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 1800만원 회사도 번번이 떨어져
 눈높이 낮췄는데 어디까지 낮춰야 하나"

'백수의 구직난'과 '중소기업의 구인난'... 악순환 왜 발생하나?

등록 2009.03.25 09:45수정 2009.04.02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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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정부·재계에서는 실업난과 관련,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지원하라"고 강조하지만, "눈높이 낮춘들 일자리가 없다"는 반발이 심하다. ⓒ 선대식


"지난 1년간 월 73만 원 받는 계약직 재활치료사로 일하다가 그만뒀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이었다. 눈높이를 낮췄지만 더는 생활이 불가능했다."

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만난 김형철(가명·25)씨의 말이다. 실업급여를 받으러 온 그는 "정부가 일자리 대책에 온 신경을 써야 하는데, 더 이상 낮출 수 없는 눈높이를 더 낮추라고 한다, 말이 안 된다"고 전했다.

최근 정부와 재계에서는 청년 구직자에게 "구인난을 겪는 중소기업이 많다, 눈높이를 낮춰 중소기업에 지원하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날 고용지원센터에서 만난 청년 구직자들은 "더 눈높이를 낮출 수 없을뿐더러, 일자리도 없다"고 반발했다.

구인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 쪽도 정부를 비판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청년들에게 적절한 임금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부가 경제를 살리든지, 중소기업에 많은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생활 안 되지만 연봉 1800만 원 회사에도 지원... 번번이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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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서울 청와대 인근에서 열린 '청년실업 해결 촉구 기자회견'에서 대학생들이 정부가 청년실업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삽질'만 하고 있다는 내용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유성호


구직자들이 중소기업을 회피하는 이유는 낮은 임금 수준·고용불안·비전 불투명 등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월 초 중소제조업체 305곳을 대상으로 인력 수급문제에 대해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 기업의 50.3%가 "구인난은 낮은 임금 수준 탓"이라고 밝혔다.

이어 "미래비전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20.7%), "고용불안 탓이다"(11.8%) 순으로 의견이 많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대학교 재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구직자들 역시 고용불안(42.0%)·낮은 임금(24.4%)·비전 불투명(17.0%) 등을 중소기업 회피 이유로 꼽았다.


하지만 같은 조사에서 응답자의 75.6%는 "취업이 어려울 경우, 중소기업에 취업하겠다"고 답해 극심한 취업난을 나타냈다. 서울 소재 명문대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어려운 지방대학·전문대 등에서는 이미 "중소기업에라도 취업하겠다"는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지난해 8월 경기도 소재 4년제 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송지훈(가명·26)씨는 "학벌을 제외하고는 '고스펙'이라고 자부한다"면서도 "연봉 2000만~2200만 원 수준의 중소기업을 100곳 넘게 지원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고 밝혔다.

울산 출신으로 현재 경기도 용인의 한 원룸에 살고 있는 그는 "연봉이 1800만 원인 곳도 지원해봤다"며 "이런 연봉에서는 월세와 생활비를 빼면 미래를 준비하는 건 꿈도 못 꾼다, 그런데도 실업자 신세 면하려고 지원했지만 떨어졌다"고 말했다.

올해 4년제 대학교 조리학과에 입학한 신나라(23)씨는 "지난해 1년 동안 일한 레스토랑이 망했다"며 "현재 비슷한 일자리라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알바가 아닌데도, 주 6일 하루 10시간 일하고 월 120만 원 받으며 일했다. 일을 배운다는 생각으로 친구들도 안 만나며 일했다. 실직 후 레스토랑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없다. 대부분은 동네 식당이나 술집이다. 눈높이를 더 낮출 수도 없고, 낮춘들 일자리가 없다."

지난해 1월 연봉이 1800만 원인, 휴대전화 기능을 테스트하는 한 회사에 입사한 민유진(가명·27)씨는 취업 1년만인 올해 1월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는 "회사가 어렵다며 신입사원을 모두 구조조정했다"며 "임금 수준보다 고용불안이 더 큰 문제"라고 전했다.

중소기업 "낮은 임금과 전망 불투명... 구직자 외면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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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서울 마포구 도화동 서울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서 구직자들이 한쪽 벽면에 붙은 구인공고를 살펴보고 있다. ⓒ 선대식


저임금에도 중소기업에서 일하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은 중소기업에서 구인난을 겪는 분야가 주로 생산직과 연구개발직이라는 점에서 엿볼 수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의 중소기업 인력 수급 관련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중소기업의 26.4%가 생산기능직이 가장 부족하다고 꼽았다. 이어 연구개발직(25.0%), 현장기술직(17.8%) 순으로 많았다. 이에 비해 영업마케팅직은 10.3%, 사무관리직은 2.1%에 불과했다.

생산기능직과 현장기술직 등 생산직 노동자는 저임금은 물론 열악한 근무환경에 시달리고 있다. 이준호 경기인쇄조합 상무이사는 "인쇄업계에는 잉크 냄새나는 오래된 영세 공장이 대부분"이라며 "생산직 초임이 보통 월 120만 원인데, 청년들이 최소 시급 4천 원인 서비스업 알바로 가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임금이나 근로환경뿐만 아니라 인쇄업은 비전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 기존 업체도 '어떻게 하면 손 떼고 나갈까'만 생각하고 있다, 이런 현장 분위기에서 구직자가 외면하는 건 당연하다"고 전했다.

인쇄회로기판(PCB)을 제조하는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업계 생산직 초봉이 1800만~2000만 원인데, 경력 있는 30~40대 위주로 뽑는다"며 "부양가족이 있는 이들이 이 돈으로 생활하는 게 어렵다는 걸 잘 아지만, 업계가 어렵고 대기업의 횡포 때문에 더 주고 싶어도 못 준다"고 말했다.

연구개발직의 인력 수급이 어려운 이유는 지원자는 많지만 실무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적기 때문이다. 한 소프트웨어 개발업체 인사 담당자는 "신입사원 연봉이 2000만 원인데도 지원자는 많다"면서도 "뽑으면 실무 투입 전 1년 훈련시켜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또 다른 중소 IT업체 관계자는 "뽑은 후 바로 활용할 수 있는 구직자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며 "학교가 실무적인 교육을 해야, 청년들의 구직난과 중소기업의 구인난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전했다.

고용 88% 책임지는 중소기업 놔두고, 정부는 대기업만 지원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중소기업 구직난과 청년 구인난을 해결하려면 "정부의 지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전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들의 인력 수급 어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대정부 건의 사항은 모두 22개에 달했다.

▲신규고용촉진장려금 지원수준 상향 조정 ▲중소기업 고용환경개선 지원금 확대 ▲중소기업근로자 복지혜택 확대 등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중소기업 홍보 강화 요구도 많았다. 한 IT기업 관리부장은 "국가·지방자치단체·학교가 적극적으로 우수한 중소기업을 홍보하고 구직자와 연결시켜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 등 경영환경이 취약한 중소기업에 대해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의지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준호 상무이사는 "우리나라 전체 고용의 88%가 중소기업"이라며 "정부는 최저가 입찰제를 제한하는 '중소기업제품 구매촉진법'조차 지키지 않으면서 대기업만 지원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중소기업 #눈높이 #미스매치 #구직자 #취업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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