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엔 볼거리가 없다?

성북동의 간송미술관과 주변의 성곽 및 역사유적

등록 2009.06.12 20:14수정 2009.06.15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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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KBS 라디오를 통해 '서울 문화, 문화인'이란 매 수요일 인터뷰를 담당하고 있어 서울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예술 현장을 뒤지고 있다. 가능하면 발로 뛰면서 역사유적이나 문화현상을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번 주는 영화와 장편소설 그리고 연극계에 불고 있는 '엄마신드롬'을 다루었으며 지난주는 간송미술관 주변 유적지를 방문하면서  서울이란 도시가 세계적으로 몇 번째 가는 큰 도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아름답고 역사적인 유물이 많은 도시라는 점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앞으로 몇 차례 서울 주변의 문화유산들을 현장에서 확인하여 문화탐방기를 올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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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성북동 '간송미술관' 간송미술관의 전경 ⓒ 박태상


처음 택한 곳이 바로 간송미술관이다. 간송(澗松)은 전형필(1906 ~ 1962)의 호이다. 그는 서울에서 출생하여 1926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1929년 일본 와세다대학교 법학부를 마쳤다. 그에게 평생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바로 위창 오세창 선생이다. 위창은 기자 출신으로 갑신정변 때는 일본에 망명하기도 하였고 기미독립선언 때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여 3년간 옥고를 치른 민족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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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 입구 간송미술관과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입구 ⓒ 박태상


 
오세창(1864 ~ 1953)은 애국운동의 일환으로 대한서화협회를 창립하여 예술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서화(書畵)의 감식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있어서 문화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전형필은 오세창의 권유로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우리 민족문화재를 수집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1932년 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翰南書林)을 인수하고, 한국의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사 모으기 시작한다. 1934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수집하고 그가 33세가 되던 1938년에는 자신의 소장품으로 북단장 안에 한국 최초의 사립 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세운다. 이것이 확대되어 1966년에 간송미술관이 되었다.

간송미술관은 한국의 국보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미술관 중의 하나이다. 간송의 문화재 구입은 개인적인 취미이기도 했지만, 민족문화재를 지킨다는 신념에서 출발하였다.  안동에서 2000원이란 큰돈을 주고 산 훈민정음 원본에 관한 일화와 존 개츠비의 소장품인 고려청자의 수집에 대한 일화는 유명하다.

1943년 6월 '훈민정음'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전형필은 당시 집 다섯 채 값에 해당하는 2천 원을 지불하고 입수했다.  한글 탄압을 일삼던 일제가 알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하여 비밀리에 보관하다가 1945년 광복 후에 이를 공개했다. 또 전형필은 전 재산을 털어 일본으로 넘어갈 뻔한 국보급 유물을 구입하였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천학매병(千鶴梅甁)'이란 별칭이 있는데, 한때 이 물건의 주인이었던 일본인 마에다 사이이치로가 붙였다. 원래 새겨진 학은 69마리지만 매병 속 창공을 날아가는 학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백~수천 마리 학이 비상하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 명품은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왔고, 일본인 손을 거쳐 1935년 한국인 수집가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에게 낙점됐다.

당시 간송은 서울에서 반반한 집 열 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을 들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간송의 뜻에 따라 지금도 간송미술관은 봄 ․ 가을 국보급 미술전시회를 개최하면서도 한 번도 입장료를 받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자신이 평생 모은 국보 문화재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라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간송미술관이 있음으로 해서 성북동은 서울의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全鎣弼)이 33세 때 세운 것이다. 1966년 전형필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수장품을 정리·연구하기 위하여 한국민족미술연구소의 부속기관으로 발족되었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화를 비롯해 자기·불상·불구(佛具)·전적(典籍)·와당·전(벽돌) 등 많은 유물들이 있다. 연구소에서는 매년 2회에 걸쳐 논문집 '간송문화(澗松文華)' 발행과 함께 전시회를 열고 있는데, '간송문화'는 1971년 창간되었고 발행된 책자로 '추사명품집(秋史名品集)', '겸재명품집(謙齋名品集)' 등이 있다.

