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에 왔기에 만나는 책

[헌책방 나들이 194]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등록 2009.04.05 18:26수정 2009.04.05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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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방마실이란

 

 도서관에 나들이를 온 손님 둘과 헌책방 나들이를 함께해 봅니다. 서울과 인천은 가깝다지만, 인천사람은 서울에 자주 오가기는 하는데 서울사람이 인천으로 오가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이번에 거의 처음으로 인천에 와 보았다는 후배들한테 '애써 인천까지 와 준' 김에 '인천에 있는 헌책방'을 느껴 보도록 해 주고 싶어, 저녁나절 도서관 문을 조금 일찍 닫고서는 배다리 헌책방골목 헌책방을 한 집 두 집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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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곡한 책꽂이와, 나즈막한 걸상. ⓒ 최종규

빼곡한 책꽂이와, 나즈막한 걸상. ⓒ 최종규

 

 〈삼성서림〉은 〈삼성서림〉대로 다르고, 〈한미서점〉은 〈한미서점〉대로 다르며, 〈아벨서점〉은 또 〈아벨서점〉대로 다른 구석을 이야기하면서 책꽂이와 책시렁을 보여줍니다. 다루는 갈래가 다르고, 책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다르며, 책방을 찾아오는 사람 또한 다름을 이야기합니다.

 

 어느 헌책방이 더 낫거나 어느 헌책방에 책이 더 많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어느 헌책방에 들어가 보게 되든, 그곳에서 우리 눈길을 사로잡는 책을 만날 수 있으면 됩니다. 어느 헌책방에서 어느 책을 골라들어 펼치게 되든, 우리 마음밭을 일구면서 차츰차츰 새로워지는 내 눈길과 손길을 깨달을 수 있으면 됩니다.

 

 서울에서 살 때에는 서울 골목마다 조용히 깃들어 있는 크고작은 헌책방을 즐기고, 이렇게 모처럼 인천에 와 주었을 때에는 인천 배다리에 있는 헌책방과 부개역 앞에 자리한 헌책방에 살며시 발걸음을 옮기면서 책맛과 책멋을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책은 한꺼번에 잔뜩 사들인 다음 집에 쟁여 놓고 하나씩 맛보아도 되고, 한 번 나들이에 한두 권만 장만한 다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책방마실을 해 보아도 됩니다.

 

 책을 더 많이 사들였다고 하여 더 큰 기쁨을 누렸다고 하기 힘들며, 책을 한 권도 못 고르게 되었다 하여 아무런 기쁨을 못 누렸다고 하고 힘듭니다. 언제나 어떻게든 기쁨을 누리는 우리들입니다. 더 많은 책과 더 많은 지식으로만 우리가 기쁠 수는 없는 법이며, 한 권조차 없는 책과 하나도 얻지 못한 지식이었다 할지라도 우리가 기쁠 수 있는 법입니다.

 

 "책이 전원 쪽으로 들어가야 할까? 자꾸 밀려나잖아. 그리고 사람들 생각도 '거기 낙후되었잖아요? 이래야 하지 않아요?' 하는데. 새것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 모르겠어. 내가 보기에는 우리 동네 집들이 앞으로 이삼십 년 있어도 괜찮겠는데."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인천에도 헌책방에도 거의 처음으로 와 본 젊은 벗'한테 당신 삶자락을 풀어냅니다. "그리고, 편리하게 사는 것만이 사람 사는 것처럼 생태계를 그렇게 몰아간다고." 옆에서 이야기를 함께 듣다가 싱긋 웃음이 납니다. 우리 젊은 벗님들이 이 이야기를 얼마나 살갗으로 삭이고 받아들일까 궁금하지만, 그냥 흘려듣게 되었다 하더라도 이런 말씀 하나 만난 적이 있음을 떠올릴 수 있으면 흐뭇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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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시렁 한켠. ⓒ 최종규

책시렁 한켠. ⓒ 최종규

 

 (2) 지나온 삶자락을 읽는 책

 

