고?"

"당신이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일어난 거야. 부정한다고 현실이 달라지지 않잖아요. 남편이 죽는다고 아이들 내팽개칠 거예요? 안 그럴 거잖아. 지금 아이들이 불안해 하는 건 아빠가 아파서가 아니라 엄마가 불안해 하고, 자기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니까 아이들도 불행하다 느끼는 거예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꼬였죠? 여자로서 내 인생은 뭐예요? 언니는 그런 생각 안 들어요?"

"우린 여자가 아니라 엄마야, 엄마.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 신이래요. 여신."

'엄마는 여자가 아니라 여신'이라는 말은 내 자신에게 주문처럼 하는 말이다. 5년 전 내가 Y엄마와 같은 상황이었을 때다. 나만 괴롭고 우울하면 되는데 그 영향이 아이들에게까지 심각하게 전해졌다. 그때 큰딸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사춘기가 와서 입을 다물었고, 막 1학년에 입학한 둘째는 자신의 날카로움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다. 

난 그때 아이들에게 왜 그러냐고, 왜 잘 못 지내냐고 화만 냈지, 아이들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없었다. 왜? 내가 너무 힘들었으니까. 내 스스로 당시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으니까.

그런데 병이란 것이 묘한 속성이 있어서 결국에는 당사자는 물론 주변 사람들까지 겸손하게 만든다. 병이 내게 왔을 때는 분명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다. 절대 그냥 오지 않는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못 알아차리고는 그 사람의 몫이다. 본래 타고나기를 겸손과 거리가 있는 내가 두 무릎을 꺾고 엎드리게 된 건 다 아픈 남편과 아이 덕분이다.

4년째, 매일 아침 108배 하는 까닭

 4년째 매일 아침, 하루도 안 빼고 108배 절을 한다. 누구를 숭배해서 하는 절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참회하는 절이다.
4년째 매일 아침, 하루도 안 빼고 108배 절을 한다. 누구를 숭배해서 하는 절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참회하는 절이다. 권영숙

"엄마는 이 세상에서 뭐가 제일 두려워?"
"음… 욕심."

"에이? 욕심은 누구나 있는 거야. 아빠도 있고, 나도 있고, 언니도 있고, 이 세상 사람 다 있어."
"음… 그럼, 지나친 욕심."

난 정말 내 욕심이 두렵다. 왜냐하면 내 욕심대로 하려고 했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경험으로 알기 때문이다. 남편도 내 뜻대로 돼야 하고, 자식도 내 뜻대로 돼야 하고, 돈도 내 뜻대로 잘 벌려야 하고, 어느 모임에서건 내 주장이 관철돼야 하고, 심지어 대통령도 내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래서 늘 마음 속으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리라'를 외치고 살았다. 하지만 세상이 내 뜻대로만 이뤄지지 않는다는 건 당연 진리. 그것도 모르고, 난 내 뜻대로 안 된다고 화내고, 짜증내고, 상대를 원망했으니 내 인생이 얼마나 피곤했겠나.

난 내 뜻대로 안 되면 일단 외면했다. 그런데 아이들이 그런 엄마를 그대로 닮았다. 고집도 세고, 자기 뜻대로 안 되면 양보해서 같이 하기보다 안 해버리거나 외면했다. 아이들의 속성은 어른을 그대로 따라 배운다더니 참 맞는 말이다.

그래서 한 종교단체에서 마음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4년째 매일 아침, 하루도 안 빼고 108배 절을 한다. 누구를 숭배해서 하는 절이 아니라 나 자신을 참회하는 절이다. 사람이 자기 주장을 할 때는 누워 있던 사람은 일어나 앉게 되고, 앉아 있던 사람은 서게 되고, 서 있던 사람은 고개를 치켜들게 된다.

하지만 자신을 낮출 때 서 있던 사람은 앉게 되고, 앉았던 사람은 무릎을 꿇게 되고, 무릎 꿇은 사람은 고개를 숙이고 엎드리게 된다. 어제 하루를 살면서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상대를 원망하고 화낸 내 자신을 돌아보며 상대의 처지에서 문제를 바라본다.