간송미술관은 먼저 입구부터 예사롭지 않다. 성북초등학교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데 고색창연한 붉은 벽돌문에 낡아서 골동품이 된 흰 대리석으로 간송미술관이란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사실 우리는 골동(骨董)이라는 말을 너무 자주 쓴다. 이를테면 인사동 골동품점 등이 그 예이다. 그런데 30년대 말의 유명한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이태준은 골동이란 말을 쓰지 말자고 제안했다.

그 대신  고완(古翫)이란 말을 써야한다고 그의 수필에서  강조했다. 골동이란 말에는 고물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것이다.

고전이라거나 전통이란 것이 오직 보관되는 것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주검이요 무덤의 대명사일 것이다. 우리가 돈과 시간을 드려 자기의 서재를 묘지화 시킬 필요는 없는 것이다.

청년층지식인들이 도자기를 수집하는 것은 고서적을 수집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완상이나 소장욕에 그치지 않고 미술품으로 공예품으로 정당한 현대적 해석을 발견해서 고물(古物) 그것이 주검의 먼지를 털고 새로운 미(美)와 새로운 생명의 불사조가 되게 해주어야할 것이다. 거기에 정말 고완(古翫)의 생활화가 있는 줄 안다.

                                 (이태준, <고완품과 생활>, '문장' 194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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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 전형필선생의 동상 성북동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전형필선생의 동상 ⓒ 박태상


  입구를 지나 고갯길을 약간 올라가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바로 간송 전형필선생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아 준다. 동상 주변에는 많은 석물들과 3층 석탑 등이 이리저리 널려 정원의 수풀 더비 속에서 뒹굴고 있다. 간송이 일제 강점기의 어려운 시절에 집안에 내려오는 전 재산을 털어 우리 문화재를 얼마나 많이 구입했는가를 말해준다.

간송미술관 입구로 가는 길도 예사롭지 않다. 정원 속 우리에는 공작이 자신의 미모를 뽐내며 날개를 펼쳐 보이고 있다. 또 불교문화재인 조각품이 관람객들의 눈을 번뜩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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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미술관의 공작새 간송미술관 정원에 있는 공작새 ⓒ 박태상


간송미술관은 올해 겸재 정선의 250주기를 기념하여 겸재 정선미술전을 열었다. 겸재 정선(鄭敾, 1676~1759)은 처음에는 중국 남화(南畵)에서 출발하였으나 30세를 전후하여 조선 산수화(山水畵)의 독자적 특징을 살린 사생(寫生)의 진경화(眞景畵)로 전환하였으며 여행을 즐겨 전국의 명승을 찾아 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다. 심사정·조영석과 함께 삼재(三齋)로 불렸다.

약관에 김창집(金昌集)의 천거로 도화서의 화원(畵員)이 되고 그 뒤 현감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여산초당도(廬山草堂圖)', '여산폭포도(廬山瀑布圖)', '독서여가(讀書餘暇)' 등이 있다. 어린 시절 겸재에게 그림을 배웠던 영조는 줄곧 겸재의 작품 활동을 지원했고, 전국 명승지를 사생한 겸재는 암봉과 토산을 대비시켜 화면 속에서 음양조화를 이뤄낸 특유의 화풍을 창안했다.

간송미술관에서 5월 31일까지 12일간 펼쳐진 겸재전은 구름 같이 몰려든 인파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물론 작년의 20만 명이 몰려든 '미인도'로 유명한 신윤복전(SBS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영향)에 비해서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5만 명 이상이 몰려든 탓에 마감 며칠 전인 화요일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특히 미술품의 손상을 막기 위해 에어컨을 가동하지 않으므로 초여름의 무더위가 관람객들의 이마에 땀방울을 맺게 하였다. 하지만 진지하게 미술품 하나하나를 완상하는 미술애호가들의 발길을 막지는 못했다.

