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강간 사건, 배심원이 내린 결론은?

[아는만큼 보이는 법 ⑭] 국민참여재판 ① '판결=판사의 전유물' 공식 깨지다

등록 2009.06.23 13:50수정 2009.06.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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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참여재판 법정배치도 국민참여재판이 진행되는 법정의 배치도. 배심원은 법정의 오른쪽에서 재판의 전과정을 지켜보고, 유무죄 판단과 양형에 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 대법원


[2009년 4월 ○○일 오전 10시 형사 법정]

배심원 일동 : "선서! 우리 배심원은 법률에 따라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할 것을 다짐합니다."

재판장 : 오늘 9명의 배심원은 판사들과 함께 국민을 대표하여 재판에 참여하게 됩니다. 선서하신 대로 공정하게 일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배심원은 재판이 끝날 때까지 서로 대화를 하거나 개인 의견을 밝혀서는 안됩니다. 선입견을 배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사건번호 2009고합 0번 강도강간 등 사건 재판을 시작합니다. 피고인은 불리한 진술을 거부할 수 있고, 피고인의 진술은 유죄의 증거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검사, 피고인, 변호인의 최초 진술을 듣겠습니다. 

검사 : 피고인 A(50대 남성)씨는 고객을 소개해 준다며 안면이 있는 피해자 B(40대 여성)씨를 자기 집으로 유인했습니다. 그 뒤 식칼을 들고 B씨를 폭행·협박하면서 옷을 벗기고 성폭행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피고인은 카드를 빼앗고 위협을 가한 다음, 동료들을 불러서 현금 200만 원을 찾아오게 했습니다. 피고인은 성폭행과 강도로도 모자라 휴대폰으로 B씨의 신체를 촬영하였습니다. 배심원 여러분, 선량한 여성을 농락한 흉악범은 엄벌해야 합니다. 

피고인 : 재판장님, 그리고 배심원 여러분! 저는 정말로 억울합니다. 검사님의 얘기는 다 거짓말이에요.

변호인 : 피고인 대신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두 사람이 잠자리를 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서로 좋아서 그랬던 겁니다. 피고인은 B씨를 때리거나 협박한 적이 결코 없습니다. 또한, 현금카드는 뺏은 게 아니라 피고인이 돈을 빌리기로 하고 B씨의 승낙을 받아 사용한 겁니다. 피고인은 휴대폰 카메라 쓸 줄도 모릅니다. 검사가 제시한 증거라고는 앞뒤가 안맞는 피해자의 말뿐입니다. 그렇다면 피고인은 당연히 무죄 아니겠습니까. 


재판장 : 피고인은 검사의 공소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로써 오전 재판을 마치겠습니다. 오후에는 피고인 신문, 증인신문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증인으로는 B씨, B씨의 여동생, 동네 편의점 주인이 채택되었습니다. 신문이 끝나면 슬라이드를 통해 검찰쪽과 피고인쪽 증거자료에 대한 설명도 들어보겠습니다.  

[오후 5시 30분 법정]

재판장 : 오후 2시부터 지금까지 재판에서 피고인과 증인신문, 증거설명과 양측의 공방을 들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검사의 구형, 피고인의 최후변론을 들어보겠습니다. 

검사 : 파렴치한 피고인을 징역 15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피고인 : 저의 행위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지는 몰라도 전 강도강간범이 아닙니다. 제발 저의 결백을 밝혀주십시오.

재판장 : 이제 배심원들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금까지 재판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토대로 평결해주시기 바랍니다. 형사 피고인은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 유죄 입증은 검사가 해야 되고, 증거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지 않을 정도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주십시오.

[오후 6시 배심원 평의실]

배심원 1. : 그러니까 핵심은 유력한 증거인 B씨의 진술이 정말로 믿을 만하냐는 거잖아요.  검사가 B씨의 얼굴 상처 사진, 찢어진 블라우스, 사건 직후 남편과 통화한 사실을 증거로 냈는데요, 전 B씨 말에 믿음이 가네요.

배심원 2. : 그것만 가지고 단정지을 순 없어요. 아까 증인으로 나왔던 B씨 동생도 얼굴 상처는 본 적이 없다던데요. B씨가 일주일이나 카드 정지를 하지 않았던 점도 뭔가 이상하고. 

배심원 3. : B씨는 2시간 넘게 성폭행 당했답니다, 우리 현장을 주의 깊게 봅시다. A씨 집은 상당히 좁고, 벽이 얇아서 옆집 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 구조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칼로 위협하면서 2시간 동안이나 성폭행했다? 가능할까요? 

배심원 4. : 그러고 보니 B씨의 태도도 이해가 안가는 게 있습니다. 성폭행 당한 와중에 샤워를 했다는데 피해자가 스스로 증거를 없앤다, 글쎄 제 상식으론…….

