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조의 여왕>, <꽃보다 남자>와 닮았다

[남자가 본 <내조의 여왕>] 21세기에 '신 현모양처'라니...

등록 2009.04.06 14:52수정 2009.04.06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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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 제작발표회. ⓒ iMBC


옛말에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이 있다. 뒤웅박이라는 건 둘로 쪼개지 않고 꼭지만 떼어내고 속을 파낸 바가지를 말하는데, 이 바가지 속에 부잣집에선 쌀을 채우고, 가난한 집에선 소여물을 채웠다. 뒤웅박을 쌀로 채우느냐, 소여물로 채우느냐, 그것을 채우는 건 여자가 하는 일이지만 그 안에 뭐가 들어갈지 결정하는 건 남자, 즉 남편의 몫이다. 그래서 '여자 팔자 뒤웅박 팔자'라는 말은 가장의 능력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아내의 인생이 좌지우지되고 결정된다는 뜻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고 법조계 등지에선 '여풍(女風)'이라는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우먼파워가 상당한 21세기에, 웬 전근대적이고 성차별적인 말이냐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기획의도로 삼아 만든 드라마가 있다. 제목부터 티를 팍팍 낸다. <내조의 여왕>. 남편을 잘 내조해서 성공시키려는 아내의 노력, 아니 단순한 노력이 아닌 '투혼'의 경지에 이른 아내의 내조 덕에 남편이 성공한다는 내용의 드라마다.

'하대리댁', '양과장네'... 남편 직급이 아내 직급?

천지애(김남주 분)는 학창 시절 빼어난 미모로 뭇사람들에게 추앙받으며 공주처럼 살았다. 그녀의 미모에 친구들은 뒤에선 질투했지만 앞에선 그녀를 미팅에 데려가기 위해 갖은 아양을 다 떨었고, 남자들은 그녀만 보면 정신을 못 차렸다. 몸종처럼 졸졸 따라다니는 양봉순(이혜영 분)은 그녀 말이라면 죽는 시늉까지 했다. 빼어난 미모와는 달리 공부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지만 그런 것쯤은 아무 문제가 안 됐다. 유능한 남자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우아한 꽃처럼 가만히 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그렇게 그녀가 선택한 한 마리 벌이 바로 온달수(오지호 분)였다. 서울대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달수와 결혼한 지애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아니,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결혼 생활은 썩 평탄치 못했다. 달수는 머리가 좋아 공부는 잘했지만 사회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우유부단하기 이를 데 없고, 눈치 없이 바른 말 하기만 좋아했다. 상사에게 아부도 못하고, 오히려 상사의 잘못된 점을 공개적으로 꼬집는다. 그러다 회사에서 잘리고 백수가 된 지 1년째, 달수는 놀기에 여념 없고 지애만 애가 탄다.

어렵사리 지인의 추천으로 업계 최고의 대우를 해준다는 퀸즈푸드 경력사원 채용에 도전한 달수. 지애는 여기에서 떨어지면 끝이라는 심정으로 달수의 지원사격에 나선다. 퀸즈푸드는 사원 아내들의 입김이 유난히 세다는 친구의 조언에 따라 지애는 우연을 가장해서 퀸즈푸드 이사 부인이자 사원 부인들의 친목모임인 '평강회' 회장인 오영숙(나영희 분)에게 접근해 환심을 사려 노력한다. 그녀의 퍼스널 쇼퍼를 자청해서 쇼핑을 도와주는가 하면, 시부모상을 당했다는 말에 그 길로 상갓집에 달려가 일손을 거든다.

사원들이 모여 사는 퀸즈팰리스라는 거대 주거단지 내에서 사원 아내의 지위는 남편의 직급과 직결된다. 대리 아내는 대리, 과장 아내는 과장, 이사 사모님은 이사가 되는 것이다. 그녀들은 이름도 없다. '하대리댁', '양과장네', 이렇게 남편의 직급으로 아내들은 지칭된다. 상하 간 계급차가 뚜렷하다. 이사 사모님은 과장 아내를 부리고, 다시 과장 아내는 대리 아내를 부린다. 아무런 거리낌이나 반감도 없이, 그녀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고 남편의 영달을 위해 더 높은 직급의 아내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


