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끝이 겨누는 건 좌도, 우도 아니다

[리뷰]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등록 2009.05.02 12:42수정 2009.05.0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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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 씨네21

책 겉그림 ⓒ 씨네21

보통 저자나 출판사를 보면, 그 책의 성분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소위, '색깔', 혹은 '라인'이 파악된다는 얘기다. 저자가 그 유명한 기타노 다케시다. 게다가 출판사는 '씨네21북스'. 당연히 '왼쪽'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자연스런 사고의 흐름을 보기 좋게 깨부순다. 책장을 펼쳐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덮어버린 건, 도무지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독설들 때문이었다. 독설의 향연을 잠시 감상해보자.

 

 먼저, 외교 분야.

 

"북한이란 나라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취급하고, 완전히 무시하는 게 최고다. 어정쩡하게 있으니까, 약점이 잡혀 공갈 협박을 당하는 거다. 그렇게 눈 딱 감고, 없는 셈 치면, 그때부터 애 타는 건, 걔들이다. 자기들이 먼저 백기 들고 찾아와, 납치한 일본인들을 내 줄테니 먹을 것 좀 달라고 떼 쓸 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 한국이 자꾸 과거의 전쟁 가지고 붙들고 늘어지는데, 그냥 먼저 사과해 버리자. 아름다운 기모노를 입은 다나카 마키코 같은 외상이 무릎 꿇고 사죄하면, 용서 못 할 녀석은 거의 없을 거다. 일단 용서받고 나면, 이제부터 열쇠는 일본이 쥘 수 있다. 경제 원조를 요구하든, 교과서에 대해 불평을 하든, 이젠 알 바 아니다. "난 이미 사과했어. 용서한다고 말했잖아"라고 일축해버리면 그만이다. 사과부터 하고 싸움을 붙는 거다."

 

 다음은 가정 편이다.  

 

"모든 악의 근원은 역시 전후 민주주의, 남녀평등교육 탓이다. 여자가 거만해지면, 상대적으로 남자는 약해진다. 거기다 자식의 권리까지 무조건 존중되니, 아이들도 버릇없이 기어오르기만 한다... 언제부터인가 어머니와 자식이 거만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가정이 이 사회에 자리잡아버렸다... 여자, 어린이 중심의 가정이란, 결국 심판이 없어진 게임과 같다."  

 

 아직 놀라기엔 이르다. 기타노 다케시 자신이 중의원선거에 입후보했다고 가정하고 내놓은 공약들을 보자. 

 

"여자와 학생의 선거권을 박탈하겠습니다!"

"의무교육은 초등학교까지, 중학교 이상은 사립화!"

"노인복지제 폐지! 지방자치도 없애겠습니다!"

"유엔을 탈퇴하겠습니다!"

"소비세를 15%로, 소득세는 0에 가깝게 만들겠습니다!"

"매춘방지법 철폐! 도박 허가!"

"헌법개정! 징병제 실시!"

"평소 지론인 징병제와 결합해, 17세가 되면 자위대에 입대하도록 의무화하는 것도 좋습니다. 자위대에 '17세 부대'를 만들어, 그린베레처럼 최전선에 보냅니다."

 

 몇몇 주장들을 보면, 월간 조선의 조갑제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제 아무리 지만원이라도, 이렇게 까진 말 못할 거다. 완전 막가는 군국주의와 마초이즘 앞에 '이 다케시가 그 다케시가 맞나?'싶을 정도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다케시는 그리 만만한 인간이 아니다. 중의원 선거에 나왔다고 가정하고 적은 연설문을 보면(어이없게도 연설문 제목이 '낙선확실선거연설'이다), 끝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제가 당선되자마자 실행하고 싶은 최대의 공약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 해산'입니다. 더 이상 이 나라에 밝은 미래가 없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제가 총리가 되면, 국회에서 일본의 해산을 선언하려 합니다. 국민들은 난민 자격으로 외국으로 도망가게 할 작정입니다. 국민 여러분, 일본국 해산에 찬동하시는 분은 부디......, 아니, 벌써 다들 해산하는 겁니까?"

 

 다케시의 전략은 한 마디로, '위악(僞惡)으로 위선(僞善)을 까발리자'는 것. 적나라한 본심을 확 들추어 내, 현대인들이 걸치고 있는 '문명'이라는 옷이 얼마나 위선과 기만 투성이인지를 폭로하겠다는 거다. 그러므로 그의 칼끝이 궁극적으로 겨누는 곳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좌' 속에 잠복해 있는 위선과, '우' 속에 똬리 틀고 있는 기만, 그리고 양쪽 모두에 암세포처럼 기생하는 '경직성'이 바로 그의 진짜 적이다. 

 

 이쯤 되니까, 떠오르는 사람이 한 사람 있다. 바로 얼마 전, 북한 미사일 경축 발언으로 보수단체로부터 고발당한 신해철이다. 학원 광고 건으로 수많은 네티즌들을 아고라로 모여들게 했던 게 불과 한 두 달 전의 일이다. 논란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보란 듯이 또 한 건 했다. 물론, 발언 내용 자체에 문제 삼을 만한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건, 내용 자체의 시시비비가 아니다.

 

그보다는 그런 의견까지도 수용할 수 있는 여유와 소양이 이 사회에 있는가를 되묻는 것이다. 신해철의 발언은 이를 환기시키기 위한 일종의 수사학이자, 개콘식 퍼포먼스다. 답답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안 될 정도로,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이 사회에 뼈 있는 조크를 한 마디 날린 거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느끼는 건, 자의든, 타의든 간에 신해철이 남한 땅에서 매우 독특한 영역을 개척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영역이란 바로 독설가의 영역이다.

 

 요즘 흘러나오는 주장들 중 상당수는 그 주장을 제기한 자가 붙잡고 있는 '라인'에 따라 '패턴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북한 인권에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들의 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대부분 뉴라이트 같은 극보수단체 회원들이고, 특목고 설립이나 일제고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무조건 전교조 소속일 거라고 단정 짓게 되는 건,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자율적인 사고와 판단 이전에 자신이 속해 있는 '라인'의 입장과 강령이 먼저 자리 잡을 때, 상상력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경직된 파시스트들이 대량 복제된다. 좌나 우, 어디든 마찬가지다. 그런 위험한 경직성을 제거하고 도려내는 역할을 하는 게 바로 독설가란 존재다. 기타노 다케시나 신해철 같은 독설가들의 존재는 그래서 유의미하다.

2009.05.02 12:42 ⓒ 2009 OhmyNews

기타노 다케시의 위험한 일본학

기타노 다케시 지음, 김영희 옮김,
씨네21북스, 2009


#기타노 다케시 #신해철 #위험한 일본학 #씨네21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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