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락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 - 제1회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1)

등록 2009.05.07 10:15수정 2009.05.13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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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이상락의 성장소설 <하늘을 나는 돛단배>를 오늘부터 연재합니다. 이 소설은 1954년생인 작가가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후반까지 남해안 낙도(전남 완도군 생일도)에서 겪었던 10여 년간의 성장통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편집자말]
 나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맨 처음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알지 못 한다. 말 이전에, 여느 아이들처럼 웃거나 울거나 혹은 옹알거리거나 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나 옹알이 속에, 이미 세속 언어의 훈련이 된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 하는 제 가끔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가정할 때, 어머니의 자궁을 박차고 나와 내가 처음으로 내지른 외마디 울음이나 웅얼거림은 온갖 불평의 의미들로 가득 차 있었을 터이다. 아무리 시간과 공간을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지만, 하필이면 화약 냄새 덜 가신 '에므왕(M₁)' 탄피가 도처에 나뒹구는 1954년 2월에 세상 공기를 처음 마시게 된 운명은 무엇이며, 거기 더하여 저기 저 아랫녘 다도해에 오똑 솟아있는 생일도라는 외진 섬의 한 가난한 집을 출생지로 삼을 게 또 무어란 말인가? 

어른들은 몰랐겠으나 아마도 어머니의 자궁 밖으로 처음 고개를 내밀고 상황파악을 하고나서 내가 울음소리에 버무려 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런 불평이 아니었을까?


'에이, 이게 뭐야, 도로 들어갔다가 뒷날을 기약할 수도 없고…'

그러나 내 출생 환경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은 사내아이와 딸아이를 연년생으로 얻었는데 안타깝게도 세 살과 두 살 되던 해에 홍역을 앓다가 한꺼번에 죽었다. 호적에 이름자를 올리기도 전이었다. 이후 작심하고 다시 아이를 생산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그 아이는 부모님을 적잖이 실망시켰다. 딸이었던 것이다. 지금의 내 누이인 이선자가 바로 그 실망덩어리였다. 

그 딸이 네 살이 될 때까지 태기가 없었다. 그러다 여섯 살 째 되던 해에 내가 고추를 달고 태어났으니 야구경기로 치자면 적시타였다. 적어도 나는 남해안 생일도의 이제해(李濟海)씨 집안에서는 각광을 한 몸에 받으면서 탄생했던 것이다. 물론 이후로 아들만 줄줄이 다섯을 더 낳는 바람에 희소가치는커녕 헐값이 되고 말았지만.

인간이 어른이 된 이후에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자신의 모습이 보편적으로 몇 살 때인지 나는 알지 못 한다. 그런데 내 기억의 창고 맨 밑바닥 켜에 놓여 있는 것들은 한결같이 내가 여섯 살이던 1959년의 모습들이다. 그 해에 내 둘째 동생 선유가 태어났고, 사라호 광풍이 남해안을 휘젓고 지나갔으며, 우리는 살던 집을 남에게 넘기고 그 집 바로 아래에 터를 다듬어 새로운 초가집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유년의 기억을 더듬을 때면 코흘리개 꼬마 아이 뒤편의 풍경이 윗집과 아랫집으로 나뉘어 나타나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의 일들이 내 기억 속에서 '모습'보다는 '소리'로 되살아난다는 점이다.

내가 이선호라는 내 이름을 자각했을 때 우리 집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와 다섯 살 위의 누이 선자와 그리고 바로 아래 동생 선길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가 스스로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이미 기존의 환경으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둘째동생 선유의 탄생은 내게, 산통(産痛)에 겨워 내지르던 어머니의 신음으로 기억된다.

"선자야, 선호야, 얼릉 내건네 지름집에 가서 느그 아부지 조깐 데꼬 오란 말다. 느그 엄니 죽는 꼴 볼래?"


