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사람] '잔류파'와 '남하파'의 뒤바뀐 운명

[김갑수 한국전쟁 역사팩션 45회] 대한민국

등록 2009.05.07 11:41수정 2009.05.07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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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도착한 김성식은 지난 번 교수회의에서 '깨끗한 몸, 더러운 몸' 운운하던 김선기가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았다. 김선기는 문교부에 가서 드잡이를 하여 선배 심사위원을 갈아 내꼰지도록 만들었다. 그러고는 자기가 심사위원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마치 수사기관의 권력자인 양 어깻짓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김성식은 그의 꼴이 보기 싫어 학교마저 정나미가 떨어졌다.

 

인민공화국 때와 마찬가지로 교직원은 무조건 매일 출근하여 출근부에 도장을 찍으라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써서 제출하라는 서류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동태보고서니 경력조사서니 하는 것들이었다. 더욱이 오늘 중으로 써서 제출하지 않으면 심사에서 제외된다는 위협성 발언이 으레 뒤따랐다. 인민공화국 심사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는 김성식은 그런 요구들을 아니꼽다고 해서 마냥 외면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이것저것 다 때려치우고 집에서 농사나 지을까 하는 생각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렇게 섣불리 굴 일도 아니었다. 만약 직장에서 튕겨 나오면 별의별 것들이 나타나 적색분자니 부역자니 하며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럽고 분통터지더라도 눈 딱 감고 참아내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인간적 가치가 절하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굴욕을 참는 일이 타성화되면 늘그막에는 대체 무엇이 될까 하는 위구심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사표(師表)를 저버리고 무슨 낯으로 교단에 설 수 있겠는가? 그는 어제 낮 집에 군인이 총을 메고 와서 주인은 무엇 하는 사람이며 지금은 어딜 갔느냐고 물으며 으르대다 간 사실을 생각하면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뎌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는 학교에서 요구하는 서류들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교직원 경력조사서 3통, 신 경력조사서 1통, 공무원 동태조사서 5통을 작성하느라 한 나절을 소비했다. 특히 동태조사서는 사람의 지능으로는 기억하기 어려운 것들까지 적으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공무원 동태조사서

 

부, 국, 과명

직위, 직명

연령, 주소, 성명

 

1. 자치위원회 관계: 가입연월일, 담당 사무, 출근 일수

2. 괴뢰기관에의 협력사항: 채용 연월일, 지위, 담당업무, 월별 출근일수

3. 정당 단체의 가입 상태: 당명 또는 단체명, 가입 연월일, 소개자 또는 권유자 성명

4. 자수서 제출 상황: 제출 연월일, 제출 기관, 소개자 또는 권유자 성명

5. 기타 참고사항 (500자 이상 적을 것)

 

도망쳤다 돌아온 자들의 횡포

 

대한민국의 세상이 되며 새로이 부각된 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남하'라는 단어였다. 인민공화국 시절 '계속 남진 중'이란 말이 웃음거리로 유행했었는데, 그때 도망갔다는 의미를 가진 '남하'가 이제는 세도가 당당한 말로 둔갑되어 있었다. 인민군이 몰려 왔을 때, 남하하지 않은 사람은 빨갱이거나 부역자거나 잠재적 협력자이고, 남하한 사람만이 흠결 없는 애국자라는 흑백논리가 조장되고 있었다.

 

김성식은 어이가 없었다. 지난 6월 27일 "우리는 중앙청에서 평상시와 다름없이 근무하고 있으며, 우리 군은 도처에서 적을 격파하여 의정부를 탈환하고 해주로 진격하고 있으니, 시민은 안심하고 직장을 사수하라"고 목이 메도록 방송하는 사이 정부 여당은 몰래 '남하'했다. 눈치 빠른 사람은 약삭스럽게 피난하여 정처 없이 가다 보니 대구, 부산에서 정부와 함께 '남하'한 사람이 되었다.

 

김성식의 동네에서는 상복이 외삼촌처럼 눈이 굵고 겁이 많아 일찍 서둘러 '남하'의 계열에 들어선 사람도 있고, 또 명순네처럼 포성을 듣고는 허파가 뒤집혀 젖먹이를 포함한 아이 넷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남하'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 시민의 99%는 어리석고 멍청하여 정부의 말을 듣고 직장과 가정을 사수하다가, 갑자기 인민군을 맞이하여 90일 동안 굶주리며 천대받고 천행으로 목숨을 건져 국군과 유엔군을 환영해 주니, 이제 와서 남하했던 세력들이 나타나, 정부와 행동을 같이 한 우리는 애국자이고 남은 너희들은 불온한 사람들이라고 핍박하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고생하셨소? 우리만 피난하여 미안하오."

