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억 주고 산 가게, 2천만원에 못 넘겨!"
'제2 용산' 우려되는 서울 '지하도 전쟁'

[현장취재] 강남권 5개상가 공개입찰 방침에 대기업들도 '눈독'

등록 2009.04.22 15:24수정 2009.04.22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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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김영옥씨가 매물을 정리하고 있다. 서울시가 소유권을 가진 김씨의 가게는 작년 5월31일 계약이 종료됐고, 양자는 명도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 손병관


"작년 3월19일 7평짜리 가게를 3억 원 주고 계약했는데, 서울시는 (같은 해) 5월 31일이 계약 만료일이었다며 1년째 나가라고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울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옷가게를 하는 김영옥씨는 한숨을 쉬었다.

김씨는 가게를 얻기 위해 지난해 1억5천만 원의 은행대출을 받아서 다달이 80만 원씩 갚고있다. 하루 12시간씩 가게를 꾸려가는 것도 버거운데 요즘은 자주 피켓을 들고 서울광장과 여의도 한나라당사 앞으로 나가야 한다. 당장 22일과 29일(서울시청 앞), 내달 7일 한나라당사 앞에 상인들의 집단시위가 예정되어 있다.

법대로라면 김씨는 서울시로부터 보증금 2300만 원만 받고 가게를 넘겨줘야 한다. 김씨가 기존 상인과 계약할 때 지불한 권리금은 법률적 효력이 없다. 김씨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상인들은 부지기수다.

서울시가 소유권을 가진 시내 지하상가에는 대략 3000개의 점포들이 있는데, 서울시는 이 가운데 강남역·고속버스터미널·영등포 등 5개 상가 900여 개 점포를 민간업체에 위탁 운영할 방침이다. 

서울시가 이번 주중에 입찰공고를 내면 다음 달까지 업체 선정을 마무리하고, 하반기부터는 이 업체가 강남권 상가들의 리모델링을 맡게 된다. 상가 리모델링 과정에서 기존 상인들은 민간업체와 새로운 조건의 계약을 맺어야 한다. 어느 업체가 맡더라도 그동안의 관행이었던 권리금을 인정하지 않고 보증금을 크게 올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근까지 4억~5억 원의 권리금과 함께 가게를 주고받았던 상인들이 무더기로 낭패를 보는 셈이다. 강남역 지하상가(212곳)에만 지난 5년 사이에 점포를 새로 인수한 사람이 13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서울 지하도상가의 역사는 196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지하철 1호선(서울역-청량리 구간)이 처음 개통된 것이 1974년 8월이었으니 지하도가 지하철보다 먼저 생겼다.

서울시는 전쟁이 발발하면 시민들의 방공 대피소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곳 저곳에 지하도를 만들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재정형편이 넉넉지 못해 20년 뒤 기부채납하는 방식으로 민간자본을 유치했다. 


이명박 시장, 2002년 '계약 연장'으로 미봉책... 오세훈 시장에 '불똥'

지하도 시공업체들은 업체들대로 상인들의 분양 보조금을 미리 걷어 공사대금을 충당했고, 이 때문에 민간업체들이 상가를 관리하는 동안에는 상인들끼리 권리금을 주고받는 행위가 묵인됐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해 지하도상가의 관리권이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으로 넘어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서울시가 2002년 11월4일 "지하도 상가 점포의 양도·양수를 전면 금지하고 일반경쟁 입찰을 실시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상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지하도 상가 곳곳에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대통령을 규탄하는 대자보와 플래카드가 나붙었고, 정치적 부담을 느낀 이 대통령은 이듬해 보증금을 100% 인상하고 임대차계약을 5년 연장하는 것으로 상인들과의 갈등을 봉합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이 대권 도전을 일찌감치 생각했던 것을 감안하면, 당시 합의는 5년 뒤에 취임할 차기 시장에게 책임을 떠넘긴 것에 불과했다.

"서울을 새롭게 디자인하겠다"는 포부를 가진 오세훈 시장은 서울의 노후한 상가들에 어떻게든 손을 대야 한다는 의지가 강하다. 지하도 상인들의 반발에 아랑곳없이 서울시가 위탁 운영 절차를 서두르는 것도 오 시장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 관계자는 "왜 지금의 상인들이 인근지역에 비해 훨씬 저렴한 보증금을 서울시에 내면서도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권리금을 핑계로 노른자위 상권을 독점하려고 하나? 다른 시민들도 그곳에서 장사할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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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지하도상가연합회 정인대 이사장 ⓒ 손병관

그러나 지금의 상인들이 떠나고 나면 '지하도 전쟁'의 최대 수혜자는 대형유통업체들을 끼고 있는 재벌들이 될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다.