1층은 주로  겸재 정선의 산수화와 화조화를 중심으로 대작들이 걸렸고, 2층은 경재의 화풍을 이어받은 이인상(1710 ~ 1760), 신윤복(2758 ~ ?), 김득신(1754 ~ 1822), 김홍도, 심사정(1707 ~ 1769), 김윤겸(1711 ~ 1775), 김희겸(1710 ~ ?), 이광사(1705 ~ 1777) 등 후배 화가들의 작품 등 40여점 안팎이 걸렸다. 겸재의 70여 점을 비롯하여 총 110점의 국보급 미술품이 전시된 것이다.

탁현규 연구원(미술사 전공)은 올 겸재전의 의미를, "겸재화파전은 우리나라 최초로 겸재와 그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산수화를 동시에 전시한데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이후 화가들과의 비교를 통해 겸재 정선의 진경 산수화의 진가가 드러나게 된 점에 있다"고 미술사적인 가치와 의미에 대해 요약해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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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속에서도 겸재 정선전을 보고 있는 미술애호가들 간송미술관의 입장료는 간송의 유지에 따라 무료이다. 우리 문화유산의 소중함을 더욱 인식하게 한다. ⓒ 박태상


1971년 첫 정기전으로 겸재전을 열었던 간송미술관은 그동안 총 6회의 겸재·진경 산수전 외에 각종 기획전을 통해 겸재 작품을 발표해왔다. 이번 250주기 특별전에선 절경에 은거하며 주경야독하는 조선 선비의 이상향을 표현한 '장삽관폭', 안개비 내리는 한적한 솔숲 마을을 담은 '송촌연우' 등을 처음 선보였다.

전시작 중에는 최완수 연구실장이 겸재 진경산수의 기준작으로 첫 손꼽는 64세 작품 '청풍계', 양현현령 시절 한강을 따라 내려가면서 사생한 '경교명승첩' 및 '사문탈사', '총석정' 등 대상을 단순화시킨 말년의 추상화 같은 작품이나 극사실적 묘사의 세밀화 '계관만추', '추일한묘' 등도 관심을 모았다.

겸재는 유난히 여행을 좋아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수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인왕재색도' '금강전도' 등의 빼어난 그림을 내놓았지만 작품세계가 난만한 경지에 오른 것은 64~70세 때 무렵이었다. 64세 때인 1739년 청운동 일대를 그린 작품 '청풍계'는 분수령을 이룬다.

63세에 그린 <관동명승첩> 중 '해산정' '시중대'와 양천현령으로 재임하면서 1740~41년 한강의 명승지를 그린 <경교명승첩>의 '독백탄' '목멱조돈' 등도 주목할 만하다. 72세 때는 아우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36세 때 그린 금강산을 다시 화제로 삼아 <해악전신첩>을 냈다. 여기 실린 '총석정' '사인암' 등을 보면 30대의 겸재가 금강산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70대의 겸재는 세부를 과감하게 생략하면서 추상의 경지를 향해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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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추일한묘' 정선은 산수화 이외에도 화조도 등을 많이 그렸다. ⓒ 박태상


정선이 그린 그림 중에는 18세기 한양과 그 주변 풍경을 담은 그림들이 주목을 받았다. 인왕산에 있던 자신의 집을 배경으로 한 '인곡유거(仁谷幽居)'와 이곳에서 쉬고 있는 정선 자신의 모습을 그린 '독서여가(讀書餘暇)'를 비롯하여 '백악산' '대은암' '청송당' '자하동' '창의문' '백운동' '필운대' '경복궁' '동소문' '세검정' 등은 300년 전 서울의 풍경화 그 자체이다.

