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서재에 책을 꼽아 둘 곳이 보이지 않는 요즘에는 책을 고르는 눈이 점점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검증'된 책을 고르다 보니 '고전'을 자주 읽게 되는 요즘이라, 이 책을, 제가 가장 신뢰하는 인터넷 서평꾼 중의 한 사람의 소개 글을 읽고도 조금 뜨악하게 생각했더랬지요.
단순히 한 출판인의 '국회의원 자서전'스러운 수필집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하다보니 별 기대 없이 주문을 하게 되었고(아무래도 까칠하기가 이럴 때 없는 그 서평 꾼의 블로그에 그 책이 소개되었다는 자체가 계속 뇌리 속에 남아 있었나 봅니다) 이 책을 실제로 받아 본 순간 이 책에 대한 호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일단 책표지 디자인이 너무 예뻤고 또 두께가 무려 844페이지인 것에 반했거든요.
긴 머리는 미남을 더욱 잘 생겨 보이게 만들고, 보다 두꺼운 책은 디자인이 예쁜 책을 더욱 멋지게 만들어 주는 법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좋은 책은 '또 다른 독서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책입니다. 즉 그 책을 읽고 나면 또 다른 책을 읽게 만들어 주는 책이지요. 이 책을 펼쳐보니 이 책을 쓰게 된 동기가 또한 압권이었습니다. 앤디 워홀의 <일기>의 번역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였군요. 참 궁금했습니다. 앤디 워홀이란 인물도 참 흥미진진하지만 그 사람이 쓴 <일기>라!! 일단 앤디 워홀의 <일기>의 원서(이 책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습니다)를 해외서점의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급기야 책보다는 인터넷을 이용하는 시간이 더 많게 된 저를 인터넷을 멀리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인터넷의 현란한 그래픽과 속도는 사실 독서라는 것은 약간의
'작정'이 필요한 요즘 인터넷을 잊게 만든 책이라는 것은 요즘 시대에 최고의 찬사가 아닐까 싶네요.
그것도 판타지가 아닌 출판사 대표가 쓴 출판과 인생 그리고 건축이야기를 쓴 책이라는 점이 더욱 그러합니다. 이 책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독자입장에서 늘 은둔과 장막 속에 가려진 출판계 내부 속사정을 소상히 (그것도 인간적인 고뇌까지 숨김없이)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출판사나 출판업자는 독자의 입장에서 '그들'이었지 우리에게 친숙한 존재가 아니었는데 '그들'의 눈으로 책과 독서 시장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인 경험이 아닐 수 없지요.
한 출판사에 의해서 무명작가가 어떻게 발굴되고 키워지고 지켜지는지, 책의 디자인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확정되는지, 그들이 해적출판물에 어떻게 대처하는지, 급기야 책 한권을 만드는 원가가 얼마인지?를 아는 것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은 모두 궁금해 했을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출판업자의 눈으로 본 '책'들의 이야기가 가득히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자신의 열렬한 독서가이기도 한 저자가 같은 독서가에게 소개해주는 많은 책들도 있습니다. 앤디 워홀의 <일기>뿐만 아니라 '세계 5대 자서전'이란 카테고리가 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았습니다.
요즘처럼 '불확실하고 상업성만 추구한' 출판물이 홍수처럼 많은 시대에 이 책의 가치는 이만 저만 높은 게 아닙니다. 앤디 워홀의 <일기>를 본받아서 쓴 출판인의 일기는 단지 개인적인 사소한 일뿐만 아니라 출판계 전부를 아우르는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업무에 쫓겨서 자녀의 대학입학등록기간을 놓친 후 인간적인 고뇌에 빠지는 저자의 면모도 놓칠 수 없는 매력중의 하나이지만요.
책에 대한 책을 좋아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도 이 책은 보물섬과도 같은 책입니다.
가령 이 책 속에는 <다음은 직원들이 사온 책들과 구매의 변>이란 소제목과 함께 일본 문화 탐방 때 구매한 72권의 책의 목록과 제목처럼 구매 이유가 빼곡히 적혀있으니까요.
단지 한 출판사 사장의 일기가 인터넷을 멀리하게 하고, 한동안 난독증에 시달리는 희한한 경험을 하게 만들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이 책을 필자에게 소개한 인터넷 서평꾼의 말따나 '통의동'이 아닌 '에덴빌라' 시절의 '열린책들'의 비화와 오랫동안 독자들의 화두였던 '도끼전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읽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지만 탄탄하고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저자의 글 솜씨도 고스란히 녹아 있은 이 책을 읽으면서 다 읽기가 아까워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헤아려 가면서 읽은 몇 안 되는 책이었습니다.
2009.04.02 17:25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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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의동에서 책을 짓다
홍지웅 지음,
열린책들,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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