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선생 영정
자료사진
서원내 위패봉안 위치를 놓고 지난 400여년간 서애(西厓) 류성룡과 학봉(鶴峯) 김성일 문중 간에 이어온 반목과 대립이 마침내 그 마침표를 찍었다.
서애 선생의 병산서원과 학봉 선생의 호계서원의 첫 글자를 딴 '병호시비(屛虎是非)'란 이름이 붙은 이 시비는 지난 달 말경 호계서원 사당복원사업 신청을 계기로 양 문중이 퇴계 선생의 위패를 중심으로 왼편에 서애 선생을, 오른편에 학봉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기로 합의하면서 400년의 긴 논란을 마무리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말, 양 문중 류영하 종손과 김종길 종손은 전격 회동을 통해 복원될 이 같은 호계서원의 위패봉안 위치를 합의해 낸 것으로 전해졌다. 호계서원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안동시 임하면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선조 6년(1573)에 건립되어 처음에는 여강서원이라 하였으나 숙종이 1676년에 현판을 하사하여 호계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호계서원 중건추진위원회는 최근 호계서원을 복원하기로 하고 사당, 동제, 서제, 누각, 사주문 등 건립비용 12억 8천만원을 안동시에 신청했으며, 안동시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 한 후 7월경에 경상북도에 사업승인 신청을 한다고 한다. 오는 10월경 도비보조사업으로 확정되면 분권교부세 등을 확보해 문화재복원 사업지침에 따라 서원을 다시 짓는다는 구상으로 보인다.
'좌배향' 시비에서 시작해 상소문, 통문의 이름 순서까지 대립영남 3대 시비중의 하나인 병호시비는 최근까지도 안동지역에서는 뜨거운 감자로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병호시비는 조선 중기인 1575년 영남 유림이 퇴계선생의 학덕을 기려 건립한 호계서원의 좌배향(퇴계의 왼편에 봉안함)을 두고 유림들 간에 봉안서열 논쟁이 벌어진 것이 그 시발이다.
다시 말해 퇴계의 수제자인 서애와 학봉을 두고 누가 더 어른인가, 그에 따라 상위인 왼편에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의 문제였다. 서애 문중은 서애의 관직이 영의정으로 경상관찰사였던 학봉보다 그 서열이 높다고 주장한 반면, 학봉의 문중은 동방예의지국에서 나이가 4살이나 위인 학봉이 서열이 높다는 주장으로 맞섰다.
실제 당시 영남유림의 판세는 학봉이 우세했던 만큼 서애 문중에서도 관직의 높음 만으로 뜻을 관철시키기가 쉽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이는 병호시비의 장기화와도 일정부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보다 더 큰 원인으로 안동지역의 오랜 유교정서와 고집스런 학풍을 꼽는 이가 일반적이다.
3차에 걸친 시비까지 간 병호시비의 첫 결과는 서애의 판정승이었다. 당시 시비를 가리는 역을 맡았던 영남학파의 최고 어른 격인 정경세(1563~1633)가 서애를 왼편에 모시라고 판결하면서 1차시비는 끝을 맺었다.
서애문중과 문하, 급기야 학봉의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병산서원으로 2차시비는 오랜 세월이 지난 1805년 청원소장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다시 불거지게 된다. 당시 영남유림이 서울문묘에 두 선생을 비롯해 한강 정구(1543~1620) 선생, 여헌 장현광(1554~1637) 선생의 종사 청원소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누구의 이름을 먼저 쓰느냐를 두고 자손들 간에 분쟁이 붙었고, 결국 장유유서에 따라 학봉, 서애, 한강, 여헌 순으로 쓰기로 하였으나, 서애 문중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다시 상소를 올리면서 두 상소 모두 기각되어버린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바로 병호시비의 2차전이었다.
결국 서애와 학봉 문중의 알력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문묘종사에 화가 난 한강, 여헌 문중이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안동의 서애, 학봉 문중에 '통문'을 띄워 규탄하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전주류씨 류회문이 작성한 이 통문에서 다시 학봉, 서애의 순으로 언급을 하는 바람에 3차시비로 연결되고 만다. 이에 서애 문중과 문하들은 학봉의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병산서원으로 그 회동 장소마저 옮겨 극심한 반목의 세월을 걷게 된다.
400년에 걸친 이 시비는 결국 단순한 의성 김씨와 풍산 류씨의 문중간 대립을 넘어 두 학자의 문하의 대립 나아가 안동유림 전체의 시비로 번져 오늘에 이르러 왔다. 이제 그 긴 시비의 종지부가 찍혔다. 고집스럽기만 한 안동 사람들의 성품이 병호시비의 종결과 함께 좀 더 온화하고 남을 먼저 배려하는 성품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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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왼쪽에 모실까?' 400년 이어온 논쟁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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