서울과 주변의 명승을 담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에는 한강을 중심으로 한 한양의 주변 지역의 풍경을 담았다.  양수리 부근에서 한양으로 들어와 행주산성까지 이르는 한강과 주변의 명승지가 30여점의 그림으로 형상화되어 파노라마처럼 진경 산수화로 화폭에  담겨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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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각국 외교사절의 대사관저 안내판 성북동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국의 대사관저가 많다는 사실이다. ⓒ 박태상


성북동에는 볼거리로 간송미술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평창동과 한남동과 더불어 서울의 대표적인 고가의 이층 양옥주택으로 가득 차 있는 성북동에는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광화문과 근접성이 있어서 그런지 각국 외교사절들의 관저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우선 간송미술관 옆 골목을 올라가면 콜롬비아대사관저, 호주대사관저, 캐나다 대사관저, 스웨덴 대사관저 등이 몰려 있고 길상사 쪽으로 고개를 오르면 아일랜드대사관저와 포르투갈대사관저가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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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와 포르투갈 대사관저 표식판 성북동에는 유럽 각국의 대사관저뿐 아니라 터키등의 아시아와 아프리카 대사관저도 많다. ⓒ 박태상


성북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로는 길상사를 들 수 있다. 길상사가 탄생된 배경에는 유명한 자야가 있다. 함흥영생고보 교사였던 26세의 백석시인과 23세의 진향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기생 자야의 아름답고도 슬픈 사랑은 바로 길상사가 태어나게 된 태동배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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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입구 성북동의 또 다른 명소는 길상사라고 할 수 있다. 법정스님이 회주로 있다. ⓒ 박태상


자야의 본명은 김영안이다. 그는 60 ~ 70년대 요정의 대부였다. 박대통령 시절 권력의 2인자들은 요정문화를 즐겼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여 야당 국회의원 및 군 장성들과 요정에서 밀담을 나누면서 정치적 난제들을 해결했다. 이러한 요정문화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김영안이었다. 당시 그녀는 요정을 운영하여 대원각 재산 3000억 원을 형성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양딸이외에는 후손이 없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자야는 어느 날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자신의 무릎을 친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천하를 소유한다"는 법정의 불교적 변증법적 논리에 감동하게 된 것이다. 그는 바로 법정에게 전화를 하여 자신의 재산기부 의사를 밝힌다. 하지만 법정은 자신은 재물이 필요 없다고 거절한다. 몇 차례의 거절 끝에 법정은 자야의 재산을 조계종에 기탁하라고 권유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도심 속의 포교원인 "길상사"인 것이다. 유흥주점의 대명사인 요정이 최고의 사찰로 변모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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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극락전 길상사의 사실상의 대웅전에 해당하는 곳이다. ⓒ 박태상


자야는 대원각 이외에 자신이 살고 있던 강남의 아파트를 처분하여 문학 잡지사에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몇 억 원을 기부하였다. 일제 강점기 시절 백석은 진향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사랑을 은밀하게 나누었다. 하지만 백석의 부모는 강제적으로 양가집 규수와 결혼을 권유하였다.

백석은 자야에게 만주로 도망가자고 꼬드긴다. 하지만 자야는 그 제안을 뿌리친다. 그렇게 하여 아름답고도 슬픈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끝이 난다. 백석은 월북하여 북한에서 60년대까지 활동하면서 수많은 향토적인 서정시를 토해낸 한국문학사에서 불멸의 시인이 되었다. 

70년이 지나서 자야는 당시의 백석과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백석을 위한 기부금을 사회에 내놓아 백석을 다시금 부활시켰다. 길상사 도처에는 자야의 이러한 헌신적인 사랑과 자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길상사를 방문한 시간에 마침 주지스님(德祖 큰 스님)의 불경 강론시간이 있었다. 길상사의 신도들 수 백 명이 마치 영취산에서 석가모니가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던 순간처럼 설법전(說法殿)에서 큰스님의 법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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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설법전>에서 덕조 큰스님이 불경에 대한 설법을 듣고 있는 길상사 신도들. 길상사의 <설법전>에서는 법정 스님을 비롯한 큰 스님들의 강론이 자주 펼쳐진다. ⓒ 박태상


총무스님에게 강론하는 책자를 한 권 기부해달라고 전했으나, 신도 이외에는 배포할 수 없다고 하여 큰 덕조 스님의 강론 내용은 옮길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혼탁한 마음을 청정하게 다스리는 혜안에 대한 말씀으로 추정된다. 또 주지스님이 자주 설법한다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삶의 지혜"에 대한 말씀이 아닐까도 생각해봤다.

