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동적 애드립이 불러온 내 머리 위 쇠항아리

일본 큐슈로의 나홀로 기차여행 6

등록 2009.03.29 12:23수정 2009.04.06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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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쨋날 2

유후인역! 정말 아름답습니다. 꼭 권하고 싶은, 지금까지 제가 본 기차역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 야경이었어요. 함께 역에 도착한 어느 한국인분 말씀으론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을 설계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요. 기회 있으실 때 꼭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어둠이 완전히 깔린 시각인지라 숙소가 걱정이 되더군요. 유후인역 안내소에서 유후인 유스호스텔 가는 교통편을 물었습니다. 이미 버스는 6시에 끊겼고, 택시로 이동해야하는데 1시간이 족히 걸릴 테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거라 합니다. 하는 수없이 다른 숙소를 여쭤봅니다. 유후인 숙소 전용 지도를 펴놓고 몇 군데 전화를 직접 하시네요. 얼마나 고마운지요. 유후인은 소문대로 숙박비가 다른 곳에 비해 비싼 편이었습니다. 겨우 德水莊(Tokunaga so)의 직원과 직접 전화 통화 할 수 있도록 연결해주시더군요.

"하루밤에 3600엔이고요. 샤워는 하실 수 없고 공동화장실에 음식제공 없습니다."

이 조건도 그나마 다행인 거였어요. 감사의 인사말을 건네고 역 밖으로 나왔습니다. 7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거리는 벌써 한밤중입니다. 거리엔 지나는 사람도 없고 길가에 하다못해 가로등 하나 없습니다. 가게들은 벌써 대부분 영업을 끝냈는지 셔터문을 굳게 닫은 체 모두들 어둠 너머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막막하고 약간 겁나는 상황이었지만 지도를 손에 꼭 틀어쥐고 길을 걸었습니다.

'이 즈음에서 다리가 나와야하는데....' 겨우 다리를 지납니다.

'이제 이 금방일터인데...덕수는 왜 안보이는 거야. 덕수야! 덕수야!!'


벌써 같은 곳을 왔다갔다한 지 꽤 되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오~ 저기 멀리서 불빛이 하나 반짝입니다.

'요리집 같기도 하고 술집인가? 들어가서 물어보자..'


드르륵 들어가니 한 남자와 담배 피우는 요염한 자태의 여자가 애완용 강아지 한 마리를 품에 안고 저를 돌아봅니다. 남자분이 지도를 한참 보시더니,

"이 쪽 길이 아닙니다. 다리를 건너지 마시고....중얼중얼...쭝얼쭝얼..."

좀 어색한 영어와 저로서는 귀머거리인 일본어를 섞어서 말씀하시는지라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눈치로 분명히 알수있는 것은 이 길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더욱 분명한 것은 제게 덕수장을 찾아갈 자신이 없다는 것과 저렇게 짙게 깔린 어둠속을 헤치고 다시 길바닥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어요. 갑자기 무대뽀로 들이대고 싶어졌습니다.

"저기요. 죄송한데요. 제가요. 어디든 괜찮으니까요. 오늘 하룻밤 잠 잘 곳이 있었으면 해요. 그냥 방이 아니더라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안될까요?"

이런 갑작스런 충동적 에드립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을까요? 여행이 주는 마력 같은 용기! 하지만 이런 제 자신을 해석하는 것은 지금은 사양입니다. 남자분이 잠시 생각하시더니, 저를 데리고 주차장 쪽으로 안내하시는 거예요.

"이 차는 제 차이니.. 이 곳도 괜찮겠습니까? 내일 아침 7시쯤에 오죠. 여기 담요는..."

