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에는 아버지의 냄새가 숨어 있습니다

꼬깃 접은 돈을 놓고 돌아서던 아버지, 그립습니다

등록 2009.05.06 22:11수정 2009.05.0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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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오래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꼬깃 접은 돈을 놓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냄새가 숨어 있습니다.

오래 되었습니다 이 책에는 꼬깃 접은 돈을 놓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냄새가 숨어 있습니다. ⓒ 김관숙


진달래가 피는 봄이면 늘 그랬듯이 나는 또 아버지의 모습과 함께 소월의 시집인 '진달래꽃' 그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 책은 오랜 세월 동안 나의 애틋한 추억을 열어주는 무엇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작은 책장문을 열면 그 책이 가장 먼저 보이고는 합니다.


그 책에는 아버지의 냄새가 배여 있습니다. 아버지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여 돈을 꺼내어 줄 때 풍겨나던 은은한 담배향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어쩌다 보이던 순한 웃음도 숨어 있고 유난히 크고 검은 눈빛도 손가락 마디가 굵은 큰 손 모양도 그리고 아침에 긴 골목길을 걸어 나가시던 가는 빗소리처럼 점점 멀어져 가는 구둣발자국 소리도 그 책에는 숨어 있습니다.

무뚝뚝한 표정에 가끔은 순하게 웃으시던 아버지

봄방학을 하던 날 저녁에 퇴근해 오신 아버지 앞에 성적표를 내놓았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는 성적표는 보지도 않고 단발머리에 까무잡잡한 내 얼굴만을 보면서 딱딱한 어조로 물으셨습니다.

"등수가 어찌 되냐, 앞에서 가까우냐, 뒤에서 가까우냐?"
"뒤에서요."

나는 조금 뻔뻔할 정도로 냉큼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얼굴이 천천히 풀어지셨습니다. 순하게 웃으셨던 것입니다. 뒤에서 가까운 등수를 해놓고도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는 어린 딸이 어이가 없으셨나 봅니다. 아니면 공부는 못해도 기죽지 않은 모습이 다행이다 싶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는 하얀 성적표를 펴보지도 않고 그냥 도로 내 앞으로 밀어 놓았습니다. 순간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보게 되었습니다. 한 겨울도 아닌데 손등이 튼 것 같이 거칠었고 긴 손가락의 마디는 불거지듯이 굵었습니다.

나는 슬며시 머리를 숙였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얀 백묵으로 칠판에 글을 쓰는 희고 매끈한 선생님의 손과는 비교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철공장은 6·25가 지나간 후라 일감이 그리 많지가 않았습니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서울거리는 복구 작업이 한창이었습니다. 그래도 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기름때가 묻은 아버지의 일복을 빨래판에 대고 벅벅 빨아서는 밀가루 풀을 먹여 햇볕 쨍한 줄에 널었다가는 정성스레 손질을 하고 숯불 다림질을 해서 예쁘게 개켜 놓고는 했습니다.

"근데 아버지, 내 짝은 등수가 중간인데 '삼국지' '흙' 그런 책 몰라요. '나관중'도 몰라요. '로미오와 줄리엣'은 알아요. 난 '5대 비극' 다 아는데."
"그래도 인마…."

말 없이 책상 위에 돈을 놓고 돌아섰습니다

나는 얼핏 아버지의 말을 자르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동생들 씻기고 숙제 봐줘야죠, 준비물 챙겨줘야죠, 거 끝나면 울보 막내 업어 재워야죠, 내 숙제 해야죠, 삼국지는 한밤중에 읽어요."

유난히 큰 아버지의 검은 눈빛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습니다. 맏이인 내가 안쓰러웠던 것입니다. 그뿐 아버지는 더는 말이 없으셨습니다.

어머니가 밥상을 들여오자 나는 성적표를 집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돌아서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내 짝이 '진달래꽃' 시집 지 언니가 줬다고 자랑하던데. 나도 갖고 싶은데…." 그러자 어머니가 밥상을 내려놓고는 내 머리에 알밤을 콩 먹이며 말했습니다. "으이구 이 철딱서니 없는 것…." 하긴 밥상에는 우거지 된장국과 배추김치 무말랭이장아찌 꽁치조림만이 덜렁 놓여 있었습니다.

밤에 알전구 불빛 아래서 숙제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왔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책상 위에 꼬깃 접은 돈을 놓고 돌아섰습니다. 은은한 담배 냄새가 맡아졌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은 성적은 부진해도 책 읽기를 좋아해서 다행이다, 고맙다라는 무언이 어려 있었습니다.

나는 다음날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광화문 숭문사에 들려 시집 진달래꽃을 샀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던지 전차 타는 것도 잊어먹고 몇 정류장이나 되는 거리를 뛰다시피 걸어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꾸중 한 번 못 하고... 아,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a   어린 시절부터 곱게 보았어도 세월이 피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곱게 보았어도 세월이 피었습니다. ⓒ 김관숙


a 진달래꽃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슬픔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

진달래꽃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슬픔이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 ⓒ 김관숙


돌아보면 그때 아버지는 독서 그만하고 공부 좀 하라는 말을 한 번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아마도 만만찮은 내 독서량이 내 부진한 학교 성적을 어느 정도 메워준다고 생각을 하신 것 같았습니다. 어린 나는 그냥 소설들이 재미있고 또 읽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귀에 안 들릴 정도로 즐겁고 행복했을 뿐인데 그래서 자꾸 도서실에서 빌려다가 읽었을 뿐인데 아버지는 책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이나 지혜 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그런데 나는 아버지의 그 깊은 마음을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내 자식들이 성적이 부진하면 화가 났습니다. 자식들이 게임방에 드나들고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탐독하면서 성적이 떨어질 때였습니다. 나는 독서보다 학교 공부가 먼저라면서 버럭 화를 내고 나무라고 그러다가 돌아서서는 눈시울을 적시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학교 성적이 부진해질 정도로 독서에 빠진 어린 딸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어린 딸이 상처를 받을까봐 꾸중 한 번 못 하고 인내하고 아, 얼마나 힘이 드셨을까.

서정시 진달래꽃은 188면에 있습니다. 이제는 누렇게 바래져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모서리가 바스라질 것만 같습니다. 시를 가만히 읊조릴 때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느껴집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이제는 진달래꽃이라는 제목만을 생각해도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슬픔이 내 가슴 속으로 들어와 잠시 눈을 감고 있게 합니다.

그렇게 잠시 눈을 감고 있다 보면 말 없이 책상 위에 꼬깃 접은 돈을 놓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냄새를 맡게 됩니다. 순한 웃음도 손가락 마디가 굵은 큰 손 모양도 보입니다. 골목을 걸어나가시는 구두 발자국 소리도 들려옵니다.

내 자식들도 어렸을 때부터 독서를 좋아했습니다. 삼십 후반인 지금도 아들애 방은 책들로 빙 둘러져 있습니다. 나는 문득 생각합니다. 그 많은 책들 중에 아들애가 나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아니면 나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책이 하나쯤 있었으면…. 
#진달래꽃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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