음력 칠월 스무 날. 어머니는 마당의 싸리나무를 붙들고 끙끙, 된 신음을 토하면서 누나와 나에게 아버지를 불러오라 했다. 당시 마을 이장을 맡아보던 아버지는 이웃마을로, 아니면 면 소재지가 있는 평일도로 나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는 날이 드물었다. 내(川) 건너 기름 짜는 집은 술도가를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가 틀림없이 거기서 늦도록 술을 마시거나 화투를 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엄니가 겁나게 아픈 것 같은디…아부지 찾으러 가자."

나는 마당의 싸리나무를 옮겨 잡아가며 내지르는 어머니의 신음소리에 겁이 나서 누나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누나가 겁나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시방 달도 안 떠서 사방이 캄캄한디 지름집까지 어치케 가자고 그래. 도깨비들이 우리를 가만 둘 것 같으냐?"

아마도 '도깨비'라는 말을 처음 들은 것이 그 때였을 것이다. 밤길을 걸을 때 도깨비 혹은 귀신에 대해 무서움을 타는 사람은 주로 윗사람이고, 동행한 아랫사람은 윗사람이 의지처가 되어주는 바람에 두려움이 덜 하다는 것은 나중에야 터득한 사실이었다. 

어머니의 신음이 더 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어두운 골목길을 더듬어 걸을 엄두를 내지 못 했다. 결국 쪼그라진 하현달이 봉도리 산봉 위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에야 사립을 나서 돌담 사이로 난 고샅길로 나왔다. 평소 눈감고도 내달릴 만큼 익숙한 길인데다 달까지 떠올라 넘어질 염려가 없었는데도 누나의 발걸음은 마치 싸리 울타리에 앉은 된장 잠자리를 잡으러 다가갈 때처럼 조심스러워 보였다.

"쩌그 저것 말이여. 도, 도깨비…"

마을 공동우물을 막 지나서 윤철이네 밭 축대 아랫길로 들어섰을 즈음에 누나가 오른편 길가 쪽을 가리키며 기겁을 했다. 나는 그 때 처음으로 도깨비를 보았다. 키가 아주 작은 그 괴이한 녀석들은 가랑이를 벌린 채로 길가 밭 둔덕을 따라 줄지어 서서는 우리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은 누나가 온몸을 떨며 두려워하는 그 도깨비라는 녀석들이 무섭기는커녕 다가가 만져보고 싶을 만큼 내겐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누나가 제 자리에서 자박거리더니 내 팔을 잡아끌었다.

"우, 우리…기냥 집에 가자."
"엄니가 많이 아픙께 아부지를 데꼬 거야 할 것인디…"
"지름집에 갔는디 아부지가 거그 없드라고 하면 되제."
"알었어."

아마도 내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해본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아버지는 그 밤에 기름집에 있지 않았으니 우리가 온통 거짓을 말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웃마을 용출리에 갔다가 그 마을 이장과 술판을 벌였던 아버지는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그 때까지 어머니는 방문 돌쩌귀를 잡고 신음하다가 토방마루로, 거기서 다시 마당으로 내려가서 싸리나무를 붙들고 모진 산통을 신음으로 뱉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담에 절대로 애기 안 낳을 것이여."

내가 말했고,

"비잉신. 남자는 원래 애기 안 낳는 것이여."

누나가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남자가 아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었으나 어머니가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기뻐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방안의 윗목에 항아리를 놓고 거기에 쌀을 담았다. 시렁에 있던 마른 미역을 내려서는 그 가닥들을 항아리 가장자리에 걸친 다음 두 손을 싹싹 비벼댔다.