 두 손님은 사진책 꽂힌 자리에서 책을 둘러보시라 해 놓고, 저는 살짝 빠져나와 골마루를 슥 누빕니다. 잠깐이라 하여도 며칠 사이 새로 들어와 꽂힌 책을 둘러보고 싶습니다. 고를 만한 책이 눈에 뜨이지 않으면 하는 수 없지만, 고를 만한 책이 구석구석 보이면 다문 한 권이라도 기쁘리라 생각하는 가운데, 《엔도우 슈사뀨/유종미 옮김-내가 믿는 하나님》(샘,1986)이라는 작은 책이 눈에 뜨입니다. 오호, 이런 책도 우리말로 옮겨진 적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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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님 책. ⓒ 최종규

엔도 슈사쿠 님 책. ⓒ 최종규

.. 내 무의식은 어떻게 해서 생겼는가 하면, 소년 시절 내가 단지 타성으로 세례를 받았을 때부터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어머니가 교회에 가는 모습이나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무의식 속에 있는 신앙은 내 주변에 있던 어른들의 그러한 기도하는 모습, 크리스마스 때에 즐겁게 지낸 일, 그리고 병에 걸렸을 때, 고통받을 때 신을 의지하고 열심히 기도했던 소년 시절,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긴 생활 속에 몇 번이고 말씀드렸듯이, 내 등 뒤에서 신을 느끼며 누군가 만일의 유사시에 등을 밀어 주는 x가 나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해 가고 있다는 느낌, 그러한 것이 공부로 얻은 지식이나 관념에서 얻은 종교 이해와 더불어 내 속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46쪽)

 

 예전에는 따로 찾아서 읽지 않았으나, 책마을 선배가 옮긴 《유모아 극장》을 읽은 다음부터 엔도 슈사쿠 님 책을 하나둘 찾게 되었습니다. 《침묵》이 가장 널리 알려지고 읽혔는데, 이분 책은 꽤 많이 우리 말로 옮겨져 있더군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엔도 슈사쿠 님 종교 이야기를 살피는 책인 한편, "인간 내부의 깨끗한 것만을 쓰면 좋다는 것으로는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더러운 곳까지도 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47쪽)" 하는 이야기처럼, 문학이나 당신 삶을 가만히 돌아보는 책입니다. 이렇게 문학 이야기를 하다가 뒤이어 종교 이야기로 이어지는데, 언뜻 보면 말장난이라 할 테지만, 깊이 생각하고 거듭 돌아보면 당신이 오래도록 살아내면서 몸으로 받아들인 믿음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 인간의 좋은 부분이나 깨끗한 부분밖에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로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모든 것에 대해서, 즉 교향악의 악기처럼 여러 악기가 인간 내부에 있는데, 거기에 대해서 반응해 주지 않는다면 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인간의 아름다운 부분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종교인가, 인간의 마주선 악 모두에 대해서 반응하는 종교인가 하는 문제가 있읍니다 ..  (48쪽)

 

 먼길 손님과 함께 왔기에 이런 재미난 책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더 반갑습니다. 사진책 《日本の祭》(每日新聞社,1971)를 집어듭니다. 1971년 일본돈으로 1만 엔이 하는 책입니다. 일본은 물건값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고 하지만, 우리 돈으로 치면 꽤 만만하지 않은 녀석입니다. 아무튼, 값이야 어떠하든 "일본에서 즐기는 문화잔치" 이야기를 사진으로 잘 엮어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우리 나라에서 우리 문화잔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낸다면 어떤 사진책이 나오게 될까 하고 헤아리는데, 글쎄 우리한테 우리다움을 보여주는 문화잔치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판에 박힌 관변 잔치가 아닌 우리 스스로 일구는 잔치가 얼마나 있으며, 도시이든 시골이든 제 삶터에서 오래도록 물려받으면서 즐기는 잔치가 몇 가지 있는지 알쏭달쏭입니다.

 

 《이봉덕-길은 멀어도》(봉덕학원/영등포여자중상업고등학교,1976)라는 글모음이 보입니다. 서울에서 영등포여중과 영등포여상을 연 이봉덕 님이 살아온 발자취를 더듬어 본 작은 글모음입니다. 딱히 아는 분이 아니요, 영등포여중이나 영등포여상하고 끈이 닿지 않으나, 무언가 느낌이 있어서 집어들어 봅니다.

