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맥' 말고 '혼돈주'가 더 좋더라

[막걸리 예찬론] '시큼털털'한 그 맛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리오

등록 2009.07.03 17:37수정 2009.07.0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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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분위기가 전혀 다른 두 술이 있습니다. 하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나 어울릴 것 같고, 또 하나는 슬리퍼 질질 끌고 나가 먹어도 전혀 부담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술이지요. 바로 와인과 전통주(막걸리)입니다. 이 어울려 보이지 않는 이 두 술의 공통점이라면, 최근 이 술이 대중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는 건데요. 와인이 더 이상 별스럽지 않고, 전통주(막걸리)가 그닥 구리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준비한 '와인vs.전통주(막걸리)' 기획. 이 술들의 매력에 한번 취해보실까요. [편집자말]
색깔은 우윳빛. 맛은 신 듯하면서도 달콤하다. 먹고 나면 목구멍 저 아래서 떨림이 올라온다. 바로 막걸리다. 이 먹을거리를 떠올리면 군침이 돈다. 언제일까. 첫 맛을 본 게. 까마득하게 거슬러 올라간다. 지금은 돌아가신 외할아버지 생신날이었다. 시골집 마당엔 사람들이 가득했고, 분위기는 왁자지껄했다.


 출출할 때 막걸리 한 병에 국수 한 그릇이면 아주 든든하다.
출출할 때 막걸리 한 병에 국수 한 그릇이면 아주 든든하다.김대홍

외할아버지였던가, 외삼촌이었던가 잘은 모르겠다.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않았을(1, 2학년쯤이었나?) 나를 안고 누군가가 "아따, 막걸리 한 잔 줘야 쓰겄소"라면서 입에 갖다 대었다(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어머니나 이모들은 기겁을 했던 것 같은데, 아스라하게 신 맛이 기억난다.

제대로 술 맛을 느낀 것은 초등학교 5, 6학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선 종종 주말 간식으로 '술빵'을 만드셨다. 노릇노릇 부푼 모습이 먹음직스런 빵이었는데, 여기엔 막걸리가 꼭 들어가야 했다. 어머니는 꼬맹이에게 주전자를 쥐어주셨다. 꼬깃꼬깃한 돈과 함께.

막걸리집에 가서 반쯤 채운 뒤 돌아오는 길에 뚜껑을 열고, 막걸리를 따랐다. 아 그때 느꼈던 향긋한 맛이란.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끼면서도 그 유혹을 이기긴 힘들었다. 그래도 흔적을 남기면 안 돼 뚜껑에다 살짝살짝 마셨으니 더욱 감질 맛만 났다.

신 김치 '쭉' 찢어서 입에 한 잔 털어넣으면 '캬~'

막걸리가 '맛있다'는 것을 느낄 무렵 집에서 공사를 할 일이 생겼다. 일꾼 두 명이 와서 일을 했다. 한낮 뙤약볕이 내리쬐는 오후, 응달에서 두 사람은 막걸리를 마시고 있었다. 틀림없이 밥그릇에 우윳빛 막걸리를 '콸콸콸' 따른 뒤, 손가락 푹 담가서 휘휘 저어 마셨겠지. 그리고 신 김치 '쭉' 찢어서 머리를 한껏 뒤로 젖힌 뒤, 입에 밀어넣었을 테고. 그때 군침 흘린 기억이 난다.


입시에 목매던 10대 시절, 처음으로 '알딸딸한' 기분으로 안내한 것 역시 막걸리였다. 대학입학시험을 100일 남겨둔 어느 날, 친구들 몇이 불렀다.

"오늘 졸업 선배들이 격려한다고 부른대. 가자."


수업을 마치고 근처 대학교 잔디밭에 갔다. 큰 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선배와 동기생들. 막걸리 잔이 돌았다. 드디어 술을 마시는 순간. 긴장에, 기대감에 침을 '꿀꺽' 삼켰겠지.

꽤 여러 잔 마셨다. 이 시간 술을 마시고 있으리라곤 꿈에도 모를 부모님에게 술 마신 티를 내면 안 됐으나 술맛과 향기는 강했다. 마실 만큼 마신 뒤 화장실에 가서 한참을 입을 헹구고 세수를 하며 법석을 떨었다. 그것도 모자라 껌을 사서 '질겅질겅' 씹었다.

결과는? 나는 시치미 '뚝' 떼고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갔고, 어머니는 정말 모르신 것인지, 모른 체한 것인지 완전범죄를 도와주셨다.

몽둥이 찜질보다 강했던, 라면그릇 막걸리

 약초 막걸리
약초 막걸리임현철

대학교에 들어가자 마음껏 취할 권리를 허가받았다. 당시엔 막걸리에 사이다를 타서 마셨다. 더운 여름날 양은주전자에 막걸리 두 병, 사이다 한 병을 넣어서 즐겨 마셨다. 그 시원한 맛이란.

