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대한민국의 명운을 바꾼 영천 전투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32] '화첩을 보며'

등록 2009.04.14 10:27수정 2009.04.14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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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어떻게 건너셨나요?"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못 건너지요. 나룻배는 안전한 줄 알고 탔는데, 미국 비행기는 이 원시적인 교통수단마저 두절시키겠다는 듯이 아예 나룻배만 겨냥했어요. 조금 뜸하다 싶어 움직이면 영락없이 달려와 기총을 쐈어요. 총을 쏘지 않아도 강 위를 아주 낮게 날아 지나가면 그 선풍(旋風)으로 작은 배들은 전복되기 일쑤였지요. 전복된 배에다가 기총소사를 하고 폭탄을 붓고... 날이 갈수록 한강에서 죽는 민간인들의 숫자가 늘고 있어요."

"그런데도 건너셨어요?"
"아이들을 굶겨 죽일 수는 없어서 결사적으로 건넌 것이지요. 보리쌀 말이나 얻으려고 목숨을 거는 일이 생길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손 선생은 쓸쓸히 웃었다. 하지만 김성식은 웃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도 폭격이 있지만 시골 폭격에 댈 게 아니라오. 움직이는 것들은 모두 두들깁니다. 차는 물론 우마차도 나다니지 못합니다. 그러니 인민군은 병사가 몸소 등에 지고 물품을 날라야 합니다. 이렇게 보급이 차단된 마당에 어찌 싸움이 될까 하는 생각이 든다오."

그런데도'대구 완전 해방'이라는 벽보가 나붙어 있었다. 신문이나 라디오에서는 그런 보도가 일절 없었다. 김성식은 전황이 궁금했다. 좌익 계열의 사람들은 대구가 해방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완전히 제압하여 적이 다시는 넘보지 않게 만든 후에 공식발표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은혜병원의 간호사 오현자는 해방된 대구에 여맹(女盟) 선발대로 간다고 했다.

김성식은 어제 지서 다리에서 만난 오현자에게 말했다.

"오 간호사, 인공(人共) 신문에도 아직 대구까지는 안 내려가고 다부원 근처에서 전투중인 것으로 나오는데 어떻게 대구에 간단 말이오?"


오현자는 김성식을 아주 순진한 사람으로 간주하는 것 같은 웃음을 보이면서 대답했다.

"선생님, 어제 저녁 해방된 대구에 들어갔다가 올라온 사람이 있는데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어요?"


오현자의 말을 들으니 대구 해방은 사실일 듯도 했다. 하지만 오현자는 떠날 준비만 했을 뿐 정작 대구로 가지는 않았다.

전황은 김성식의 말대로 다부원에서 정체하고 있는 상태였다. 인민군의 원래 목표는 8월 15일까지 부산을 완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7월 말까지만 해도 이 목표는 순조로이 달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미군과 국군이 낙동강 방어선을 완강히 구축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인민군은 소모된 전투력을 보충하지 못한 반면, 미군과 국군은 차츰 전투력을 정비하며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자 인민군은 목표를 수정했다. 8월 15일까지 부산 대신 대구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구에는 대한민국 정부와 미 8군사령부가 있었다.

낙동강 방어선을 깨기 위해 이미 인민군은 5개 사단을 동원하여 총공세를 벌였었다. 실제로 3개 사단은 낙동강 도하에 성공하기도 했다. 김성식이 본 대구 해방 벽보는 3개 사단이 낙동강 도하에 성공한 후 서울의 길거리에 나붙은 것이었다.

산악능선을 따라 공격해 오는 인민군에게 미군과 국군은 대체로 밀렸지만, 유독 국군 1사단만은 낙동강의 천연 지형을 이용하여 능률적인 공방전을 벌이며 버텼다. 그 덕분으로 국군은 5개 사단의 전열을 정비하여 왜관 - 다부동 방어선을 완강하게 구축할 수 있었다. 다부동에는 수안산과 유학산 그리고 팔공산에서 뻗어진 고지들이 있었다. 물론 이 고지들은 대구로 통하는 최후의 관문이었다.

유학산이 인민군 수중에 들어가자 미군 수뇌부는 2차대전 때 노르망디에서 벌였던 융단 폭격을 실시했다. 미 8군의 제안으로 공군은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하여 왜관 북방 지역에 대량으로 폭탄을 퍼부었다. 융단폭격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의 공격기세는 약화되지 않았다. 이미 인민군은 도하를 끝낸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국군 1사단이 지키고 있던 다부동에 미군 27연대가 합류했다.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대구 역전에 떨어지는 것을 본 대한민국 정부는 황급히 부산으로 수도 이전을 결정했다.