"지왕님, 지발덕분에 순산하게 해주십사. 이렇게 빌고 또 비나이다. 순산하게 해주십사."
나는 '순산'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 했으나 어머니가 더는 아파하지 않고 아기를 낳게 해달라는 뜻일 거라고 짐작했다. 아버지는 두 손을 비벼가며 쌀독을 향해 빌고 있었으나 눈길은 그 항아리 너머의 어딘가를 바라보는 듯 보였다. 그 방에는 어머니와 누나와 나와 내 바로 아래 동생인 선길이가 있을 뿐이었는데 아버지는 두 손을 연신 비비면서 우리 식구 중 누구도 아닌 지왕님을 찾고 있었다. 가끔씩 드물게 부처님을 부르기도 했다. 지왕님이나 부처님이 우리 식구가 아닌 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방문을 열고 나가 밖에서 찾아봐야 할 터인데…. 바로 그 때였다.

"으앙!"

어머니 가랑이 사이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터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기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안투(태)를 마저 낳게 해달라고 빌었다. 내가 지왕님이나 부처님이라면 이것저것 자꾸 보채는 아버지가 귀찮아서 짜증이 날 법도 하건만, 눈에 보이지 않은 그 절대자는 한정 없이 마음이 너그러웠던 모양으로, 어머니는 이내 아기 말고도 안투라는 요상한 속살덩어리를 결국 순산하였다.

어쨌든 나는 둘째동생의 탄생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목격하였다. 같은 어머니 뱃속에 있다가 또한 같은 집에서 세상에 나왔으니 그것은 나의 탄생과정이기도 했다. 결국 나는 여섯 살의 나이에 내 자신이 태어나는 모습을 지켜본 셈이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나는 우물가로 내달렸다. 간밤에 우리의 밤길을 자박거리게 했던 그 도깨비들이 아직도 거기 있는지 확인하러 갔던 것인데 허망하게도 그것들은 참깨를 베어서 묶은 다음에 세 갈래로 가랑이를 만들어 세워둔 깨 다발들이었다.

삼칠일째 되던 날 저녁, 아버지는 안투를 담은 항아리를 들고 아래쪽 밭 언덕으로 행했다. 나도 따라 나섰다. 땅을 파고 안투를 묻고 돌아오면서 아버지가 말했다.

"안투 묻고 집에 올 때 뒤를 돌아보면 못 쓰니라. 절대로 돌아보면 안 돼."
"돌아보면 어치케 된다우?"
"애기가 나중에 커서 무섬탐을 징하게 한단 말이여. 그랑께 돌아보지 말어, 이?"
"야아."

대답은 그러마고 했으나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나니 뒤꼭지가 스멀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집 사립 쪽 남새밭 어귀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일부러 걸음을 늦추어 아버지 뒤로 쳐진 다음에, 몰래 재빨리 뒤를 돌아보고 말았다. 아버지가 하지 말라는 일을 처음으로 은밀하게 해치운 것이었는데 한편 두려우면서도 기분이 생각보다 통쾌하였다. '선유'라는 이름을 얻은 그 아이가 훗날 무섬탐을 심하게 한다 한들 내가 의젓하게 감싸주면 될 것 아니겠는가. 

선유를 해산할 때 어머니가 산통을 이기지 못해 내지르던 신음소리가 내 유년의 기억 창고 맨 밑바닥에 있는 괴로운 소리였다면, 그해 9월에 경험했던 두 번째 소리는 공포의 그것이었다.

바람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마당에 있던 양은 세숫대야가 변소 지붕을 훌쩍 넘어서 돌담 밖으로 날아갔다. 마을 들머리의 팽나무 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맹수의 포효처럼 귓전을 때렸다. 평소 토방마루에 누워 있노라면 바닷가에서 들려오는 물결소리가 자장가인 듯 은은하고도 아련하였다. 그런데 이때는 달랐다. 밀려온 물결에 갯자갈이 끌려 내려가는 소리부터가 여느 때와 달리 길고도 요란하였다. 갯돌이 바다 쪽으로 끌려 나가는 소리가 요란하고 그 시간이 길수록 다음 차례로 밀려오는 파도의 높이와 파괴력이 강하다는 사실이야 나중에 관찰하여 알아낸 것이지만, 바다 역시 마음이 괴로우면 어머니가 동생을 낳을 때처럼 울부짖는다는 사실을 나는 여섯 살이던 그 때에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라디오를 들어봉께 사라호라든가 뭣이라든가, 이번 태풍이 겁나게 무서운 놈이라는디 큰일이구먼, 큰일이여."