때론 막걸리가 병 주고 받는 약이 될 때도 있었다. 어느 날 잔뜩 성이 난 선배들이 동기생 남학생들을 모두 모았다. 으슥한 밤 잔디밭에서 '퍽퍽' 방망이질이 시작됐다. 그 뒤 원을 그리며 둘러앉은 우리들 앞에 나온 것은 커다란 라면그릇과 막걸리.

한숨에 막걸리를 들이키길 두 차례.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막걸리는 시원했다. 해서 한여름날 막걸리를 떠올리면 그 때 잔디밭에서 라면그릇에 따라 들이키던 막걸리가 생각난다. 몽둥이 느낌은 없으니 고통보다는 술맛이 강했나 보다.

시간은 한참 흘러 서울에 올라온 1990년대 말 다시 막걸리에 빠지게 됐다. 집 근처에 괜찮은 막걸리집이 있었다. 당시엔 정종, 청주, 맥주, 소주 가리지 않고 마시던 때였다. 그 집 막걸리는 달랐다. '맛있다'는 말이 절로 나왔다.

30대로 보이는 주인은 놀랍게도 50대. '형'이라고 불렀던 주인을 보면서 '틀림없이 저 절묘한 막걸리를 자주 마셔서 저런 젊음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그 막걸리에 얼마나 푹 빠졌느냐면, 여러 술을 마신 뒤 숙취를 없애기 위해 다시 그 집에 들렀을 정도다. 실제 그 집 막걸리를 마시고 나면 그 전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다음날 말끔했다.

장사가 잘 되진 않았는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었는지 그 동네를 떠나기 전 '형'은 문을 닫았다.

냄새 많이 난다고, 쉽게 상한다고 구박하더니

보문사 입구 가게 앞의 막걸리병 보문사 입구 가게 앞의 막걸리병
보문사 입구 가게 앞의 막걸리병보문사 입구 가게 앞의 막걸리병이승철

세월도 나이를 먹고 나도 나이를 먹고 막걸리도 나이를 먹는다. 어느 순간 주위에서 막걸리를 보기 힘들어졌다. 막걸리를 마시는 사람도 막걸리를 파는 집도 귀해졌다. 마시고 난 뒤 냄새가 많이 나서 외면 받았고, 유효기간이 4, 5일에 불과하니 가게 주인들이 꺼렸다(물론 균을 죽인 막걸리는 몇 달씩 간다).

언젠가 고려대 앞에 자취하던 후배 집에 놀러가 막걸리를 찾았었다. 후배는 "요즘 누가 막걸리 마셔. 요새 고대 학생들도 막걸리 안 마셔"라면서 다른 걸 마시길 원했다. 나는 요지부동. 결국 한참 동네를 돈 뒤 막걸리를 마셨다.

요즘은 다시 막걸리가 유행이다. 막걸리를 파는 집들이 많이 보이고, 언론에서도 '웰빙 음식' '다이어트 특효'라면서 주목한다. 막걸리 한 병에 든 유산균이 요구르트 백 병과 같다는 이야기까지 들린다. 전주에도 막걸리촌이 생겨 몇 차례 내려가서 마신 적이 있다.

세월을 거슬러 다시 막걸리가 유행이지만, 사람들 입맛까지 그대로일 수는 없을 터. 얼마 전 막걸리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깜짝 놀랄 술을 소개받았다. 이름 하여 '혼돈주'란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물어보니,

막걸리에 소주, 사이다를 타서 만든 술이란다. 설마 맛있을까. 반신반의했지만 둘은 재료를 사서 정성껏 집에서 만들었다. 드디어 맛을 볼 시간. 둘은 한 잔씩 나눠 마신 뒤 서로 표정을 살폈다.

"맛있다."

감기엔 소주에 고춧가루는 옛말? 이거 한잔이면 '끝'

예전만큼 많이 마시진 않지만, 여전히 막걸리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최근 들어 오뉴월만 되면 감기에 걸리는데, 올해라고 넘어가지 않았다. 코가 맹맹한 상태로 넷이 어울려 맥주를 마셨다.

코는 더 맹맹해지고 급기야 콧물까지 떨어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 샷! 원 샷! 다음날도 맥주를 마셨다. 감기는 정말 심해졌고 그 상태로 한 주가 흘러갔다. 문득 보리는 겨울에 자라서 성질이 차고, 쌀은 여름에 자라서 따뜻한 성질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날 저녁 막걸리 두 병을 사서 집에 들어갔다. 책을 보면서 한 병 따고, 두 병째 홀짝. 그 다음날 몸이 놀랍도록 가벼워졌다. 이 놀라운 사실을 혼자만 알 수가 있나. 역시 감기에 걸려 골골거리는 친구에게 귀띔했다.

"감기엔 막걸리가 딱이야. 이유는 어쩌고저쩌고."

친구 또한 막걸리를 마셨고, 몸이 좋아진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널리 퍼트릴 만한 정보는 아니다. 막걸리가 감기에 좋다는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없으니 말이다.

허나 분명한 것은 감기에 걸린 뒤에도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는 나나 친구들은 막걸리를 계속 찾을 거라는 사실이다. 세월이 나이를 먹고 술집도 나이를 먹듯이 그렇게 지난 날을 다독이기에 막걸리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막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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