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비석 하나의 의미

등록 2009.05.24 16:16수정 2009.08.19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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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서 개혁·진보의 기치를 든 지도자는 살아남기 어려웠다.

장보고·만적·묘청·신돈·정도전·조광조·홍경래·최제우·전봉준·김옥균·김구·조봉암·장준하 등 모두가 참살당하거나 자결로 생을 접었다. 수구세력은 외세에는 빝붙어 강아지노릇을 하면서도 내부의 진보·개혁 세력에는 사납게 물고 찢는 승냥이가 되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보면서 한국 수구세력의 무자비한 권력행사·수구신문들의 몰상식한 보도가 개혁을 지도하다 중절(中絶)한 노무현 전대통령을 끝내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 아닌가 참괴함을 느낀다.

"우리 아이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선언은 수구세력에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선전포고였을 것이다. 외세와 협력하고 불의와 타협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해온 그들에게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도 성공하는' 사회란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는가? 그래서 국민이 뽑은 대통령을 탄핵하고 퇴임 뒤에도 그의 존재와 가치와 기치를 짓밟고 제거하는데 권력·검찰·족벌신문이 하나가 되었다.

가는 자여
당신의 눈은 태양으로 가라
그리고 당신의 기운은
바람 속으로 들어가라
하늘로 땅으로
제게 맡겨 뜻대로 가라
그렇지 않으면
물러가라
그리고 당신의
뜻에 맞거든
육신은 초목으로
갈지어다.

고대 인도의 시<리그베타>의 내용이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면서 당신은 홀연히 떠나갔다. 육신은 태양·바람·하늘·땅·초목으로 돌아갔다. 저들의 바람대로 당신의 존재는 살아졌지만 당신이 추구하던 민주주의와 진보·정의의 가치는 영원히 이땅의 민초들과 함께할 것이다.


나는 이제 가노라
인연을 타고 왔다가
인연이 다하여 가는 것이니
떳떳한 이치라 무엇을 슬퍼하랴.

불현듯 도선선사의 선시 한 대목이 떠오르는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에 나오는 "운명이다"라는 구절 때문이다. 당신은 수구세력이 만든 광폭한 지역주의와 독재의 유제와 싸우다가 '인연'이 다하여 떠나갔다. 명분과 절조와 대의를 위해 모든 것을 던질 줄 아는 힘, 그것이 진정 노무현의 본 모습이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

김구 선생이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을 평생의 지침으로 여겼던 '대장부'의 길이다. 범인들이야 따를 일이 못될 터이지만, 지도자라면 벼랑에 매달려 손을 놓을 줄 아는 장부의 기개가 요구된다고 하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것을 보여 주었다.

나는 에릭 홉스봄의 자서전<미완의 시대>를 읽다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보를 들었다. 이 책의 말미가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는 유언과 맞물려 하염없이 김해 봉하마을 봉화산 부엉이바위를 바라보게 한다.

시대가 아무리 마음에 안 들더라도 아직은 무기를 놓지 말자.
사회의 불의는 여전히 규탄하고 맞서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노무현 #개혁 #작은 비석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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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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