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8월 15일에 열린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에 자리를 함께 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
NARA(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청)
이승만도 연설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제헌국회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을 계승하고 있다(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 나아가 '임시정부의 대한민국'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은 과연 무엇을 역사적 연원으로 삼았을까?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인데 국초(國初)에 천명을 받고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었다.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종황제가 1897년 10월 11일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면서 신하들에게 했던 말이다. 고종황제는 이틀 후인 13일에는 반조문(頒詔文)을 발표하도록 명했다.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백성에게 널리 알리는 조서'를 뜻하는 반조문에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이 두 개의 구절이 역사학계에서도 이미 정설로 굳어진 것으로 알려진 '삼한정통론'의 근거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의 뿌리인 한(韓)이라는 명칭이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언급된 것은 삼한이기에 이론(異論)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김진명이 제기했던, "당시만 해도 두만강과 압록강을 국경으로 두고 있었던 조선이 고작 한반도 남단에 움츠리고 있었던 약소국인 삼한을 잇고자 국호를 바꿨을까"라는 '상식적 의문'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자는 <조선왕조실록> 고종편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1897년 10월 11일자 기록에서 기존의 '삼한정통론'과 정면으로 배치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대목을 발견했다. 실제로 고종황제는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고 언급한 뒤 곧바로 이런 말을 했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 '조선(朝鮮)'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하였다."고종황제가 봤던 외국의 문헌에는 '삼한 이전에 존재했던' 조선을 한으로 불렀던 기록이 '많았다'는 말이다. 한편 고종은 이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이는 아마 미리 징표를 보이고 오늘이 있기를 기다린 것이니, 세상에 공표하지 않아도 세상이 모두 다 '대한(大韓)'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한민족이 주도했던 고대국가를 외국에선 이미 한(韓)이라 불렀기에 널리 알리지 않아도 모두 다 알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대신 중 특진관 조병세도 이렇게 화답했다.
"각 나라의 사람들이 조선(朝鮮)을 한(韓)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상서로운 조짐이 옛날부터 싹터서 바로 천명이 새로워진 오늘날을 기다렸던 것입니다."고종황제와 신하들의 19세기 말엽 역사인식에 따르면, 삼한 이전에도 한은 엄연히 존재했던 셈이다.
"우리나라는 지역으로 연(燕)나라에 가까웠다"또한 한민족의 고대국가가 차지했던 강역이 요하와 중국 동북부에까지 미쳤다는 인식이 <조선왕조실록> 정조편에도 등장한다. 지중추부사 홍양호가 1799(정조 23년) 12월 21일 <흥왕조승> 4편을 정조에게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동방에 나라가 있게 된 것은 상고 시대로부터인데 단군이 맨 먼저 나오시고 기자께서 동쪽으로 건너오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지고 구이(九夷)로 흩어져 있다가 신라와 고려 시대에 들어와 비로소 하나로 섞여 살게 되었는데…."그러면서 홍양호는 동방에 있던 한민족 국가의 강역이 "지역적으로는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정조는 "조상의 공덕을 드러내고 선인의 아름다움을 드날린 것으로 <시경(詩經)>과 <서경(書經)>보다 더 자세한 것은 없다"고 답한다.
이러한 기록들은 공교롭게도 김진명이 <천년의 금서>에서 서지학의 근거로 제시했던 내용이나 고서(古書)와 일맥상통한다.
먼저 소설의 도입부와 마지막 부분에서 대반전의 모티프로 활용된 <시경>의 '한혁(韓奕)'편을 보자. 작가는 주나라에서 춘추시대 중기 사이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서의 내용 중에서 2가지 대목을 소설 속에서 형상화했는데, 다음과 같다.
(1) "한후(韓侯)는 맥(貊)족을 복속시키고 그 땅의 제후가 되었다."(2) "한후가 수도에 들자 선왕(宣王)은 경계를 논하였으며 조카딸을 시켜 밤 시중을 들게 하였다."김진명은 <천년의 금서>에서 주나라 선왕이 환대한 이 한후의 한(韓)나라가 대한민국 국호에 등장하는 한(韓)의 뿌리라고 주장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모두 4종의 <시경> 번역본을 찾았다. 그 중의 하나인 <신완역판 시경>(명문당)의 역저자인 김학주는 한혁편에 등장하는 한나라가 "전국시대의 한나라와는 다르다"면서 한혁편의 성격을 이렇게 해설했다.
"한나라 제후가 즉위하고 바로 내조하여 천자의 명을 받고 돌아갈 때 시인이 이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모시서>에서는 윤길보가 선왕을 기린 작품이라 하였으나 근거가 없다. 선왕보다는 이 시의 내용은 거의 전편이 한후를 기린 것이라 봄이 좋을 것이다."한편 <시경> 한혁편에는 '보피한성 연사소완(普彼韓城 燕師所完)'이라는 구절도 들어 있다. "커다란 한(韓)나라 성은 연(燕)나라 백성들이 완성시킨 것"이라는 뜻인데, "지역적으로는 (우리나라가)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가까웠다"는 정조 시대 관리 홍양호가 했던 증언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잠부론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작가가 두 번째 모티프로 삼은 <잠부론(潛父論)>은 후한의 대학자 왕부(AD 85~162)가 지은 문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씨성(氏姓)'편에 시경에서 위대한 제후로 묘사했던 한후가 다시 등장한다.
한후가 선왕을 방문한 지 거의 1천여 년이 흐른 뒤의 일이니, 왕부가 얼마나 방대한 고사와 지식을 섭렵했던 학자인지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후한의 3대 명저인 <잠부론>에서 변방과 이민족의 침입에 대한 국방정책, 성씨(姓氏)의 분화에 대한 학술적 연구 등 아주 다양한 지식과 견해를 쏟아냈다.
국회도서관에서 기자는 1종의 <잠부론> 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건국대학교 출판부가 2004년 출판한 이 책의 번역자는 임동석이다. 이 책에서 한후와 관련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주 선왕 때에 역시 한후라는 자가 있었으며, 그 땅은 연나라에 가까웠다. 그래서 <시경>에 이렇게 노래하였다. '크고 큰 저 한성이여 연나라 백성이 쌓았도다'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 위만에 멸망하여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잠부론>에 적혀 있는 한자 원문은 다음과 같다.
"昔周宣王亦有韓侯 其國也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 遷居海中"<천년의 금서>에서 작가에 의해 형상화된 "한후는 연나라 부근에 있었다"거나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 그 후에는 위만에게 망하여 바다를 건너갔다" 등의 내용이 역사적 근거를 분명히 가지고 기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기후한서역성한(其後韓西亦姓韓)과 천거해중(遷居海中)에 대한 임동석과 김진명의 해석이 다를 뿐이다. 임동석은 각각 "그 뒤의 한서 역시 성이 한씨로"와 "바다 쪽으로 옮겨 갔다"고 풀이한 반면 김진명은 각각 "차츰 한의 서쪽에서도 한씨 성을 갖게 되었는데"와 "바다를 건너갔다"로 해석했다.
소설이 현실보다 더 진실에 가까울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