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가장 예뻤을 때, 주위 사람들 숱하게 죽었다

공선옥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등록 2009.06.09 09:54수정 2009.06.09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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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가장 예뻤을 때>겉표지

<내가 가장 예뻤을 때>겉표지 ⓒ 문학동네

"공선옥은 우리 시대의 여성작가들 중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5월 광주'를 통찰해온 작가로 알려져 있다. 「씨앗불」「목마른 계절」「목숨」「떠도는 나무」「내 생의 알리바이」등 그의 작품에는 역사적 기호인 5월 광주가 중심 모티프로 출현하고 있으며…" -'억척 어미의 여성성, 가난과 마주하는 문학' 中에서, 양진오(문학평론가)

공선옥은 양진오의 말마따나 우리시대의 여성작가 중에서 특색 있는 뭔가를 그릴 줄 아는 소설가다. 가난으로 만들어진 한국인의 한(恨)은 물론이고 기득권 세력에게 억압받는 민중들의 한(恨)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런 작가가 최근에 장편소설 <내가 가장 예뻤을 때>를 선보였다. 제목만 보면, 과거의 그런 모습과 달리한 소설처럼 보인다. 요즘 유행하는 성장소설 같은 흐름의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소설의 태생을 보더라도 그런 생각이 들 법하다. 이 소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카페에서 연재된 소설이다. 공선옥의 글을 아는 사람이라면 인터넷에 연재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공선옥이 이제껏 보여줬던 문학세계와 흐름을 달리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다.

하지만 막상 책 속으로 들어가면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져버린다. 이 소설 또한 '광주'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목은 왜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인가. 그것은 이바리기 노리코의 시를 보면 알 수 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 나는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 내가 가장 예뻤을 때 / 나는 너무나 불행했고 /  나는 너무나 안절부절 / 나는 더없이 외로웠다"
- 이바라기 노리코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공선옥의 <내가 가장 예뻤을 때>는 5월 광주와 그 전후를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해금이. 순박하고 착한 시골처녀다. 소설을 이끌고 있는 것은 그녀와 친구들인데, 이들은 가장 예쁘다고 불리는 어느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것은 청춘이었다. 그들은 청춘의 뜨거움을 간직한 채 각자 그 시절을 아름답게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그들을 가만두지 않았다. 독재정권과 자본이 민중을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피 흘리는 경애를 안고 목놓아 외쳤다는 수경이.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을 부르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임을 외치는 소리. 그러니까 그것은 너의 슬픔에 내 슬픔이 공명하는 소리. 그리고 수경은 목이 터쳐라 외치다가, 화답 없는 세상에 절망하여 저세상으로 떠났다. 지금, 2번 시다 판님이가 3번 미싱사 경자를 잡아가지 말라 외치는 것은 수경이 경애를 살려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규는 검은 승용차 바닥에 처박혔다. 그렇게 처박힌 채 눈이 가려지고 눈이 가려지고 입이 틀어막히고 수갑이 채워졌다. 악을 쓸 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건물 안으로 끌려들어가자마자, 어디선가 음산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 눈가리개가 풀리고 재갈이 풀리고 수갑이 풀림과 동시에 매질이 시작되었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소설을 읽다가 오늘의 어느 풍경들을 떠올렸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이바리기 노리코의 시의 '나'를 '대한민국'으로 바꿔봤다. 이상하게도 그 시는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대한민국이 가장 예뻤을 때 / 주위 사람들이 숱하게 죽었다 / 공장에서 바다에서 이름도 없는 섬에서 / 대한민국은 멋을 부릴 기회를 잃어버렸다 // (...) 대한민국이 가장 예뻤을 때 / 대만힌국은 너무나 불행했고 /  대한민국은 너무나 안절부절 / 대한민국은 더없이 외로웠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해금이와 친구들은 자주 반문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소설을 보면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 세상을 돌아보면서 나 역시 반문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고. 답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공선옥의 소설에서 답을 구하려 했다. 답은 그들이 그 시절을 이겨내기 위해 했던 그것들에 있었다.

"그래, 영미가 있지. 마영미, 걘 노래를 잘하지. 난 힘으로, 걘 노래로, 그리고 넌 니가 가진 그 무엇으로든, 이 세상을 사랑하자. 이 세상에서 설움받고 핍박받는 서러운 민중들을 위해 우리는 우리 각자가 가진 그 무엇이든 아낌없이 내놓자, 해금아."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정신은 말했다. 상대보다 힘이 세다고, 더 많이 배웠다고, 더 많이 가졌다고, 더 우월하다고 믿는 자들이 부리는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우선은 그 오만과 횡포와 모욕과 폭력과 무례함을 견뎌내야 한다고. 모든 오만한 자들이, 모든 무뢰배들이 스스로 부끄러워할 때까지, 견디고 견뎌서, 그 견디는 힘으로 우리가 아름다워지자고.  (…) 오늘, 저 무뢰배의 오만이 횡행할 수 있는 이 야만의 구조, 이 동물적 상황을 나는 견뎌야 한다. 저항하기 위해 견딜 것. 아름다워지기 위해 지금은 견딜 것."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나 말고 다른 사람 때문에 울 수 있는 사람은 아름답지. 자신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보다 다른 사람의 슬픔 때문에 우는 사람이 많을수록 세상은 좀더 아름다워질 거야."
-<내가 가장 예뻤을 때> 中에서

소설 속 누군가의 말처럼, 빛은 어둠 속에서 나오고 아름다움은 슬픔 속에서 나온다. 행복이라는 것도 고통 뒤에서 나온다. 소설 속의 그들은 그것을 알았을 게다. 또한 소설의 배경이 되던 그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도 그것을 알았을 게다. 그렇기에 그 시절을 견딜 수 있었을 게다. 그것의 중요성을 알 때, 어떤 가능성을 생각하게 된다. 대한민국이 가장 예뻤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억하고 떠올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공선옥의 소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녀의 글에는 세련되지 않고 유려하지 않음에도 가슴을 울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악아, 우지 마라. 사는 것은 죄가 아닌게로 우지를 마라"라는 말이 그렇듯, 한국인의 한(恨)과 우리를 위로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맞을 게다. 그것이 공선옥의 힘이고 <내가 가장 예뻤을 때>의 매력이다.

나아가 '대한민국이 가장 예뻤을 때', 어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에 가슴이 더 먹먹해지는 것일 게다. 공선옥이라는 작가가 계속 소설을 써서 다행이다. 그녀가 없었다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공선옥 지음,
문학동네, 2009


#공선옥 #5월 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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