배심원 5. : 휴대폰 촬영도 그래요. A씨는 50대인데 카메라 사용법이나 알까요. 휴대전화엔 저장된 사진도 안나왔잖아요.

배심원 6. : 아니죠. A씨 체포 과정을 보세요. 만나자고 연락이 와서 B씨가 나가봤더니 대뜸 "경찰이 따라오지 않았느냐"고 물었다잖아요, 도둑이 제발 저린 거지. 그게 범죄를 뒷받침해주고 있어요.     

배심원 7. : 당일 동네 편의점 주인도 B씨가 울면서 전화하는 걸 보았답니다. 두 사람이 무슨 원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짓말 할 이유가 하나도 없잖아요. 아까 B씨가 울면서 얘기하는 걸 보니 정말 안됐더라고요. 

배심원 8. : 배심원들이 감정에 동요되어서는 안되죠. 

배심원 9. : 맞아요. 아까 재판장님 얘기가 검사가 확실한 유죄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 무죄라고 했습니다. 피고인의 행동이 의심스러운 건 맞지만, 나온 증거로만 보면 범인이라는 확신이 안 들어요.   

배심원 1. : 그런데 배심원의 의견이 만장일치가 안되면, 다수결로 해야 한답니다. 어쨌거나 조금 더 의견을 모아봅시다. 다른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잖아요.

피고인 A씨에게 배심원들은 어떤 형을 내렸을까.(궁금하다면 이 글 제일 뒷부분을 보기 바란다.)

법정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익숙하게 떠올릴 장면이다. 그런데, 이것은 실제로 일어난 재판의 내용이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위의 사례는 어느 법정의 재판 진행 상황을 그대로 재구성해본 것이다. 사실을 토대로 약간 각색을 했으니, 팩션(faction)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국민참여재판을 아시나요?

'국민참여재판'. 일반 시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우리나라 배심 재판의 공식 명칭이다. 2008년 1월부터 전국 법원에서 시행되고 있다. 작년 전국 법원에서 60건의 국민참여재판이 열렸으며, 올해는 5월까지 26건이 진행됐다.

현재는 살인, 강간, 고액 뇌물죄, 마약 등 중형을 선고받게 될 형사사건 중에서 피고인이 범죄를 부인하는 사건들을 대상으로 한다. 배심원들은 재판에 참여하여 유무죄에 관해 결정하고, 유죄로 인정되면 적당한 형량을 정한다.

지금은 일종의 시범실시 단계여서 배심원의 결정이 재판에 절대적 구속력은 없다. 대법원은 5년간 시행해 본 다음 그 결과를 바탕으로 최종 제도를 만든다는 계획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판사와 법률전문가들만의 영역이었던 재판절차에 시민이 참여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다. 쉽게 의문을 던져보자. 우선, 법률을 잘 모르는 시민들에게 한 사람의 운명이 걸린, 심지어는 사형과 무죄가 오가는 재판을 맡겨도 괜찮은 걸까. 당사자인 피고인과 검찰은 과연 수긍할 수 있겠는가. 설사 참여하게 하더라도 복잡한 법과 재판절차를 시민에게 어떻게 이해시킬까. 막대한 비용과 인력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마치 문제는 끝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0년만에 결실 본 국민의 사법참여... 아직은 시범단계

하지만 국민이 공정성을 의심한다면, 사법부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전관예우', '유전무죄', '사법살인'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불행히도 수십 년간 사법 불신의 골은 깊었고, 법원의 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어쩌면 국민들은 효율적인 재판보다 공정하고 투명한 재판을 원했는지 모른다.

21세기 사법개혁의 화두는 자연스레 국민의 사법참여 보장이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대법원과 정부·학계는 구체적인 방식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10년 만에 결실을 본 것이 국민참여재판이다.

그렇다면 국민참여재판은 일반 형사 재판과 어떻게 다를까. 

첫째, 재판의 모든 과정이 법정에서 말로 진행된다. 그동안의 재판이 수사기관의 조서를 토대로 법관이 판단하는 방식이었다면, 국민참여재판은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 증인의 말을 직접 듣고 증거를 직접 보면서 사건을 파악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형사소송법이 지향하는 구술변론과 공판중심주의를 잘 보여준다.

둘째, 재판을 당일 끝낸다는 점이다. 형사 법정에는 하루에 보통 수십 건의 재판이 잡히고, 한 사건은 3, 4주 간격으로 기일이 반복해서 열리게 된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 2년이 지나야 한 건의 판결이 나온다. 반면, 국민참여재판은 하루종일 한 건만 재판을 열어 판결 선고까지 마치게 된다.
  
셋째. 무엇보다 중요한 건 국민이 배심원으로 직접 참여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검사와 변호인은 재판장을 상대로 '그들만의 언어'로 변론을 벌여왔는데 이제는 국민의 눈높이에서 배심원을 설득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민주적 정당성, 신뢰도와 직결된다.