정인대 전국지하도상가연합회 이사장은 "백화점 운영이 예전만큼 잘 안되지만 저가 옷은 잘 팔리기 때문에 대기업들은 지하상가에 아울렛 매장을 만들려고 한다"며 "지금은 비판 여론 때문에 눈치를 보고 있지만, 상가 인수전이 시작되면 입찰 경쟁에 나설 업체가 한둘이 아니다"고 말했다. 

김봉관 전국지하도상가연합회 사무국장은 "명동과 소공로는 롯데, 회현은 신세계, 영등포역은 롯데, 강남 고속터미널은 신세계, 강남역은 삼성, 잠실은 롯데… 이런 식으로 서울의 주요상가들이 대기업이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백화점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전망이 현실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 작년에 이미 터졌다.

아르바이트생에 상가현황 조사하게 한 신세계... 확인서 내고 사태 마무리

2008년 4월 10일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강남역 지하상가 35개 점포에게 "5월 말까지 점포를 비워 달라"고 요구한 지 2주도 안 돼 신세계백화점이 고용한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회현상가의 영업현황을 파악하러 다니다가 상인들에게 붙잡혔다.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갖고있던 자료에는 상가 점포 임대자 220여 명의 상호와 면적·보증금·월 임대료·계약기간 등이 자세히 적혀있었다. 상인들은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이 백화점에 자료를 넘겨준 것으로 의심했다.

신세계 본점장이 "신세계는 회현 지하상가의 매입 및 개발과 관련해 어떠한 계획도 없고, 이번 사건에 심심한 유감을 표명한다"는 확인서를 상가연합회에 제출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러나 서울 지하도 상인들이 일단 자리를 뜨고 나면 대기업들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는 점은 업계 상식이다.

연초에는 서울시가 강남역 지하상가의 운영권을 특정업체에 이미 넘긴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졌다.

지하상가 관리업체 D실업의 S대표가 1월 2일 신년사에서 "▲ 서울시 지하도상가의 민간위탁 운영방침 변경은 우리가 기울인 노력의 결과다 ▲ 서울 시의원과 시설관리공단 및 시 간부들조차 우리의 탁월한 관리력을 인정했다 ▲ 올해는 기필코 서울 강남역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신규사업장을 개발하겠다"는 언급을 한 것이 논란이 됐다.

D실업은 신년사에서 논란이 된 부분을 수정하고 "임직원들에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달라는 취지로 한 말이 다소 과장되게 표현됐다"며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지하도 상인들의 의구심은 여전하다.

지하도상가연합회는 "서울시가 지하도상가 경쟁입찰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특정 업체와 유착한 의혹이 있다"며 오세훈 서울시장을 공무원 직무집행 위반 혐의로 고소했다. 서울시도  정인대 지하도상가상인연합회 이사장을 명예훼손 및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맞고소한 상태다.

서울시 "특혜의혹 제기된 업체가 입찰 따내는 일은 없을 것"

정인대 이사장은 "D실업은 자회사를 만들어서라도 공개입찰에 들어올 것이고, 입찰을 따낼 가능성은 거의 100%라고 본다"고 주장하지만 서울시는 "D실업이 입찰을 따내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서울시 도시교통본부 관계자는 "상가관리 업체를 어떻게 선정할지에 대한 논의를 최근에야 마쳤는데, 연초부터 내정됐다는 의혹이 불거져서 당황스러웠다"며 "이런 상황에서 특혜 의혹이 제기된 업체가 계약을 따내겠냐"고 반문했다.

이 관계자는 "D실업이 입찰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겠지만, 서울시의 신뢰성을 의심할 만한 일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며 "전문가들이 심사 과정에서 이 점을 십분 고려할 것같다"고 점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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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서울 영등포역 상가 곳곳에 서울시의 지하도상가 공개입찰을 반대하는 문구들이 붙어있다. ⓒ 손병관


서울시는 이 같은 논란을 뒤로하고 강남권 5개 상가에 대한 민간 위탁을 하반기에는 강행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상인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경우 '제2의 용산 참사'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내년 지방선거에서 재선을 노리는 오세훈 시장으로서도 지하도상인들과의 갈등이 장기화되는 것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다.

정인대 상가연합회 이사장은 "200개 가량의 점포를 들어내려면 최소한 용역직원 500명은 투입해야 하는데, 수억 원의 권리금이 날아가게 된 상인들이 가만있겠냐"며 "지하상가에서 불이 나고 가스통이라도 잘못 터지면 상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고 우려를 표시했다.
#지하도상가 #공개입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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