길상사 절간 안에서 상징적 마스코트는 역시 관세음보살상이다. 관세음은 산스크리트로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이며, 중국에서 뜻으로 옮겨 광세음(光世音)·관세음(觀世音)·관자재(觀自在)등으로 썼는데 줄여서 관음(觀音)이라 한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살펴본다는 뜻이며, 관자재(觀自在)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자재롭게 관조(觀照)하여 보살핀다는 뜻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구제하는 보살[救世菩薩], 세상을 구제하는 청정한 성자[救世淨者], 중생에게 두려움 없는 마음을 베푸는 이[施無畏者], 크게 중생을 연민하는 마음으로 이익되게 하는 보살[大悲聖者]이라고도 한다. 화엄경에 의하면 관세음보살은 인도의 남쪽에 있는 보타락산(補陀落山)에 머문다고 알려져 있다. 보타락산은 팔각형의 산으로, 산에서 자라는 꽃과 흐르는 물은 빛과 향기를 낸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형상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있으며 손에는 버드나무가지 또는 연꽃을 들고 있고 다른 손에는 정병을 들고 있다.

길상사의 관세음보살상은 항상 미소를 짓고 있다. 고대의 인도식 보살이 아니라, 21세기의 한국적 보살이 바로 길상사의 보살인 것이다. 관세음보살상 앞에는 항상 꽃과 쌀 등이 시주되어 있다. 아마도 신도들이 발원을 위해 가져다 놓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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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상사 경내의 ‘관세음보살상’ 관세음보살은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마음으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는 보살이다. ⓒ 박태상


길상사의 담쟁이 넝쿨을 보며 석가모니의 대자대비한 뜻을 헤아리면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서울 성곽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점심은 성곽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집을 찾아들어가 황태매운탕과 황태구이를 주문했다. 2년 전에 한번 찾아온 적이 있는 음식점인데 역시 그 맛은 변함이 없었다. 외국인들도 먼 곳에서 찾아온다는 주인장의 말이 곁들여졌다. 황태구이 맛을 보고 그 말이 옳다는 판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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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거리도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묘미이다. 서울성곽 바로 건너편에 위치한 음식점에서 황태구이와 황태매운탕으로 점심식사를 했다. ⓒ 박태상


식사를 마치고 길 건너에 있는 서울 성곽을 향해 나아갔다. 서울 성곽은 조선을 세운 이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에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축조한 시설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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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에서 바라다 본 북한산 날씨가 좋으면 북한산과 도봉산이 모두 보일 듯 했다. ⓒ 박태상


성북동에서 시작된 성곽길을 따라 한양의 옛 정취를 느끼게 된 것은  최근 인왕산의 청와대 뒷길을 개방하면서 삼청동까지 등산 하듯 도보여행이 가능하게되었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다른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과 다람쥐와 청솔모, 그리고 각종 산새의 모습을 보면서 성곽길을 따라 걷는 것이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과 또 다른 흥취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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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에서 바라다 본 서울 풍경 서울성곽은 서울 북쪽을 돌면서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 박태상


마침 6월 초의 장미의 계절이라 백장미와 흑장미가 산책에 나선 서울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해주었다. 점심식사를 마친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을 비롯하여 외국인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특히 1.8 리터들이 생수병을 들고 산책하는 외국인 남녀 커플의 정다운 모습에서 "서울이 참으로 아름다운 국제도시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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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곽 길에서 마주치게 된 백장미의 물결. 5월 말 6월초는 장미의 계절이다. 서울의 어느 집 담장에도 아름답게 장미가 피어있다. ⓒ 박태상