"남편이 별이지, 지들이 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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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에선 남편의 직급이 곧 아내의 직급이다. ⓒ iMBC


극적 재미를 위해 드라마에서 너무 과장되게 그리는 게 아니냐는 핀잔도 들을 법하다. 요즘 누가 저렇게까지 하나, 내조도 좋지만 극중에서 아내들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의외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목격할 수 있다. 모임의 성격에 따라, 조직 구성원의 면면에 따라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들은 타인에 의해 자신의 처지가 결정되곤 한다. 학부모들의 모임에서는 공부 잘하는 자녀를 둔 엄마, 학급 반장하는 자녀를 둔 엄마의 고개가 빳빳하듯 말이다.


남자들의 경우 군대에서 이런 장면을 목격하고 경험할 수 있다. 부대 창설일이나 국군의 날 같이 부대 내에서 행사가 있는 날이면 간부의 아내들은 총출동한다. 그곳에서 간부의 아내들은 남편의 직급 그대로 대우를 받는다. 연대장 사모님은 연대장, 대대장 사모님은 대대장, 중대장 사모님은 중대장이 된다. 사병들은 간부의 아내들 앞에서도 군기가 잘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워야 한다. 편하게 하란다고 군기가 풀어지면 안 된다. 왜? 간부의 아내도 간부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간부 아내들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철저하다. 중대장 사모님은 대대장 사모님의 말을 듣고, 다시 대대장 사모님은 연대장 사모님의 지시를 받는다. 음식이라도 할라치면 일사분란하게 척척 움직인다. 그 모습이 '군인'과 다를 바 없다. 뿐인가? 간부의 자녀들도 간부다. 예비역 친구들과 술이라도 한 잔 하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군대 이야기, 그 중에서도 운전병이나 관사병을 했던 친구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때론 눈물 없인 들을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관사병을 하면서 빨래나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학벌 좋은 친구들은 간부 자녀에게 과외를 해주기도 한다. 공적인 업무 외에 사적으로 나가는 자리에까지 일일이 운전을 하고, 심지어 자녀들 통학까지 시켜줘야 했다는 운전병 출신 친구들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간부 아내도 간부, 간부 자녀도 간부라는 말이 새삼 실감 나곤 한다. 간부 아내에게 때때로 폭언을 듣고 간부 자녀는 자신을 하인이나 몸종처럼 부리곤 했다는 친구들은 술기운이 오르면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남편이 별이지, 지들이 별인가?"

신 현모양처의 내조, 사랑받을 수 있을까

<내조의 여왕>은 여성들이 주인공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는 여성들의 모습을 그렸다. 그런데 그 생존의 무대는 회사가 아니라 누구네 집 거실이고, 백화점이며, 헬스클럽이다. 피 터지게 노력해서 스스로 무언가를 쟁취하는 게 아니라 그 노력을 발판으로 남편이 딛고 일어서길 바란다. 남편의 성공이 곧 자신의 성공이요, 남편의 직급이 곧 자신의 직급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조의 여왕>은 <강남엄마 따라잡기>를 많이 닮았다. 대상이 남편이냐 자녀냐 그 차이일 뿐, 두 드라마 속에서 여성들은 그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노력한다.

<내조의 여왕>은 또 <꽃보다 남자>와도 많이 닮았다. <꽃보다 남자>에서 금잔디는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가 된다. 무능력한 남편을 위해 이 악물고 노력하는 지애, 그런 그녀의 곁에 멋지게 성공한 옛사랑 한준혁(최철호 분)과 잘생기고 젊은 CEO 허태준(윤상혁 분)이 다가온다. 공략하는 주 시청자 층의 연령대가 다를 뿐, 이 두 드라마에는 모두 '판타지'와 '로망스'가 담겨져 있다. 내조와 불륜, 극단에 선 이 두 소재를 코믹하게 버무려 낸 <내조의 여왕>, 21세기에 그려지는 신(新) 현모양처의 내조는 시청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남편 잘 만나 팔자 고친다는 기성세대의 말에 신세대는 '된장녀'라는 딱지를 붙이며 다분히 수치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남편 잘 만나 팔자 고친다는 기성세대의 말에 신세대는 '된장녀'라는 딱지를 붙이며 다분히 수치스럽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내조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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