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

일본 큐슈로의 나홀로 기차여행 3

등록 2009.03.22 15:22수정 2009.04.06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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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1

아침에 일어나 짐정리를 마친 후 이 집을 떠나기 전...한 숨의 여유와도 같이...한 잔의 따끈한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습니다.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고 거실에 물끄러미 서서 정원을 내다봅니다. 참 아름답습니다. 수 십 가지의 화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그 중 단박에 눈을 붙잡는 것은 동백나무의 붉은 꽃이네요. 동백꽃의 싱싱한 붉은빛이 주위를 환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 피는 붉은 동백꽃을 일본인들은 봄의 벚꽃 만큼이나 매우 사랑한다고 합니다. 아마도 붉은 꽃잎에서 꺼지지않는 삶의 에너지를 느끼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료관 주인 아주머니이신 코토모상과 세 번의 진한 포옹으로 아쉬운 작별을 합니다. 코토모상은 갑자기 쪼르르 안방으로 들어가시더니 가면서 먹으라고 쌀과자와 설탕에 조린 팥알이 담긴 작은 과자상자를 건네주시네요. 그런데 과자상자는 하얀 바탕에 붉은 동백꽃의 문양이 아로새겨져있었습니다.

  유스호스텔에서 걸어 5분 거리의 가까운 신스이젠지역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이 역 정말 웃음이 나네요. 이런 기차역을 본 적이 있었을까요? 역내를 온통 알롱달롱 조화들로 유치하리만큼 구석구석 빈틈없이 꾸며놓았거든요. 정말 아기자기한 일본사람들이에요. 문뜩 이 역의 역무원의 얼굴이 보고싶더군요.

'어떤 생각을 가지면 이런 역내 풍경을 연출할 수있는 걸까?'

"왜 이렇게 꽃으로 장식하시게 되었나요? 마치 꽃집에 들어와있는 거 같네요...비록 조화이긴 하지만요...하하하..."
"우리 역을 잠시라도 특별한 것으로 기억하시라고요....저희는 늘 많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보내고 하는데, 잠시라도 그들에게 기억에 남는 뭔가 있으면 좋을 듯했습니다.."
"그러시군요...이미 전 이 역을 기억하게 될 거 같은걸요.."
  
얼마 기다리지 않았는데 2량 짜리 빨간 열차가 도착합니다. 작은 빨간 열차에 노랑 전조등! 열차에도 표정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귀여운 빨간 코알라 같습니다!

'맨 앞에 타세요!' 운전석 오른쪽 바로 뒷자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날씨여서 곧 눈이라도 내릴 거 같습니다.


  네, 도심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하네요. 와~~기대 이상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아예 배낭도 잊고 벌떡 일어서서 운전석 바로 뒤로 다가가 기찻길을 감상하고 싶어집니다.

  환상적입니다! 아소가는 기찻길이 아름답다하더니 결코 가벼운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순식간에 눈과 주위 풍경과 기차가 하나로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기찻길 옆 억새밭이며, 줄지어서있는 대나무들, 빼곡한 숲에 눈이 내려앉아 하얗게 분칠을 하고 그 사이로 좁은 기찻길 위를 빨간 코알라가 신나게 달립니다. 저기 멀리서부터 어지러운 눈발이 운전석의 앞 유리창으로 날아 달려오더니 제 눈 앞에서 산산이 흩어집니다. 생각이 정지하고 온 마음이 눈의 움직임에 닿는 순간 부웅 뜨는 느낌입니다. 뭔가 떨어져 나간 듯...황홀한 순간입니다!


 다시 가을걷이가 끝난 텅빈 들녘위로 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는 창밖 풍경을 마음에 담습니다. 그 위를 푸르르 새떼들이 가로질러 날더니 눈발 사이로 점점 멀어집니다. 기차는 이름 모를 역에 멈추었습니다. 기차역 거울 속에 비춰진 빨간 코알라 열차가 빙긋이 웃고 있네요. 손을 흔들어 봅니다.

다시 다음 역을 향해 달립니다. 눈은 점점 굵어지고 주위는 온통 흰 눈 속에 파묻혀 고요해집니다. 더불어 흥분되었던 제 마음도 많이 차분해 졌습니다. 감동의 물결도 저 밑으로 잠잠히 가라앉고 다만 바라봅니다. 소박한 마음만으로 바라봅니다. 나무도 풀도 들판도 바람마저도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여 하나가 된 거 같습니다. 그리곤 눈이 날리는 데로 휙휙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는 듯합니다. 은하철도 999가 갑자기 생각나 피식 웃고 맙니다. 우주 정거장 어딘가로 달려가는 은하철도 999에 타고 있다는 상상을 피식~ 해봅니다. 

아소역에 가까워지는 걸까요? 산세가 점점 높아지고 저기 아래 마을이 눈 속에 잠들어있네요. 기차가 멈췄습니다. 운전자가 내리더니 기차가 운전자도 없이 갑자기 후진하기 시작했어요. 아마도 뒤쪽 운전석에서 운행하나봅니다. 배낭을 들고 뒤 칸으로 옮겨갔습니다. 거의 도착하자마자, 운전자가 나오더니 원래 자리로 돌아가네요. 저도 다시 원 자리로 돌아왔죠. 괜스레 겸연쩍어 주변 사람들을 바라봤는데 한 젊은이가 피식 웃고 있는 거에요.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소역은 얼마나 남았나요?"

