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계 농가의 채산성과 '자본주의 경제 논리'의 몰인정

등록 2009.04.06 16:27수정 2009.04.0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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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 농가의 채산성과 '자본주의 경제 논리'의 몰인정.

양계 산업이 근대화 되면서, 방목한 닭들을 보는 것은 정말 어렵게 되었다. 특히 고기를 위해 길러지는 닭들은 복사용지 한 장 정도의 철망으로 된 우리에서 길러진다. 이런 방식을 "산업적 양계' 혹은 "공장형 양계"라고 한다. 곧, 닭을 더 이상 생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의 생산품처럼 취급하는 것이다.

'공장'에서 길러지는 닭들은 날개를 펼 수 없음은 물론이고 횃대를 갖는 호사스러움(?)을 누리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난 50년간 '고기용' 닭들은 3배나 빨리 자라고 먹이는 1/3만 먹도록 '개량'되었다. 물론 좁은 공간에서 자라니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폐사할 확률도 그만큼 높아졌다. 하지만 '채산성'이라는 기준으로 할 땐, 사망률을 무시하고도 남을 이익을 지금의 시스템으로 얻을 수 있다. 즉, 닭이 죽어나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닭들에게 최소한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다.

'채산성'이라는 기준에는 '인정'이나 '도덕성'은 발 디딜 틈이 없음은 물론이요, '식품안전성'같은 개념도 무시되기 일쑤다. 아무리 공장형 양계로 길러진 닭들의 1/10이 다리를 절고 있고, 많은 수의 닭들이 뼈에 만성적인 통증을 느끼고 있다고 하여도, 이러한 시스템은 개선될 기미가 없다. 또 조류독감과 같은 질병이 면역성이 약화된 공장 닭들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고, 몇 년에 한 번 꼴로 '닭고기 공포'를 겪어야 하지만,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채산성'이라는 '과학적' 기준에 비춰볼 때 충분히 감내야할 미미한 부작용일 뿐이다.

또한 현재의 공장형 양계 시스템을 개선하고자하는 노력은 "닭과 같은 미물의 권익을 따지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강력한' 반대 입장이라는 장래에 부딪히기 마련이다. 얼마 전 '경인 운하 공청회'자리에서 기자와 시민들의 출입을 막던 한 노인의 말이 떠오른다. "철새가 밥 멕여 주냐!"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단순히 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묻고 싶다 경인운하가 당신을 밥멕여 주는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산업형 양계의 메커니즘이 인간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이 지구에는 18억이 넘는 인구가 하루에 1달러도 안 되는 수입을 의존하는 극빈 상태에 고통 받고 있다. 치료 가능한 질병으로 목숨을 읽는 사람이 1,200만 명에 달한다.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8억 5,000여명에 달한다. 해마다 6,200만 명의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건 죽고 있다. 이중 58%에 달하는 3,600만 명이 기아나 영양실조로 죽고 있다.

하지만 상위 1%가 소유한 재산이 하위 57% 재산의 총합과 같다. 해마다 전 세계의 GDP는 늘고 있고, 빈민들의 절대적인 숫자는 늘지만, 전체 인구 증가라는 요소 때문에 그 비율은 조금씩이라도 줄고 있다.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비율이 줄고 있고 전체 재산의 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과학적(?) 통계' 때문에 외면 받는다. 거대 다국적 기업들의 금고에는 해마다 유보(留保) 명목으로 어마어마한 양의 돈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고(마이크로소프트사는 금고에 600억 달러를 넣어두고 있다.), 그 돈이면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의 아이들은 최소한의 생존권 교육권 의료혜택을 보장하고도 남을 수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고 있다. '경제논리'이다. 기아로 인한 영아 사망률을 무시하고서라도 현재의 경제 체제로 인한 '부의 축적의 가속화'라는 유혹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국익', '경제 논리', '실용주의'를 불가피한 것, 심지어 올바른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만연해 있다. 국익을 위해, 하루에도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는, 미국의 자원침략전쟁에 불과한 이라크 전쟁에 파병했다. 한국의 국익을 도모하는 것은 타국의 애먼 국민들의 이익을 해칠 수 있고, 특히 비윤리적 행위를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을 사고하는 것이 정녕 사치란 말인가. 경제논리에 의해 수입 농산물이 헐값에 들어와, '정상국가'라면 당연히 육성되어야 할 농업이 파탄나지만 고의적으로 방치되고 있다. 실용주의라는 이름으로 당사자들이 버젓이 살아있는데 '과거사'를 '정리'하려 기도한다.

경제논리에 따른 이익과 도덕성의 파괴로 인한 해악의 경중을 정확히 계산해 내는 것은 힘들지 모른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경제적 이익은 편중되지만 도덕성 파괴로 인한 결과는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고루 되돌아온다는 점이다. '동정(同情, compassion, 혹자는 동정이란 기쁨 두려움 행복 불행 고통 등 다른 모든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음으로 정의하며, 감정체계에서 제일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고 말한다. )'이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소중한 감정마저 사치로 여기게 만드는 '실용주의'가 진정 '실용'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한다.


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통감(痛感)'체계를 가졌다는 닭들을 채산성이라는 이유로 방치하고 묵인하면서 이로 인해 발생하는 조류독감 등 질병이나 식품 안정성 문제, 또 윤리체계의 위태로움을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 있는지. 또 같은 행성에 헐벗은 같은 종(種)의 굶주림으로 발생하는 '수치'와 '증오'의 감정이, 또 그로인해 발생하는 온갖 폭력 사태들이 결국 누구에게 '해'로 되돌아올지. 이런 부작용은 우리가 그토록 애타게 부르짖는 '경제', 그 논리의 필연적인 부수물이라는 것을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늘날 도덕도 윤리도 인정도 동정도 없는 이 무지막지한 경제논리로, 사람이 죽어간다.

참고.
죽음의 밥상, 피터싱어
탐욕의 시대, 장 지글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양계 #피터싱어 #죽음의 밥상 #탐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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