이태조는 한양으로 천도한 지 2년 후인 1396년 모두 20 만 명을 동원하여 서울 성곽을 쌓았고, 그로부터 26년 후인 세종 14년(1422)에 모두 돌로 쌓는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로 개축했다. 서울 성곽은 높이가 12m, 둘레가 약 18㎞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그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 성곽은 각각 동쪽과 서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과 돈의문, 남쪽과 북쪽에 숭례문(崇禮門)과 숙정문의 사대문을 냈으며, 북동쪽과 남동쪽에 혜화문과 광희문(光熙門), 북서쪽과 남서쪽에 창의문(彰義門)과 소의문의 사소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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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의 서재였던 성북동의 수연산방 수연산방을 모방하여 서양화가 김환기는 '수향산방'을 성북동에 두었다. ⓒ 박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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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의 서재 '수연산방' 상허 이태준의 서재 모습-이곳에서 '문장강화'를 비롯한 한국근대문학사를 수놓은 주옥같은 단편소설들을 창작하였다. ⓒ 박태상


서울 성곽을 한 시간쯤 걷다가 더위를 못 이기고 매화차를 한잔 할 겸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옮겨왔다.  상허(尙虛) 이태준은 강원도 철원(鐵原)에서 출생하였다. 휘문고보를 나와 일본 상지대학에 수학하였으며, '시대일보(時代日報)'에 '오몽녀(五夢女)'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하였다.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였고, 이후 이화여전 강사,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상허의 대표작인 「가마귀」 「달밤」, 「복덕방」 등의 단편소설은 인물과 성격의 차분한 내관적묘사로 토착적인 생활을 부각시켜, 완결된 구성법과 함께 한국현대 소설의 기법적인 바탕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특히 작중 인물들은 회의적·감상적·패배적 성격으로 부각되어 작품 전체가 허무와 서정에 깊이 침윤된 것이 특징이다. 해방 후 임화와 함께 월북하였다가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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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산방에서 반갑게 만난 건국대 역사학과의 신병주 교수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의 문화사탐방을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필자가 우연히 비슷한 경향을 지니는 학자이며 역사유적지 탐방의 대가인 건국대의 신병주교수를 만나 이태준의 서재였던 수연산방에서 의미 있는(?) 사진촬영을 했다. ⓒ 박태상


이태준의 뚜렷한 공적은 청록파 등을 데뷔시킨 일제 식민지 말기였던 1939년 창간한 문학잡지 '문장'에서 또렷하게 드러난다. '문장'을 실제 분석해보면, 잡지 '문장'은 각 분야를 나누어 몇 사람이 편집을 주도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즉 소설은 이태준, 시는 정지용, 시조와 고전 발굴 소개는 이병기로 영역이 분명하게 구분된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네 명은 각자가 개성이 매우 강한 면모를 지녔다. 이러한 문장파의 '개성 추구'는 당시 예술가들이 1930년대 말의 몰개성으로 내선일체의 '전체주의'에 함몰되고 마는 현실과 맞서 내적인 충일감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문장파'라는 말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 사람에 김용준을 포함시키면 문장파는 구색을 갖추게 된다.

따라서 '문장'은 이들 사인방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창간호에서는 행서체였던 제자는 5호부터는 이태준이 찾아내느라 고생을 했던 예서체로 바뀌었다. '문장' 5호에는 짧게 "4월호까지의 문장 제자를 5월호에서 역시 추사의 예서체로 바꾸었다. 이 필적(筆蹟)을 찾아내기에 상허(尙虛)가 한달 가까이 애를 썼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만큼 잡지의 장정에 편집진이 얼마나 신경을 썼는가를 보여주는 한 증거가 될 것이다. 또 창간호의 표지화는 추사(秋史) 김정희의 '수선화(水仙花)'를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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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창간호 '문장' 1939년 2월 창간호 ⓒ 박태상


상허 이태준은 성북동 인근에 살았던 서양화가 근원 김용준과 함께 1930년대의 한국 문화예술계를 주도했다. 김용준은 자신의 수향산방을 해방 이후 한국과 미국 뉴욕에서 크게 활약했던 서양화가 김환기에게 넘겨서 한국화단의 산실로 만든 공적이 있다. 김환기의 수향산방(樹鄕山房)은 아무래도 이태준의 수연산방의 모방적 서재로 느껴진다.