 

이런 말까지는 바라지도 않더라도, 심사니 동태 파악이니 해 가며 구원(舊怨)을 풀거나 경쟁자를 몰아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남하파들이 김성식은 저주스러웠다.

 

그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발발 후 가장 신속히 피난 짐을 꾸린 사람들은 정부 여당 관리, 경찰, 대한청년단 간부, 면서기, 지주, 친일경력자, 미군정 참여자들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을 살던 죄수 중에서도 우익을 골라 구출하는 기민성을 보였다. 김구 살해범 안두희도 이때 구출되어 남하했다.

 

물론 잔류자 중에는 좌익도 있었을 것이고 기회주의적인 사람도 많았을 터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던 지식인층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서울에 남은 것이었다. 일단 정부가 후퇴하는 것을 몰랐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알았더라도 그들은 잔류를 택했을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산주의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 정부에도 탐탁한 마음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존립에 목숨을 걸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세상이 바뀌더라도 그리 두려울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돌아온 이승만정부에 의해 기회주의적인 눈치보기 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게다가 잔류인 중에는 진정한 애국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공직자 또는 지식인으로 서, 비겁하게 도망치기보다는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잔류한 사람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중도 우익 성향의 사람들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국민을 내버리고 남하하여 개인의 구명만 꾀하는 비겁한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하며 잔류를 결의했다. 국회의원 조헌영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오늘 오전에 국회를 열어 서울을 사수한다고 해 놓고 내가 어찌 서울을 떠난단 말이냐? 시민들에게 동요하지 말고 서울을 지키라고 해 놓고 내가 어떻게 서울을 버리고 가느냐?"고 거듭 말하며 잔류했다.

 

이승만의 정적 중 하나였던 안재홍은 '피난을 가건 남아 있건 생명의 위협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남아 있다가 납북되었다. 그의 예상이 어느 정도 합리적인 것이었음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으로 입증되었다. 이승만은 전쟁을 기화로 수많은 정적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제거한 것이다.

 

잔류인은 성격상 적극적인 잔류, 고뇌 끝의 잔류, 그리고 불가피한 잔류 등으로 구분될 수 있었다. 또 인민공화국 세상에서는 자진 출두 적극 협력자, 압력과 권유에 의한 출두자, 그리고 강제 연행된 자 등이 있었다. 그러나 자진 출두했다고 해서 그들이 인민공화국과 내통했거나 전쟁을 기다렸다고 볼 수 없으며, 강제 연행 또는 숙청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자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모두 1948년 분단 시점에서 대한민국을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친일 세력과 극우주의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정치적 반대자로 몰았다. 그들로 하여금 대한민국에서 설 자리를 잃게 만든 것이었다.

 

교수들의 주접스러운 대화

 

학교 사무실에 둘러 앉아 교수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른 데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처음에는 집집마다 밀가루 한 포대씩 나눠 준다느니, 쌀을 5홉씩 배급한다느니 하여, 말만 들어도 살 것 같더니, 5홉이 2홉으로 줄고 2홉이 1홉 4작으로 줄고 이제는 그것도 끊어져 버렸네.

 

-미군이 들어오면 밀가루 풀대죽이라도 쑤어 먹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창자가 오그라들어 말하기도 힘드이.

 

-인공국 시절에는 굶어도 악에 받쳐 참았는데 정부 환도 이후엔 마음의 고삐가 늦추어져 그런지 이제는 참아내기가 어렵다오.

 

-젠장, 학교는 한 달 가까이 심사 운운하며 봉급도 배급도 안 주니 추위는 닥쳐오고 이제 굶어죽게 되었나보다.

 

-인공국 시절에 옷가지 등 팔아먹을 것은 다 팔아먹었는데 이제는 뭘로 버틴다?

 

-쌀값이 소두 한 말에 8천원이 넘었으니 우리에게 쌀밥은 꿈에서도 언감생심일세.

 

-나무 한 평에 6만원인데 시내까지 운반비가 또 얹어지니 굶어죽기 전에 얼어 죽을 판인 걸.

 

대학 선생들의 대화치고는 너무 주접스러웠다. 김성식은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덧붙이는 글 |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2009.05.07 11:41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사학자 김성칠 선생의 일기 <역사 앞에서>를 참조한 부분입니다.
#남하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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