 

.. 선친께서는 여아라는 데서 몹시나 서운했던지 아명을 서분이라고 부르며 항시 섭섭해 하셨다. 나는 8세가 되던 해 은파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그 당시 책 몇 권을 보자기에 싸 가지고 동여매 가지고 뒷동네에 사는 동명(장갳노)에 사는 양수의 누이동네 은혜하고 학교를 같이 간다. 방아다리에 들어오려면 개울이 있는데 개울의 다리를 건너 들어오며 그 개울 옆에는 미루나무가 즐비하게 심어 있어서, 빨래하는 동네 여인들에게 그늘을 주기도 하였다. 또한, 소먹이는 어린 목동에게도 그늘이 퍽이나 도움이 되기도 하여, 여러 가지로 위안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양곡을 떨고 베틀을 짜기 위하여 풀을 먹이는 아낙네들의 뜨거운 햇빛을 피하는 데에도 퍽이나 좋았다고 생각한다 … 어린 소녀 시절이지만, 부유한 가정의 자식이라는 말은 들어 왔지만 너무나도 나의 주위는 그 시대에 남존여비 가문이라는 테두리에서 너무나도 애처러웠다고 생각이 된다. 선친께서는 생남을 하기 위하여 다처를 거느리고 있었지마는, 생남은커녕 여아만 6형제를 낳고 보니, 우리 생모는 그 가운데에서 생존할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어머님 밑에서 눈치를 보며 각 형들 밑에서 미움을 받아가며 성장하였다. 특히 양반 가문이라고 하는 그 사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저주스럽다 ..  (46∼47쪽)

 

 이 글모음을 그냥 지나친다면 지나치는 대로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 가지 더 알게 된다고 제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으며, 이런 이야기를 하나 더 모르게 된다고 제가 더 모자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아픔이 있이 살아온 사람들 발자취를 한 번 더 더듬어 보게 되면서 제 발자취를 한 번 더 더듬어 보게 됩니다. 지난날 사람들 살림살이와 터전을 글 몇 줄로나마 더듬으면서 오늘날 우리 살림살이는 어떠한가를 맞대어 보게 됩니다. 잘났다 하든 못났다 하든 한 사람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는가를 곱씹게 되며, 양반 계급이 사라졌다 하는 오늘날 우리 삶터에 '아무 계급 없이' 고르고 아름다운 모습이 넘치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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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책은 작은 책대로 알맹이가 알차고, 큰 책은 큰 책대로 줄거리가 싱그럽습니다. ⓒ 최종규

작은 책은 작은 책대로 알맹이가 알차고, 큰 책은 큰 책대로 줄거리가 싱그럽습니다. ⓒ 최종규

 

 《김수길 엮음-이야기 경제학》(청사,1985)이라는 책을 들춰 봅니다. 책이름에 적힌 '경제'라는 낱말은 끌리지 않으나, '청사' 출판사에서 낸 책이라면 들춰 볼 값어치가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미처 모르며 제가 아직 생각하지 못하는 대목을 짚어 주는 고마운 책인지 모르는 노릇입니다. 차례를 살피며 어느 대목부터 읽어 볼까 하다가, '노동자' 이야기를 펼치는 자리를 먼저 읽습니다.

 

.. 노동자가 노동하여 만들어 낸 생산물이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그 자신의 것이 되지 않고 타인의 소유물이 된다. 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생산물을 자기와는 인연이 먼 낯선 물건처럼 대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단지 자기 노동력의 가치에 해당하는 임금뿐이다 … 노동자는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의 지시와 감독을 받으며 노동하므로, 자기의 노동에 대해서도 자주성을 가지지 못한다. 노동자가 하는 노동은 이미 그 자신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노동이다. 또한 노동자는 노동 자체에서 인간적인 보람을 느끼며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외의 목적, 즉 임금이라는 생활수단을 위해서만 노동할 뿐이다 … 노동자는 분업 속에서 기계의 부속품처럼 한 가지 일만 되풀이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전체적인 인간적 자질을 잃고 쪼그라든다. 노동자는 노동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도 없이 단순한 노동을 되풀이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적 자질 중의 일면만을 기형적으로 발달시킨다 …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와 대립하며, 자본가들은 또 자본가들끼리 경쟁관계로 대립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화폐라는 가치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끼어들어 서로 인간적인 교류를 맛볼 수 없게 된다 … 자본주의 생산에서 노동이 처한 이러한 상황을 노동의 소외라고 부른다 ..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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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최종규