원래 김용준의 노시산방이었던 수향산방은 김환기가 이상의 부인 김향안과 재혼하면서 자신의 호인 수화와 김향안의 이름에서 각각 한자씩 따서 서재이름으로 작명한 것이다.  수화 김환기가 얼마나 수향산방에 집착했는지 그의 수필 「산방기」를 보면 잘 드러난다. 

"성북동으로 왜 오라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전차 머리에까지 도보로 20분,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 성북동은 수돗물이 아니라 우물물을 먹는다는 것, 그리고 꽃 피고 숲이 있고 단풍이 들고 새가 운다. 달도 산협의 달은 월광이 다르다."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의 문화사탐방을 다니는 것으로 유명한 필자가 우연히 비슷한 경향을 지니는 학자이며 역사유적지 탐방의 대가인 건국대의 신병주교수를 만나  이태준의 서재였던 수연산방에서 의미 있는(?) 사진촬영을 했다. 건국대 대학원의 제자들 15명을 인솔하고 온 신병주 교수는 현재 세계일보에  <역사에서 길을 찾다>를 연재 중에 있다.  건국대 대학원생 일행은 앞서 간송미술관에서도 일차적으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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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소재의 만해 한용운의 북향집 ‘심우장’ 만해가 북향집인 심우장을 선택한 이유는 심우장이 일제의 총독부와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박태상


이태준의 수연산방을 나와서 근처에 있는 만해 한용운의 서재 심우장으로 발길을 돌렸다. 1985년 서울시 기념물 제7호로 지정된 심우장은 만해 한용운(1879 ~ 1944)이 1933년부터 1944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였던 만해가 북향집인 심우장을 선택한 이유는 심우장이 일제의 총독부와 등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일제에 저항하는 삶을 일관했던 한용운은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4년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심우장(尋牛莊)이란 명칭은 선종(禪宗)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과정을 잃어버린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한 열 가지 수행 단계중 하나인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심우(尋牛)에서 유래한 것이다. 왼쪽에 걸린 현판은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서예가 오세창(1864~1953)이 쓴 것이다.

만해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는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 멀었습니다"로 유명한 「님의 침묵」을 비롯한 88수의 시가 들어있다. 이 시집 군말에서 후세에 님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낳게 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겨놓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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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장 현판 함께 기미독립선언을 한 민족대표 33인중 한 사람인 오세창이 써준 ‘심우장’ 현판 ⓒ 박태상


심우장을 걸어나와 성북동 큰 길가에서 200m를 걸어가면 골목 끝에 조선 말 마포에서 젓갈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된 이종상의 별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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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말 장안 갑부 이종상의 별장 조선조 말 서울 갑부 이종상의 별장-마포의 젓갈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 박태상


이 집은 당시 평민이면서 부자가 되었던 소위 천부(賤富)들의 생활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집은 대지가 605㎡에 건물 면적이 99㎡인데 안채와 이에 딸린 행랑채로 이루어져 있다. 동북쪽에는 안채가 북쪽에는 행랑채가 자리잡고 있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3칸인 'ㄴ자' 모양의 평면으로 남향집이다. 원래 대청 옆 누마루에 '일관정(一觀亭)'이란 현판이 걸려 있었는데 현재는 출입문에 걸려있다. 추녀에는 절간처럼 풍경을 달았으며, 회색벽돌로 영롱담을 쌓아 집터 주위를 둘러막았다.  이 집은 살림집이라기 보다 별장 건축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집이라고 할 수 있다.

