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고사 관련 해직교사인 정상용(구산초), 김윤주(청운초), 박수영(거원초), 최혜원(길동초), 송용운(선사초), 설은주(유현초), 윤여강(관양중) 교사에 대한 심사가 열린 지난 3월16일 오후 서울 삼청동 교원소청심사위원회앞에서 해직교사들과 전교조 조합원들이 '징계 취소' 결정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권우성
"김OO 선생님이 학교 그만두셨대."
"박OO 선생님은 전근 가셨다는데.""야, 최OO 선생님은 학교에서 잘리셨단다."대학입시를 앞두고 더위에 지친 몸을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며 점수와 씨름하던 고등학교 3학년 여름, 몇몇 선생님들의 거취 문제로 학교는 어수선했다. 바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하 전교조) 가입 교사 1527명 전원이 파면·해임되었던 1989년 7월의 일이다.
전교조에 대한 첫 기억은 힘겹던 고3 시절과 맞물려 있다. 전국교사협의회가 설립된 1987년부터 전교조가 공식 출범한 1989년까지는 정확하게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일치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때 학생들을 참교육 1세대라 부른다.
그 전교조가 지난 5월 28일 창립 20주년과 합법화 10주년을 맞이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고 더욱이 다시는 기억하기 싫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스무 살 청년'이 된 전교조에 대한 바람을 전한다. '참된 교육'을 희망하면서.
당시에 나는 전교조를 제대로 몰랐다. 아니, 입시 공부에 지친 육체를 돌보랴, 점수를 1점이라도 더 올리랴, 다른 것에 관심을 갖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선생님들이 흘린 눈물만큼은 외면할 수 없었다. 선생님들의 절규는 오로지 우리 학생들을 위한 것이었음을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화교육과 참교육을 실천했던 전교조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제자를 위해 오랜 기간 남모르게 점심 값을 쥐어주시던 선생님, 집안의 불상사로 이도저도 못 가던 제자를 위해 티나지 않게 친구의 부모님에게 편의를 봐 주도록 조치해주시던 선생님, 국어 문제 하나 더 푸는 것보다 나이에 맞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며 교과서에는 없는 시 한 편을 칠판 가득 적어주시던 선생님, 고3병을 앓으며 학교 밖에서 방황하는 제자를 찾기 위해 몇 날 며칠 밤거리를 뒤지며 걱정하시던 선생님….
훗날 전교조의 존재를 알았지만, 당시에는 전교조든 아니든 그것은 하등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우리를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던 선생님과 함께 수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뜨거운 청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들 그랬다.
오래도록 내 기억 속에 남아 계신 선생님은 우리의 안녕을 먼저 돌봐주신 진정한 스승이셨다. '민족 민주 인간화교육'을 내걸고 '참교육'을 온몸으로 실천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시던 스승이셨다.
그러나 아무런 힘도 없던 우리들은 정부의 탄압으로부터 끝내 그 선생님들을 지켜내지 못했다. 선생님도 한 인간일진대 사랑하는 제자들이 있는 학교에 발걸음을 놓을 수 없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으셨을까. 그날 이후 '참교육'을 떠올릴 때면 늘 가슴이 먹먹해지곤 했다.
전교조는 1989년 대량 해직 사태를 맞은 이후에도 학교 일선에서 많은 활동을 벌였다. 교육 현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지만 '촌지 안 받기 운동'을 펼치며 학부모들의 지지를 받았고, 교육감과 교장 등 권위주의를 내세우는 기득권 세력에 맞서 '깨끗하고 열린 교육'을 지향하며 학교의 주인은 학생과 교직원임을 분명하게 제시해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한 두발 규제와 체벌의 문제를 학교 공간에서 사회로 끌고 나와 공론화를 시키는 등 학생들의 교육환경을 바꾸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비록 오랫동안 합법 노조로 인정받지 못하며 늘 탄압을 받았어도 국민들과 학부모들이 지지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전교조는 학생들이 맘껏 뛰놀 수 있고 맘 편히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드는 데 최우선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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