 그는 웃으며 손가락으로 운전자 바로 뒤쪽 역 이름이 표시된 게시판을 가리켰어요. 다시 무안해지더군요. 저는 고개를 까닥하며 알아들었다는 표시를 해주곤, 깡총, "One!" 또 뛰어 올라 "Two!" "Three!" "Four!" 하며 역을 하나씩 세어갔어요. 마지막으로 아소역을 손가락으로 찍으며 확인의 사인을 보냈습니다. 그는 웃으며 "하이~" 하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자꾸 어린애처럼 구는 이상한 행동이 난발되는 거예요. 다행히 외국나라에서 뭐 절 기억하는 사람도 없을 테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눈은 끝없이 내리고 있더군요, ㅋ  

  10시 25분. 작은 설국...아소역에 도착했습니다. 아담하고 소박한 작은 간이역 분위기입니다. 미닫이 문이네요..하하하...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사무실 안에는 철도원 아저씨 한분 만이 고요히 일에 열중하고 대합실 한가운데에 따뜻한 불빛의 낡은 석유풍로가 작은 눈사람처럼 서있습니다. 이런 오래된 풍로를 본 적이 언제였을까요? 아마도 단발머리 중학교 시절이었을까요? 이 편안하고 푸근한 느낌! 빛 바랜 사진첩에 불쑥 들어와있는 듯한... 

대합실 안은 저와 일본인 승객 아주머니 둘 뿐입니다. 조용하기만 합니다. 12시 45분에 역 근처에 도착하는 아소행 일주버스가 오려면 아직 한참은 더 기다려야 합니다. 잘 되었습니다. 바깥은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습니다. 풍로 앞에 앉아 두 손을 쬐입니다. 배낭 속에서 젠베이를 꺼내어 입안에서 오물거리며 먹다가 옆자리에 일본아줌마에게 하나 건네 봅니다. 수줍게 받으시네요. 역 오른편 구석에 구멍가게가 하나 있습니다.

  중년의 주인장 아저씨가 물건들을 정리하고 계시네요. 속으로 이 녀석은 여기에 저 놈은 저기에 하며 궁리하시는듯한 표정. 그런데 껌 한 통을 어디에 놓으실지 망설이고 있는 듯합니다. 멈칫멈칫 손동작이 허공에 떠있네요.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납니다. 겨우 껌 한통을 놓는 일에 저리 온 정성을 다하다니요! 참 한가한 사람이지 않나요? 잠시 정지된 체 흐르는 시간! 결국 아저씨는 한 통의 껌을 어딘가에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아저씨는 다시 평범한 구멍가게 촌부의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마도 그러기까지 매우 짧은 시간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갑자기 제겐 긴 시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저리 작은 일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다니! 일본인은 자기 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깊이 의식하는구나. 일본인은 생각보다 훨씬 호흡이 깊구나! 그 깊은 마음 속 공간에 들어가 있는 동안은 철저히 자기를 잊는구나!'         

그 때 였나 봅니다. 머리속에서 번쩍하고, 일본인의 저력이 뭔 지 알아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이 고요하고 오래된 작은 간이역과 저 그림의 액자처럼 앉아있는 철도원 그리고 구멍가게 아저씨를 통해 일본인들의 속깊은 마음의 정체를 엿본 거 같은 느낌. 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 머물면서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 사람들이지 않을까요? 그 바람에 저 역시도 이 간이역에 아주 편안하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놀라운 평화입니다.

 눈 나리는 바깥 공기를 맞으며 걷고 싶어졌습니다. 드르륵 미닫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느낌이 듭니다. 동네 안으로 들어가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습니다. 집집마다 눈에 띄게 깨끗하고 정갈한 모습들입니다. 다시 역 쪽으로 나오려는데 '夢의 湯'이란 간판이 보였어요. 온천탕인 듯합니다. 그런데 와아, 나무판에 'ぁっ湯'이란 글자와 족탕이란 뜻인 듯 발바닥이 새겨져 있는 작은 정자 아래 정사각형 모양의 욕조에 뜨건 온천물이 김이 모락모락 고여 있었습니다. 야홋~ 망설임 없이 양말을 벗어버리고 두 발을 담그니 너무 좋습니다. 눈이 나리고 주변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야외에 이렇듯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온천탕을 만들어놓을 생각을 하다니! 그저 신기할 뿐입니다. 눈밭 위를 맨발로 걷다가 온천물로 첨벙 들어가 물장난을 칩니다. 마을 사람들이 가끔 왔다가곤 했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는 것이 이상할 지경입니다. 확실히 딴 사람이 되어있습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는 제 자신이 그리 이뻐보이진 않지만 이런 객기를 부릴 수 있는 것이 해외여행의 매력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이제 아예 자리 잡고 앉아 잠시 눈을 감고 이대로 있자 했습니다. 눈발이 얼굴에 닿는 느낌이 듭니다. 새소리가 들립니다. 출출출 똑똑 어디선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립니다. 12시 정각을 알리는 땡땡땡 마을 종소리가 들립니다. 바람소리도 들립니다. 따뜻한 기운이 발목을 타고 올라옵니다. 가까이에서 평화로운 소리가 들립니다. 시간이 더디 가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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