성북동에서 택시를 타고 경신고등학교 담벼락을 따라 내려가면 구 보성고(현 올림픽국민생활관 및 서울과학고) 정문 앞에 우암 송시열 선생의 집터 표석이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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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 송시열선생의 집터 송시열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였으며 노론의 영수였다. ⓒ 박태상


송시열은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였으며 노론의 영수였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이황의 이원론적인 이기호발설을 배격하고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지지, 사단칠정이 모두 이(理)라 하여 일원론적 사상을 발전시켰다.

1658년(효종 9) 찬선에 등용, 이조판서로 승진, 효종과 함께 북벌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죽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1660년(현종 1) 우찬성에 올랐을 때, 앞서 효종의 장지(葬地)를 잘못 옮겼다는 규탄을 받고 낙향하였고, 1668년 우의정이 되었으나 좌의정 허적(許積)과의 불화로 사직했다가 1671년 다시 우의정이 되고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그 뒤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화양동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는데 1689년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제주에 안치되고 이어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오는 도중 정읍(井邑)에서 사사(賜死)되었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뒤에 신원(伸寃)되었다. 그는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 등 전국 각지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송시열 생가터에서 혜화동 로터리 방향을 200m를 내려가면 제2공화국의 비운의 정치인 장면총리의 가옥이 있다. 현재는 보수수리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옆 건물 계단에서 사진촬영을 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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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총리 집 안내판 4. 19민주혁명 후 제2공화국의 총리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비운의 정치가 장면총리의 집 ⓒ 박태상


운석(雲石) 장면은 1925년 맨해튼 가톨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 가톨릭교 평양교구에서 활약하다가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에 취임, 8·15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하여 민주의원(民主議院) 의원·과도정부 입법의원 등을 역임하고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 해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 수석대표로 참석, 한국의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대사(駐美大使)가 되어 한미국교를 위하여 공헌하였다. 1950년 영국 포덤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6·25전쟁 때는 주미대사로 있으면서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얻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1951년 국무총리가 되었다가 이듬해 사퇴하였다.

그 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으며, 1955년 신익희(申翼熙) 등과 민주당(民主黨)을 조직, 최고위원이 되고 1956년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 해 9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을 당하였으나 경상(輕傷)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피선, 1960년 조병옥(趙炳玉)과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하였다가 낙선하였다.

4·19혁명 후 제5대 민의원(民議員)을 거쳐 내각책임제(內閣責任制)하의 제2공화국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정권을 장악하였다.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한 비운의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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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의 장면총리 집 혜화동 로터리 못 미쳐 서울 과학고 쪽 길가에 위치한 장면가옥-현재 공사 중으로 방문객들이 들어갈 수 없다. ⓒ 박태상


장면가옥 사진촬영을 마치고 혜화동 로터리로 걸어 나오니 벌써 여름 해가 저물고 있었다. 성북동 주변의 서울 문화탐방을 했는데도 모든 것을 다 볼 수 없었다. 다음을 기약하고 서울문화탐방의 대장정을 여기에서 마쳤다.

덧붙이는 글 | 흔히 서울엔 볼거리가 없다고 쉽게 단정한다. 삶에 바쁜 대도시 시민들의 무심함 탓이다. 주변의 문화유산을 찾아 가족들과 함께 길을 떠나자!

박태상 기자는 한국방송대 교수, 문화평론가입니다.


덧붙이는 글 흔히 서울엔 볼거리가 없다고 쉽게 단정한다. 삶에 바쁜 대도시 시민들의 무심함 탓이다. 주변의 문화유산을 찾아 가족들과 함께 길을 떠나자!

박태상 기자는 한국방송대 교수, 문화평론가입니다.
#서울문화탐방1 #간송미술관 #이태준의 수연산방 #한용운의 심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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