아버지는 동각에서 돌아오자마자 볏짚 한 단을 풀어서는 아랫도리의 검불을 대충 훑어낸 다음, 물에 담가 불릴 새도 없이 방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새끼를 꼬기 시작하였다. 아버지를 따라 동네 사랑방에 놀러갔다가 어른들의 새끼 꼬는 소리를 들으며 가물가물 잠에 떨어진 적이 여러 번이었으므로 그 역시 내겐 듣기 좋은 자장가였다. 간추린 짚단에서 볏짚 두세 올을 뽑아 보충하고서 사각 사각 사각…두 손바닥을 천장으로 치올리며 일고여덟 번쯤 비벼 꼰 다음에 엉덩이를 들썩, 하고서는 똥구멍에서 새끼를 뒤로 뽑아내는 모습에 나는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태풍을 만난 아버지의 새끼 꼬기 작업은 여느 때와 달리 거칠고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버지는 볏짚을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 손아귀 안에 가두고선 사각사각이 아니라 쉐쉐쉐쉐…거친 소리를 내며 허겁지겁 비벼 올렸다.

"샌나꾸를 꽈서 뭣 할라고 그라요?"

나는 아버지가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를 잘 맞춰서 새끼줄을 당겨 뽑으면서 궁금해서 그렇게 물었다. 어머니가 대신 대답했다.

"태풍이 불어서 지붕이 다 날어가게 생겼응께 샌나꾸로 눌러 맬라고 그라제. 너는 아랫목에 가서 잠이나 자."

나는 잠이 오지 않았으나 하는 수 없이 잠들어 있는 선길이 옆에 몸을 뉘었다. 그러나 결국 그날 밤 난 잠을 자지 못 했다. 바람소리에 이어서 세차게 빗방울이 쏟아졌고 급기야 그 빗물이 방안으로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이고, 이걸 어째사 쓰까이. 선호야, 얼릉 정지에 가서 아무 그럭이나 조깐 갖고 온나이. 얼릉!"

어머니는 내게 부엌에 가서 빗물 받을 그릇을 가져오라 했는데 나는 가져오라는 그릇의 용도를 몰랐으므로 놋주발 한 개를 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가 타박만 듣고 말았다.

드디어 아버지가 새끼줄을 사려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 나도 따라 나갔다. 비록 여섯 살이었지만 장남이었으므로 가정이 위기에 처한 상황을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토방마루를 내려 선 순간 비바람에 몸이 날릴 것 같았으므로, 난 돌담을 넘어 날아간 세숫대야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기둥을 단단히 부여안았다. 그러면서 투덜거렸다.

'아부지는 참 멍충하당께. 지왕님이나 부처님한테 우리 집 지붕 안 날어가게 해주십사, 방안에 빗물 안 떨어지게 해주십사, 그렇게 빌면 될 것을 가지고…'

덧붙이는 글 | 소설가 이상락은 1985년 장편 <난지도의 딸>(실천문학)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동냥치 별>, 장편<누더기 시인의 사랑> <광대선언> <고강동 사람들> <차표 한 장>, 소년소설<누가 호루라기를 불어줄까> 등을 발간했다.


덧붙이는 글 소설가 이상락은 1985년 장편 <난지도의 딸>(실천문학)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창작집<동냥치 별>, 장편<누더기 시인의 사랑> <광대선언> <고강동 사람들> <차표 한 장>, 소년소설<누가 호루라기를 불어줄까> 등을 발간했다.
#이상락 #성장소설 #돛단배 #생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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