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궁상맞은 이야기 한번 들어볼래?

<습지생태보고서>를 통해 본 루저 문화

등록 2009.04.10 17:21수정 2009.04.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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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재미없는 것은 작가가 게을러서다." 만화가 최규석의 말을 빌리면, 영화가 재미없는 것은 감독이 게을러서고, 소설이 재미없는 것은 작가의 게으름 탓이다. 마찬가지로 기사가 재미없는 것은 기자가 게으른 까닭이다(물론, 기사가 재미있어야 하는 당위성은 없지만. 이왕이면 다홍치마 아니던가).

남루한 자취생들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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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최규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의 <습지생태보고서>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 가능한 면이 있다. 우선 그는 부지런하다. 왜냐하면 그의 만화는 재미있기 때문이다. <습지생태보고서>가 연재됐던 경향신문의 김준일 기자는 그의 만화 속에 담긴 코드를 '블랙유머'로 해석했지만, 굳이 '블랙'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의 만화 속 유머는 재치와 반전이 가득하다.

물론 현실에 대한 비참하고 부조리한 면을 가감없이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특히 한방에 4명이 모여 사는 가난한 자취생들의 시선으로 그 현실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블랙유머' 코드는 이 만화를 읽어내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이 부분에 있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만화는 최규석의 실제 자취 생활을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습지생태보고서>는 현실에 기반을 둔 만화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사물에 대한 그의 의인화 기법이 가장 재미있었는데, 그런 판타지 요소마저 그는 생활에서 끄집어 온다. 이삿짐을 나르기 위해 길가에 내놓은 책상을 보고 "현정씨, 우리집에 가요. 저랑 가요" 하면서 껴안는 장면과 "나는 너희들과 달라"하고 소리치며 불을 뿜으려 하는 군인이 사실은 군초(군용담배)라는 장면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능력은 표현기법에만 그치지 않는다. 만화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철칙에 부합하면서도 뭔가 생각하게 만드는 '내공' 역시 만만치 않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다음과 같은 대사가 터져 나올 때면 '흠칫'하게 되는데, 그건 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욕망'을 스스럼 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연애도 현실의 짓누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강남의 부잣집 여자와 연애에 빠진 주인공은 항상 용돈 4만 원에 한달을 버티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도 "죄 짓는게 아냐. 남들 다하는 그냥 연애를 하는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소리친다.
-27회: 남들다 하는 것


속물근성이라니!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너 혼자만 비켜 서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마! 너도 좋은 집에서 멋진 차 타고, 스타일 죽이게 입고 폼 나게 살고 싶잖아!?
-23회: 뛰어 오른 적 없어

그 밖에 가난한 자취생들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꿈꿔보는 욕망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 만화는 유쾌하고 가볍게 하지만 결코 얕지 않게 그려낸다. <습지생태보고서>는 만화가 꼭 현실을 잊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며,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그 재미는 두 배가 되는 뭐 그런 만화라고 할 수 있겠다.    


20대 그리고 루저문화

그런데, 자취생들 이야기를 하니 딱! 하고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내가 장판인지, 장판이 나인지 알 수 없다고 읊조리는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다. 최근 그는 별일 없이 살지만, 이미 그는 루저(loser) 문화(패배자의 정서를 담은 문화)의 대표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음악 능력이나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감성코드는 차치하더라도, 분명한 건 그가 노래를 통해 담아내는 정서가 <습지생태보고서>에도 나타난다는 것이다. 차이점이 하나 있다면 장기하는 자취를 안 해 봤다는 거고, 최규석은 해봤다는 거 정도?

굳이 88만원 세대라 칭하지 않아도, 지금의 20대는 그야말로 '안습'세대다. 경기불안과 고용악화라는 현실이 어깨를 짓누르는 상황에서 이들은 현실에 맞설 힘조차 없다. 지금의 3·40대가 대학시절 토익책이 아닌 짱돌을 들었고, 현재 10대인 아이들이 시험지가 아닌 촛불을 들었을 때, 20대는 조용했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들을 두고, 청춘의 종언, 언어를 상실한 세대, 겁에 질려 있는 세대 등등…. 그럴 싸만 말들을 앞세워 싸잡아 비판한다. 오죽하면 루저(loger)문화라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경쟁에서 도태되고 추락하는 패배자의 정서를 담아낸 문화. 그 한가운데에 20대가 있다. 루저 정서가 전 국민에게 퍼져나간 첫 번째 시기, IMF때 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한숨을 내쉬는 부모님 밑에서 이들이 생각한 거는 딱 한 가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이었다.

그러고 대학을 와보니, 이게 웬걸. 학점관리에 영어에 해외연수에 봉사활동까지….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는 '스펙'(취업할 때 내세울 만한 학력이나 경력 쌓기를 뜻하는 신어) 만들기에도 대학 4년은 너무 짧다. 5학년은 필수, 6학년은 선택이라는 말도 괜한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앞날이 밝은 것도 아니다. 싸구려 커피 마시며 별일 없이 사는 도리밖에 없다. <습지생태보고서>의 주인공들 역시 돈이 없어 싸게 사려 멀리까지 물건을 사러 나가고, 차가 없어 그 먼거리를 걸어 다닌다. 뽑기로 뽑은 랍스타를 라면에 넣고 끓여 먹은 뒤, 랍스타 먹었다고 자랑하는 뭐 그런 삶을 살아간다.

<습지생태보고서>의 '습지'는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능력(=돈)이 없는 사람들과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뜻한다. 이는 루저 정서와도 맞닿아 있고, 넓게는 <습지생태보고서>만화 자체가 하나의 루저 문화 양식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

장기하 열풍에 관한 다양한 해석 중 "루저 정서를 소비할 수는 있지만 루저가 되고 싶지는 않은 욕망"이라는 견해가 있다. 사실, <습지생태보고서>의 첫 장을 넘길 때만 해도 최규석 만화가 역시 루저 정서를 소비하는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애초 자신이 생각했던 목표의 액수가 모아지자 연재를 그만뒀다. '가난해야 예술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가난해질까봐 무서워서 할 작업을 못한다는 것은 그에게 맞지 않는 옷과 같다고 한다.

그는 <습지생태보고서>로 습지를 탈출했지만, 여전히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끝으로 만화의 마지막 편에 이르러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묘사한 부분이 있는데, 함께 보도록 하자.

패배할 것이 두려워 출발선에 서기를 피하고 있는 걸까? 혹은 어른이 되는 날을 자꾸만 미루고 있는 것일까? 불안한 눈빛으로 친구의 연봉을 묻거나 부동산 정보를 뒤적거릴 어쩌면 슬플 그 날에 한때는 이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했노라 자위할 기억할 기억을 만들고 있는 것뿐일까? 세상 안으로 성큼 들어오지도 발을 빼지도 못한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지금 그래도 조금씩은 자라고 있는 것일까?….

현실의 냉혹함과 잔인함, 지금 내 모습의 외로움과 남루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현실에서 한발 비껴서 있는 양, 그렇게 관조자의 자세로 어물쩡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20대. 나만 열심히 하면, 나만 잘하면 언젠가는 세상이 알아줄 거란 생각.

그런데,

정말,

"자네 혹시, 진실은 통한다고 믿는 거야?"
-16회: 적자인생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선샤인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루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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