재판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판사가 어떻게 판결하는지 전혀 모르던 시민들을 이해시키는 건 사법 제도의 변화를 요구한다. 피고인 입장에서도 법관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도를 높일 수 있는 제도이다. 여러모로 사법제도의 혁신으로 꼽을 수 있다.
 
오늘 당신도 배심원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행된 지 1년 반이 지났는데도 국민참여재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홍보가 절실한 시점이다. 제도를 주관하는 법원이 어떻게 이끌어가느냐에 따라 시범 실시 5년의 평가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재판 양쪽 당사자인 검찰과 피고인의 적극적인 참여와 국민들의 관심도 우리 사회에 배심재판을 정착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어쨌거나 '판결=판사의 전유물'이라는 공식이 깨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국민참여재판은 사법제도의 획기적인 변화임에 틀림없다.

오늘 당신도 배심원이 될 수 있다. 만일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가.

(위에서 사례로 든 강도강간사건의 실제 재판결과를 공개한다. 배심원들은 2시간 넘게 토론한 결과 만장일치로 무죄로 뜻을 모았다. 재판부도 배심원들의 결정을 존중하여 범죄의 증명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했다. 검사가 이 판결에 불복, 현재 항소심 재판이 진행중이다.)

[문답으로 보는 국민참여재판]  배심재판에 대해 알고 싶다고?
2008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국민참여재판의 궁금증을 문답으로 풀어본다.

국민참여재판이란?
국민이 배심원으로 참여하여 재판부에 독립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형사재판의 형태를 말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제(배심원이 독립적으로 유무죄를 판단)와 참심제(참심원이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제도)를 혼합한 방식이다. 법원은 5년간의 시범실시 기간을 거친 후 제도를 확정할 계획이다.

어떤 사건을 대상으로 하나.
살인, 강도강간, 강도치상, 거액의 뇌물 등 중죄사건 중에서 피고인이 신청하는 사건만을 대상으로 한다. 오는 7월부터는 뇌물 수뢰액 3천만 원 이상, 형법상 강간, 강도 사건까지 대상 사건이 늘어난다. 단, 재판부는 사안이 너무 복잡해 재판기간이 오래 걸리거나, 배심원이 신변에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사건 등은 국민참여재판에서 제외할 수 있다.

배심원은 어떻게 선발하나.
20세 이상이면 아무런 자격 없이 배심원이 될 수 있다. 단, 일정한 전과가 있는 사람, 군인, 경찰, 법원, 검찰 직원 등은 제외된다. 법원은 주민등록을 토대로 만들어진 배심원후보자명부에서 일정한 인원(약 100명)에게 출석통지를 보내 출석자들을 상대로 배심원후보자를 선발한다. 변호인과 검사는 최종 배심원 선정에서 자기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후보자(3명-5명)를 기피할 수도 있다.  배심원 숫자는 법정형이 사형·무기인 사건은 9명, 그 외는 7명이며 법원은 5명 이내의 예비배심원을 함께 선정한다.

배심원이 하는 일은 무엇인가.
국민참여재판 법률에 따르면 배심원은 사실의 인정, 법령의 적용 및 형의 양정에 관한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있다. 배심원은 재판의 전 과정에 참여한 후 다른 배심원들과 함께 유무죄, 적절한 형을 결정(평결)한다.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평결을 내리지 못할 때는 판사의 의견을 들은 다음 다수결로 평결을 내린다. 다만, 판사는 배심원의 결정에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다.

배심원이 재판 도중 법정을 떠나거나 비밀을 누설하는 행위 등을 하면 형사처벌을 받을 수있으며 정당한 이유없이 법원의 출석통지를 거부하면 과태료를 물 수도 있다. 

국민참여재판은 어떻게 진행되나?
일반 재판이 하루에 수십건 씩 진행되는 반면 국민참여재판은 한 건으로 하루종일 집중하여 진행한다. 이는 배심원들의 집중을 높이고, 비밀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재판은 배심원 선서 - 배심원에 대한 최초설명 - 진술거부권 고지 - 검사, 피고인의 최초진술 - 검사, 변호인의 증인신문과 증거조사 - 피고인 신문 - 검사 구형, 피고인의 최종 의견진술 - 배심원의 평결 - 판결 선고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덧붙이는 글 | 다음 기사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의 현황과 문제점, 발전방향 등을 짚어보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다음 기사에서는 국민참여재판의 현황과 문제점, 발전방향 등을 짚어보겠습니다.
#배심원 #국민참여재판 #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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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으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법원공무원(각종 강의, 출간, 기고) 책<생활법률상식사전> <판결 vs 판결> 등/ 강의(인권위, 도서관, 구청, 도청, 대학에서 생활법률 정보인권 강의) / 방송 (KBS 라디오 경제로통일로 고정출연 등) /2009년, 2011년 올해의 뉴스게릴라. jundorap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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