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75)

― '천추의 한이 된 거지' 다듬기

등록 2009.03.20 14:20수정 2009.03.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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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추의 한

 

.. "거창하게 국가니 사회니 이런 거 젖혀 두고, 자식 그렇게 된 게 천추의 한이 된 거지."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삼인,2008) 251쪽

 

 '거창(巨創)하게'는 '대단하게'로 다듬고, '국가(國家)'는 '나라'로 다듬습니다. '한(恨)'은 '아픔'이나 '생채기'나 '응어리'나 '슬픔'으로 손질합니다.

 

 ┌ 천추(千秋) : 오래고 긴 세월. 또는 먼 미래

 │   - 천추의 한 / 천추에 빛나다 / 원한을 천추에 남기는 일이 없도록 /

 │     왜놈들한테 나라를 팔아먹은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을 남긴 해

 │

 ├ 천추의 한이 된 거지

 │→ 씻지 못할 아픔이 된 셈이지

 │→ 잊을 수 없는 생채기가 되었지

 │→ 쌓이고 쌓인 응어리가 되었지

 │→ 두고두고 가슴아프지

 │→ 내내 괴롭고 아프지

 │→ 죽어도 잊을 수 없는 슬픔이지

 └ …

 

 국어사전에 실린 보기글을 살피니, "천추의 한"과 함께 "천추에 씻지 못할 한"이 실립니다. 한쪽은 토씨 '-의'를 붙인 보기글이고, 한쪽은 토씨 '-의'를 안 붙인 보기글입니다. 이렇게 써도 되고 저렇게 써도 되기에 이와 같이 보기글을 달아 놓은 셈일까요. 이래도 말이 되고 저래도 말이 된다는 소리일까요. 우리한테 여러 가지 쓰임새를 보여주는 셈일까요. 우리가 알맞게 쓸 말투란 따로 없이, 사람들이 이냥저냥 쓰는 모습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소리일까요.

 

 ┌ 천추의 한 (x)

 └ 천추에 씻지 못할 한 (o)

 

 생각해 보면, 우리 국어사전은 우리가 얼마나 알맞고 올바르고 살갑고 깨끗하고 싱그럽게 우리 생각을 드러내고 넋을 담아내느냐를 도와주는 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일러 줄 뿐입니다. 규정에 어긋나지 말라고 하는 으름장이기만 합니다. 말을 북돋우고 글을 살찌우도록 어깨동무하는 벗님이 안 되려 합니다. 말과 함께 삶을 다스리고, 글과 함께 넋을 보듬도록 손길 내밀어 주는 스승이 아니 되고 있습니다.

 

 ┌ 오래도록 한 / 두고두고 한 / 언제까지나 한

 └ 오래도록 씻지 못할 한 / 두고두고 씻지 못할 한 / 언제까지나 씻지 못할 한

 

 한자말 '천추'가 어떻게 하여 지어졌는지 아는 분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千 + 秋'인 '천추'는 "가을을 천 번 맞이하는" 만큼이니 "즈믄 해"를 가리키고, 즈믄 해란 무척 기나긴 나날을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즈믄 해에 걸쳐서 어찌어찌하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투인 셈이고, 말 그대로 "오래도록 어찌어찌하다"라 하거나 "두고두고 어찌하다"라 하거나 "언제까지나 어찌어찌하다"고 풀어내어 적을 때가 한결 어울리고 걸맞습니다.

 

 ┌ 씻지 못할

 ├ 잊지 못할

 ├ 털지 못할

 ├ 풀지 못할

 └ …

 

 또는, "씻지 못할"이나 "잊지 못할"로 손질해 봅니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일이나 두고두고 이어가는 일이란, 아무리 애써도 어찌하지 못하는 일인 터라, 아픔이고 슬픔이고 '씻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털지' 못했으니 그치지 않습니다. '풀지' 못했기에 언제까지나 엉키고 설킵니다.

 

 뜻을 헤아리면서 "가슴에 응어리가 지다"라 해 보아도 어울립니다. "가슴이 저리다"라 해도 괜찮고, "가슴에 피멍이 들다"라 해도 됩니다. "씻지 못하고 가슴 저리다"라 할 수 있고, "털지 못하며 가슴에 피멍이 들다"라 할 수 있습니다. "두고두고 씻지 못해 응어리가 맺히다"라 해 볼 수 있어요.

 

 뜻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따라 말은 새삼스럽게 살아나고, 느낌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글은 새롭게 자라납니다. 생각을 어떻게 나타내느냐에 따라서 말은 나날이 거듭나고, 느낌을 어떻게 펼쳐내느냐에 따라서 글은 언제까지나 아름다움을 꽃피웁니다.

 

 우리 스스로 말을 살리고자 한다면 말은 늘 새롭게 살아나고, 우리 스스로 글을 북돋우고자 한다면 글은 늘 남달리 거듭납니다. 우리가 몸소 나서서 말을 갈고닦고자 한다면 말은 언제나 싱그럽게 빛이 나고, 우리가 애써 소매 걷어붙이면서 글을 가꾸어 나가려 한다면 글은 언제나 아름답고 알차게 우리 삶터에 뿌리를 내립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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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0 14:20ⓒ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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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씨 ‘-의’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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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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