하시면서 차 시트를 펴서 툭툭 털며 자리를 만들어 보여줍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리가또"를 연발하며 이게 왠 친절일까를 의야해 했습니다. 그리곤, 얼떨결에 차 안에 누웠고, 이 남자분은 차 안을 휙 둘러보는 것 같더니 바깥에서 리모콘을 찍하고 눌러 딸깍 차를 잠구곤 사라졌습니다. 잠깐 한번 뒤돌아보곤. 그 때였나봅니다. '딸깔'하는 기계음이 엄청 크게 제 귀에 남겨져있더군요. '딸깔'하는 소리는 마치 지금까지 제가 살아왔던 어떤 익숙한 세계로부터.... 갑자기 되돌아갈 수없는 선이 그어진 듯한, 아니, 셔터문이 내려진 듯...격리당한 느낌으로.

애써 태연한 척,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담요를 덮고 차 천정을 바라봅니다. 몸을 옴싹 달싹 하기도 어려웠어요. 그리곤 눈을 감았는데요...잠을 청하려 애썼어요. 그런데, 웬걸요. 잠은 고사하고 정신이 점점 더 말똥말똥해지더니,

"아이구 머니..여기서 자면 안돼! 내가 지금 제 정신이야..이게 뭐하는 짓이야...이러구 밤샐 거야? 정말 겁도 없네...내가 지금 갇힌 거 같은데? 불안에 떨며 밤새 괴로울 텐데...이건 악몽이야! 악몽!"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어쩌지? 안돼!!!"

벌떡 일어나, 차창문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습니다. 멀리 술집인가 요리집인가의 창문이 보이고 종업원 둘이 일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 사람들이 희망...인가?'

마구 팔을 흔들었댔죠. 그리곤, 저 창문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져 제 모습이 저들에게 보였으면하고 절망적으로 기도했어요. '자비를 베푸소서!'

와아~ 기도가 염력을 일으켰나봅니다. 제가 계속해서 팔을 마구 흔들어대는 모습을 보았는지 종업원 한 사람의 동작이 갑자기 멈춘 거 같았어요. 이때다 싶어서 더욱 세차게 손을 흔들어댔습니다. 두 명의 종업원이 문밖으로 나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이구...하느님 감사합니다!'

두 젊은이들은 놀란 눈으로 차 안을 들여다보며....

"뭐해요? 거기서? 무슨 일이예요?"

전, 차창을 두들겨대면서...

"저 갇혔어요!  빨리 오픈 더 도어 플리즈...!!!"

"....그냥 안에서 고리를 올리고 문을 여세요!"

  '앵!' 이런 쉬운 방법이!' 

문이 벌컥 열리는 거예요. 그때서야 저는 사태를 파악했습니다.

"하하 그렇군요...(정말이지 쑥스럽더군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아리가또 고자이 마스!"  

두 젊은이는 정신을 못 차리고 껄껄 웃으며 고개를 흔들어대고 괜찮냐고 몇번 묻더니만 저 만치 사라집니다. 저도 도무지 뭐가 뭔지 무슨 귀신에 씌운 것 같지 뭐예요.

'사람이... 이런 존재란 말인가? 아니, 나란 사람은...결국,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내 맘 속의 두려움이란 허깨비가 나를 이렇게 만든거잖아.....스스로 올가미를 만드는 구나..혼자 완전한 시나리오를 짜서...정말...이렇게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나는 내 머리위에 쇠항아리를 스스로 짊어지고 살아왔던 거로구나....참 어이없는 일이야........'

아무튼 무사히 차 밖으로 탈출?하자 차 주인을 찾아야겠단 생각으로 다시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 그분께 말씀드렸어요.

"덕수장을 찾아가야겠어요. 아무튼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분도 약간 당황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저로서는 어쩌는 수가 없었지 뭐예요. 솔직히 그분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혼자 생 쇼를 한바탕 치루고 나니 희한하게도 피곤기가 확 사라지고, 저 어둠도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더라구요. 씩씩하게 걸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분 후에 덕수장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샤워는 못했지만, 샤워완 도저히 비교할 수없는 커다란 행복을 즐기게 되었어요. 커다란 창문으로 밤하늘이 훤히 내다보이는 반 야외 천연 온천탕에 발을 담구고 밤 늦은 시간 혼자 이국에서의 정취를 맘껏 즐길 수 있었으니까요. 밤하늘에는 싸리눈이 하얗게 내리고 있었어요. 
#일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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