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인권위원회를 축소하려는 정부 방침에 대해 보수성향의 변호사단체인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과 진보성향의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의 의견차가 극명하게 엇갈렸다.
행정안전부가 국가인권위원회 정원을 21% 줄이는 등 조직을 축소하려는 것에 대해 인권위가 불복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과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제출하자 '시민과 함께하는 변호사들'(공동대표 이헌, 정주교)이 인권위를 맹비난했다.
반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회장 백승헌)은 "정부가 당장 인권위의 존재가 불편하다고 이를 억누르려는 것은 목전에 닥친 정권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단견적인 태도"라며 인권위 축소 방침을 철회하라고 촉구해 대조를 이뤘다.
먼저 시변은 31일 논평을 통해 "그간 우리나라 인권상황이나 촛불정국에 대해 편향적인 시각을 드러낸 몇몇 국제 인권단체나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국제사회의 우려는 이번 인권위의 조직 축소가 업무상 독립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오해한 데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그동안 인권위는 진보좌파 성향의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로 구성돼 오랜 기간 북한 인권에 대해 침묵하고,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성명을 내고, 촛불집회에 대해 경찰의 과잉진압이라는 결론을 냈으며, 최근 전여옥 의원을 국회에서 폭행해 구속된 민가협 인사를 포함한 진보좌파 성향의 인사들을 대한민국 인권상 대상자로 추천했다"며 "인권위가 보여준 좌파 성향적 이념성과 불공정성은 그야말로 국민들이 인내할 수 있는 한도를 넘는 수준"이라고 맹비난했다.
또 인권위가 2006년 국가보안법 폐지, 양심적 병역거부, 공무원과 교사의 정치활동 확대, 집회와 시위의 규제 철폐, 비정규직 고용 억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확정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권고안도 문제 삼았다.
시변은 "인권위의 권고안에 대해 '현실성 없고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과 어긋나는 월권행위', '법치주의와 헌정질서에 도전하는 조치'라는 거센 비판이 제기됐다"며 "당시 인권위는 '인권위의 판단기준은 인권이므로 헌법의 부합 여부를 판단기준으로 하는 헌법재판소 판단과 다를 수 있다'고 강변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법률상 국가기관에 불과한 인권위가 동일한 인권문제에 관해 헌법상 최고사법기관의 판단과 다른 판단을 할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인권위의 주장은 헌법을 벗어나 기본권을 아무런 제한 없이 보장되어야 한다거나, 기본권에 대한 법적 제한을 무조건 인권침해라고 극구 우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무시하며 헌법 위에 군림하던 모습이었던 인권위가 갑자기 몸을 낮추어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청구나 가처분 신청을 제출하는 것도 정상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곤란하다"고 비판했다.
시변은 또 "인권위가 사회적 약자, 소수자 인권보호라는 미명하에 행정안전부의 조직 축소를 포함해 현 정부정책에 저항 내지 불복종하거나,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등 우리 헌정질서를 도전 내지 도외시하려고 한다면, 조직 축소가 아니라 폐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납득할 만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끝으로 "인권위가 보여준 그간의 반헌법적·반법치적 행태를 포함해 이번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하는 데에 대해 오히려 국민들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고 반문하며 인권위를 몰아세웠다.
민변 "인권위 억누르는 건 정권 편의만 생각한 단견"
앞서 지난 25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회장 백승헌)은 "행정안전부 방침은 인권적 관점은 물론 법적, 절차적으로도 설득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어 반대한다"며 '인권위 조직 축소 방침 철회를 요구한다'는 성명을 냈다.
민변은 "인권위가 국가기관의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하기 때문에 입법·행정·사법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는 독립성을 강하게 보장한 것"이라며 "설령 인권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타 기관이 법을 무시하고 인권위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것은 위법성을 면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또 "행정안전부가 일관된 원칙도 없이 정부의 입김에 따라 입장을 바꾼 모습을 보인 것은 정부의 신뢰에도 크게 해를 끼치는 일"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행정안전부는 작년 장애인차별금지법 시행에 따른 인력 증원 필요성을 인정한 바 있고, 7월에는 인권위의 업무가 크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본부 인력 축소를 반대하고 지역사무소 신규 개설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감사원에 밝힌 바 있다.
민변은 "행정안전부는 돌연 입장을 바꾸면서도 설득력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법무부나 국민권익위원회 등과 업무가 중복된다는 주장은 인권위 업무의 성격과 이들 업무가 다르다는 점에서 거론할 필요도 없는 논리"라고 반박했다.
특히 "우리 사회가 개인의 인권을 충실하게 보장하고 더 성숙한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는 세심한 그물망이 필요한 점에서 인권위가 지난 8년간 쌓아온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며 "인권위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 억눌린 자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왔고,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소연할 곳으로 인권위를 기대하게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정부는 눈앞의 정치적 판단을 넘어 우리 사회의 인권 그물망을 짤 수 있는 장기적인 인권 정책을 고민해야 하며, 인권위도 그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며 "진보 보수를 망라한 압도적 다수의 국내외 전문가, 단체가 행정안전부 방침을 앞다투어 반대하고 있는 현실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변은 "인권위는 국가인권기구의 한 모델로 꾸준히 성장해 큰변동이 없다면 2010년 전 세계 국가인권기구 모임인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국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며 "이미 진행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해 유엔인권최고대표가 두 번씩 반대 서한을 보내는 등 국제사회의 반대가 적지 않다. 정부가 당장 인권위의 존재가 불편하다고 이를 억누르려는 것은 목전에 닥친 정권의 편의만을 생각하는 단견적인 태도"라고 질타했다.
인권위 "헌재 최종판단, 국제사회 귀중한 교훈 될 것"
한편, 30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심판청구와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낸 인권위는 "헌법재판소의 최종 판단이 우리 사회의 법치 관행을 공고히 하고, 한국 국가인권위를 국제적 모델로 여기는 국제사회의 귀중한 교훈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한쟁의심판청구의 요지는 행정안전부가 독립기구인 인권위의 업무 권한을 침해한 점 등이며,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의 요지는 권한쟁의심판청구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선고 결정이 나올 때까지 직제 개편안의 효력을 정지해 달라는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가처분신청과 권한쟁의심판청구 절차에는 대한변호사협회장을 지낸 박재승,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을 지낸 최병모, 김덕현, 김필승, 허진영, 정연순 변호사 등이 대리인으로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