겉그림. ⓒ 최종규

 자본주의 틀거리라 하여도, 일하는 사람이 좀더 즐거울 수 있도록 이끌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일하는 사람한테 보람과 기쁨을 느끼도록 하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람을 부속품이 아닌 사람으로 맞이한다면, 오로지 돈만 버는 기계 아닌 참된 사람으로 어깨동무한다면, 서로서로 얼마나 좋으랴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갈아치울 수 있는 부속품으로 여기게 되는 노동자라 하여도, 좀더 사랑해 줄 수 없고, 좀더 아껴 줄 수 없을까요. 사람이 사는 자본주의는 될 수 없는지, 사람이 살아숨쉬는 자본주의로는 거듭날 수 없는지, 사람뿐 아니라 뭇 자연까지 고이 껴안는 자본주의로 다시 태어날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헌책방에서 헌책 하나가 새 목숨을 받고 새 빛을 나누게 되듯,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 이 나라를 움직이는 경제 틀거리가 새로워지면서 새 빛줄기로 기쁨을 나누는 쪽으로 나아가면 얼마나 반가울는지 꿈을 꾸어 봅니다. 대학교에서 경제를 익히고, 대학생한테 경제를 가르치는 분들이 헌책방 나들이도 즐기면서 《이야기 경제학》 같은 책을 가까이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3) 책 만남, 사람 만남, 생각 만남

 

 수필책 《이범선-전쟁과 배나무》(관동출판사,1975)를 골라듭니다. 소설쓰는 이범선 님이 이런 수필책을 낸 적이 있었군요. 제가 태어나던 해에 나온 책이니 그때로서는 이 책을 알 길이 없었을 뿐더러, 이 책은 오래지 않아 판이 끊어졌기에 더더구나 알 수 없었습니다. 아마, 헌책방 나들이를 하지 않았다면 앞으로도 내내 모르고 있었겠지요. 고작, 소설쓰는 이범선 님 대표작으로 무어무어가 있더라, 하는 부스러기 지식 하나만, 조각난 지식 몇 가지만 머리속에 박아 놓고 있었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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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선 님 수필모음 ⓒ 최종규

이범선 님 수필모음 ⓒ 최종규

.. 그들 부부는 결코 분수 없는 일이나 재물을 생각하지 않았다. 가을을 해다 놓고 자기 집 마당에서, 거기 땅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어린 아들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순박 그것이었다. 그들은 뭐 그 어린애가 자라서 군수나 판검사 따위 남이 다 부러워한다는 그런 것이 되어 주기를 바라지도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그렇게 어린애가 따스한 가을 햇볕을 받고 흙바닥에 앉아 콩깍지를 뜯으며 놀고 있는 모습이 귀여운 것뿐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까지도 그 속에 넣은 자연 속에서 욕심없이 살아가고 있었다. 생활이 또한 그랬다. 풍족하지 못한 대신 부족하지도 않았다. 언젠가는 내가 그의 집 앞을 지나노라니까 그는 벼 멍석을 마당에 널어 놓고 한쪽에 앉아서 새끼를 꼬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옆에서는 닭들이 열심히 낟알을 쪼아먹고 있었다. "아니, 닭은 쫓지 않고 뭘 하고 있소?" 그는 피시시 웃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거 뭐 내버려두지! 나도 몇 번 쫓아 봤는데 고놈들 틈틈이 와서는 결국 저 먹을만치는 다 먹더군. 허허허." 나도 따라 웃고 말았다. 따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닭에게는 일부러 먹이도 주는 것을 ..  (172∼173쪽)

 