다부동에서는 매일 천 명 정도의 국군 전사자가 발생했다. 인민군은 새로 보충한 전차를 앞세우고 야간에 달려들었다. 미군도 신형 전차로 맞섰다. 전차전은 5시간 이상 전개되었다. 전차에서 발사하는 포탄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새빨간 불덩이가 마치 볼링공처럼 좁은 계곡의 도로를 따라 날아가 상대방 전차에 명중하며 폭파되는 장면이 밤새 펼쳐졌다. 이때의 전차전을 가리켜 미군은 '볼링장 전투'라고 명명했다. 인민군은 더 이상 다부동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주력 부대의 노선을 영천 방향으로 틀었다.

이처럼 다부동 방어선은 대구 방어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인민군은 대구 공세로 3만 명이 전사했다. 국군과 미군에서도 1만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여기에는 민간인 희생자가 포함되지 않은 것이었다. 민간인들은 대대별로 5,60명씩 강제 동원되어 전투를 위한 노무를 담당했다. 다부동 일대에는 시체 썩는 냄새 외에는 나지 않았다. 마스크를 써도 다니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중 인민군이 물러나고 전장이 안정을 찾아 미 제1기병사단이 다부동 진지를 인수하게 되었을 때, 미군 사단장은 한국군 총사령관 정일권에게 말했다고 한다.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소."

9월 들어 초조해진 인민군은 전군의 힘을 결집하여 재차 공격을 기도한다. 결과 인민군은 영천을 점령했다. 그리고 경주 방향으로 우회해 들이닥쳤다. 그러나 경주 깊숙이 들어간 인민군은 오히려 고립·포위되는 상황으로 반전되었다. 당시 인민군 제2군단장 김무정은 8사단장에게 전화를 걸어 "동무가 신령을 돌파하지 못해 영천을 점령한 인민군의 우측 면이 적에게 노출되고 있다"고 힐책했다. 그 날 오후 국군과 미군은 총력을 다해 영천 탈환에 성공했다.

이로써 인민군은 다부동 패배에 이어 영천에서 대규모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영천 전투는 인민군의 마지막 남하 전투가 되었고 이로 인해 대구는 사수될 수 있었다. 영천 전투는 대한민국의 명운을 바꾼 분수령이었다. 훗날 김일성은 "우리가 영천 전투에서 실패하여 밀리게 되었다"고 자책했다.       

제8장 화첩을 보며

너무도 짙어서 머리 위 뭉게구름까지 푸르게 물들일 뻔했던 북악의 녹향도 이제는 다소 쇠해진 듯했다. 산 너머 북녘 송추의 나뭇잎들은 파랗던 것들이 노란 빛을 띠기 시작했다. 이제 계절이 바뀌고 가을이 깊어지면 바야흐로 그것들은 먼 별처럼 붉은 빛을 머금게 될 터였다. 송추 옆 일영의 냇물도 불과 일주일 사이에 엷은 검은 빛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배밭골의 실과향과 흙냄새도 포성을 들으며 단단히 여물고 있었다.

움막을 향하는 조수현의 발길은 가벼웠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예감하고 있었다. 미구에 이두오를 두고 떠나야 할 일이 필경 생길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인민군이 영천 전투 이후 후퇴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보급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밀어붙였던 인민군의 공격력이 한풀 꺾였을 때, 그 반전은 진격만큼이나 빠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만약 서해 중간쯤에 미군의 대규모 상륙이라도 있게 된다면 인민군은 옷을 벗은 채 옆구리를 내 주는 사람처럼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말해 볼까? 함께 북으로 가자고?'

아쉽게도 그것은 지나친 자기 욕심에 불과한 것임을 그녀는 헤아리고 있었다.

조수현은 움막 책상에 앉아 종이에 수식을 끼적이고 있는 이두오를 불러내 우물로 데려갔다. 이른 저녁이지만 골짜기에는 어느 사이 땅거미가 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이두오에게 등목을 해 주었던 어젯밤 꿈대로 해 보고 싶었다. 그녀는 두레박줄을 쥐며 약간 명령조로 말했다.

"엎드려 보세요."

이두오는 두 손으로 번갈아 머리를 털어 보더니, 슬며시 엎드려 고개를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웃었다. 마치 꼬리 쪽을 돌아보는 송아지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두레박 물에 담갔던 손으로 이두오의 목 언저리와 어깨 주변에 물을 적셨다. 물론 갑자기 찬물을 부으면 이두오가 놀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이두오의 등에 두레박 물을 부었다.

"우으시, 우시!"
#영천전투 #다부원 #대구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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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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