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에 반대해 학생들의 대체수업을 허락한 교사들에게 파면 및 해임 처분 결정이 최종 통보된 가운데 지난해 12월17일 저녁 서울 종로구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촛불 기자회견'에서 전교조 교사, 학부모, 시민단체 회원들이 부당한 징계 철회와 일제고사 거부를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유성호
생을 돌아보면 누구나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말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이다. 내게는 '전교조'가 바로 그런 말이다. 전교조라는 이름 속에는 내 청춘의 온갖 굴곡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1989년 5월 28일, 한양대 앞은 삼엄했다. 교문은 경찰에 의해 물샐 틈조차 없이 막혀 있었고, 전교조 창립 기념식에 참가하려던 교사들은 학교 앞 골목골목에 숨어 있었다.
그때, 누군가 지나가며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시장으로 가세요. 시장으로 바뀌었습니다."시장은 신촌 시장을 의미하는 암호였고, 신촌 시장은 연세대를 뜻하는 말이었다. 급하게 지하철로 이동한 연세대에는 아직 비밀이 새지 않았는지, 막는 경찰이 하나도 없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 출동한 경찰을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뛰어나와 막아주는 사이, 전교조 창립 선언문이 낭독되었다.
"겨레의 교육 성업을 수임 받은 우리 전국의 40만 교직원은 오늘 역사적인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결성을 선포한다. 오늘의 이 쾌거는 학생, 학부모와 함께 우리 교직원이 교육의 주체로 우뚝 서겠다는 엄숙한 선언이며 민족 민주 인간화 교육 실천을 위한 참교육 운동을 더욱 뜨겁게 전개해 나가겠다는 굳은 의지를 민족과 역사 앞에 밝히는 것이다."그날, 5월의 햇살은 따가웠다. 그러나 전교조의 출발은 늘 햇살 빛나는 나날이 아니었다. 이제는 기억을 되살리면 가슴 한 편이 아련해지는 수많은 일들이 그 이후에 일어났다. 굴비처럼 엮여 끌려가던 교사들이 있었고, 가입 교사에 대한 대대적 압박과 그에 뒤이은 해직 사태, 조직에 대한 탄압과 여론몰이식 매도가 그 당시 우리 앞에 놓인 정권의 무기들이었다. 나도 그해 해직된 교사들 중 한 명이었다.
20년 전... 해직됐지만 그래도 행복한 시절이었다그러나 돌아보면 내게 그때는 오히려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길거리 시위에서 만난 제자들은 휴지를 건네주고, 함께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밤새도록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에 대한 열망 가득한 토론을 나누던 그 시절의 제자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가혹한 탄압이 있었지만,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함께 길을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더없이 행복했다. 맞서야 할 분명한 상대가 있고, 바꾸어야 할 분명한 교육 현실이 존재하기 때문에, 행동에는 오히려 망설임이나 고뇌가 필요하지 않았다.
머리를 맞대고 교육 선전 자료를 만들고, 공동수업이나 주제 분과 자료 제작을 위해 하루 종일 원고를 쓴 뒤 밤에는 다시 기획사와 인쇄소를 쫓아다니며 교정을 봐야 했지만, 이 일이 학교를 바꾸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당당했다.
한 달에 십여 만원의, 현장 교사들이 피땀으로 모아 준 생계비로 견디면서도, 열정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그 청춘의 시절은 이제 그리움으로 남았다.
그 그리움의 시절로부터 벌써 스무 해가 흘렀다. 그리고 여전히 오늘도 오월의 햇살은 따갑다. 스물이면 인간으로 치면 성년이 되는 나이다. 그런데, 청춘의 시간을 온전히 다 바쳐 일궈낸 전교조의 성년식이 마냥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은 것은 왜일까? 가장 혈기 왕성한 나이에 나 자신의 전부를 바쳤던 조직이 어른이 되는 날, 오히려 가슴이 무겁고 답답해지는 것은, 나 혼자만의 느낌일까?
20년이 지난 지금, 교육의 '공적'(?)이 돼버린 전교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