 수필을 놓고 '잡글'이라고도 합니다만, 잡글이라 하여도 마음을 뭉클하게 움직여 준다 하면, '사랑글'로 받아들입니다. 문학 갈래에서는 잡글로 나누든, 비평하는 이들이 아예 비평조차 안 해 주든, 책을 좋아하고 글을 아끼는 저 스스로 이처럼 삶이 묻어난 아름다운 글을 사랑글로 여기면 넉넉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서울 손님이 저녁 들 짬 없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한다며 저를 찾습니다. 책 구경에 너무 빠져 있었나 싶어 미안하고, 애써 찾아오고도 이렇게 일찍 돌아가야 한다니 서운합니다. 이제 겨우 저녁 일곱 시일 뿐인데. '다음에 다시 올게요' 하는 인사를 남기고 먼저 바쁜 길을 재촉하는데, 그 다음이 언제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 '다음'이라는 말을 곧잘 내뱉지만, '다음'을 지킨다는 일이 얼마나 어렵든가요. 다음도 나쁘지 않으나 '오늘'을 즐기고,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한다면 더없이 좋겠는데.

 

 고른 책값을 셈하는데, 〈아벨서점〉 아주머니가 몇 가지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동네 골목집 한복판을 꿰뚫는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일 때문에 여러모로 생각이 많으신데, 마구잡이로 흘러가는 세상 흐름을 어떡해야 하느냐는 안타까움이 말마디마다 묻어납니다.

 

 "아이 참, 진짜 뭘 생산해야 하는지를 까먹고 지낸다는 생각이 들어 …… 그래서 나는 '이것 하는 게 옳은 것이냐, 아니 뭐를 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어. 동네에서 1/3만 그 생각을 해도 좋겠는데, 집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 …… 돈을 숫자로 해서 살강에다 올려놨어. 쓸 줄도 모르면서 …… 휘둘리고 있지. 주체가 없어. 사람이면서 사람됨이 없이 사는 데도 불만이 없어 …… 기후변화도 다 사람이 만들어 가고 있잖아. 난데없이 폭포수처럼 비가 쏟아붓는다든지 …… 집이란 거를 집단수용소처럼 만들어서 다들 갇혀 있게 되었는데, 자기들이 거기에 갇혀 있는 줄을 몰라."

 

 집을 집으로 여기지 못하게 된 오늘날 우리들이기에, 책을 책으로 여기지 못하게 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집과 책뿐 아니라 우리 사람도 매한가지이며, 우리가 하는 일과 즐기는 놀이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가용 굴리는 일이 나쁘지 않으나, 자가용을 어떻게 굴리면 좋은가를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습니다. 돈벌이가 나쁘지 않으나, 돈만 많이 벌어대고 옳게 쓸 줄을 모르니 안쓰럽습니다. 지금은 수십억 비싼 아파트에서 떵떵거리고 사는 듯하지만, 그런 부동산이 얼마나 자기들 삶을 아름다이 가꾸어 주는가를 돌아보지 못하니 쓸쓸합니다.

 

 톨스토이를 읽어도 톨스토이 사랑을 받아먹지 못하고, 조정래나 조세희를 읽어도 조정래나 조세희가 펼치는 사랑을 얻어먹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돈을 넉넉히 벌어도 마음이 넉넉해지지 못하고, 집을 큼지막한 데에 얻어도 마음결이 커지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높은 이름값을 누려도 이름값만큼 넋이며 얼이 높아지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처세책을 읽든 자기계발책을 읽든, 좋은 생각을 얻어 내 삶을 좋은 삶으로 가꾸어 간다면 기쁠 텐데, 어떤 책을 손에 쥐어도 우리 스스로 좋은 사람으로 탈바꿈하지는 못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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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읽힐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책들은 언제쯤 새 임자를 만나 제 몫을 다하게 될까요. ⓒ 최종규

되읽힐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책들은 언제쯤 새 임자를 만나 제 몫을 다하게 될까요. ⓒ 최종규

 

 몇 가지 고른 책을 어깨춤에 끼고 동네 구멍가게 마실을 합니다. 보리술 한 병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골라든 책을 찬찬히 펼쳐 읽으며 홀짝홀짝 마십니다. 아침에 해 놓은 밥을 안주로 삼습니다. 어느 만큼 읽다가 책을 덮고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한동안 허리를 펴고 나서 사진기를 어깨에 걸고 밤골목 마실이라도 다녀와야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인천 배다리 〈아벨서점〉 / 032) 766-9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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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4.05 18:26 ⓒ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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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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