"아, 당신 처지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군요. 당신이 그래서 화를 냈군요. 저는 제 생각에만 사로잡혀서 당신의 처지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느 날은 상대가 절대 이해되지 않아 이를 악다문다. 또 어떤 날은 너무 억울해서 절도 못하고 엎드려 울기만 한다. 어떤 사람은 하루만에 이해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사람은 몇 년 만에 이해되기도 한다.

상대가 옳고 내가 틀렸으니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처지에서 봤을 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이해의 마음을 내는 것이 참회임을 알았을 때 난 자유로워졌다. 상대가 바뀌어야 내가 바꿀 수 있다는 전제에서 놓여나 상대가 바뀌지 않아도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 버리니 어른이 되고, 주인된 느낌이다.

"엄마, 진작에 마음공부 하지 그랬어." 

내 딸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다. 까칠한 엄마가 많이 바뀌었단다. 농담 잘하고, 장난 잘 치던 예전의 엄마로 돌아왔단다. 현재 내 상황은 과거와 비교해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벌어놓은 돈은 별로 없고, 빚내서 장만한 집은 팔아도 빚도 다 못 갚고, 남편은 여전히 치료 중이고, 수입은 줄고 지출은 늘었다. 그러나 과거에 비해 훨씬 내 자신이 편안해졌다.

불쑥 우울이 엄습할 때, 토닥토닥 "괜찮아"

"한길엄마는 좋은 일만 있나봐."
"왜요?"
"늘 웃잖아, 편안해 보여. 한번도 찡그리는 걸 못 봤어."

우리 동네 14억 아파트를 가진 한 분이 주식이 폭락해 손해를 많이 봤다며 내게 죽을 상을 하고 왔다. 북한동포 돕기 모금함을 보면서 솔직하게 말한다.

"난 1000원 한 장도 저기에 넣을 수가 없어. 주식해서 쫄딱 망했어. 위로하려고 하지 마. 그 어떤 것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어."

그 어떤 것도 나를 위로할 수 없다는 그분의 절망이 내게도 전해졌다. 그래서 난 그분의 말을 충분히 들어만 줬다. 그날, 난 내 자신에게 고마움의 일기를 썼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내 마음이 고맙고, 나눌 수 있는 마음을 가르쳐 준 스승님이 고맙고, 세상을 향해 왜 나누고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준 제3세계와 북한동포에게 고맙고, 나눔의 이 길을 함께 가는 사람들이 있어 고맙고, 아픔을 잘 견뎌주는 남편과 아이들이 있어 고맙다고.

이 세상에 고맙지 않은 일은 하나도 없다. 나는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하다고 여기면 늘 부족함에 허덕이는 가난한 사람이 되지만 두 눈이 있어 볼 수 있어 행복하고, 두 다리가 있어 걸을 수 있어 행복하고, 두 손이 있어 집을 수 있어 행복하고, 두 귀가 있어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자가 된다. -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 스님 법문 중

부자가 되기도 하고, 가난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 건 내 마음이 짓는다. 한 생각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달라진다. 그렇다면 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까? 그렇진 않다. 여전히 내 안에 두려움과 욕심과 불안이 또아리를 틀고 있고, 불쑥불쑥 못 견디게 두려움을 동반한 눈물이 올라올 때가 있다. 그때 나는 그런 나를 토닥여 준다. 두려워하는 나를 꼴보기 싫어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그냥 가만히 바라봐 준다. 

'그래 니 마음도 아프구나. 그래 불안하지, 왜 불안하지 않겠니. 괜찮다. 다 괜찮다.'

남을 죽이는 것만 살인이 아니라 내가 나를 죽이는 것도 살인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받아줄 때, 나는 더 힘을 내서 오늘을 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토회 #108배 #우울증 #여신 #법륜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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