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총 등 기독교 보수세력 이명박 대통령 친위대 역할 맡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 이명박 정부를 비판하는 시국선언이 줄을 잇는 가운데 기독교 보수세력을 대표하는 조용기 목사, 김준곤 목사, 길자연 목사 등 한국기독교총연합회(이하 한기총) 원로회에 속한 33명의 목회자들과 한기총은 지난 9일과 12일 현 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이후 추모 분위기에 편승해 나라를 흔들고 혼란을 부추기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며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권은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법질서를 수호하고 정치권은 국회로 돌아가 적체된 법안을 즉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한기총과 유사한 성격을 가진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역시 27일 조선일보 등 보수언론에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 주소서!>라는 광고를 내고 "일부 지식층이라는 사람들의 시국선언으로 자유 대한민국을 지켜내려는 사람들과 공산 이데올로기에 미혹된 사람들의 대립이 극에 달해 있다"며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반정부 시국선언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들은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이나 강희남 목사의 자살을 기회로 삼아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이용하려는 작태를 불쾌하게 생각하며, 결코 자살은 자신에 대한 살인행위일 뿐이며 그 죄가 정당화되거나 진실이 될 수 없음을 밝혀둔다"고 주장하고 "이명박 정부는 각종 비난을 일삼고 있는 자들에게 위축되지 말고 신념 있는 일을 계획하고 추진하며, 법치국가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소신 있게 사회질서를 바로잡아 주기를 바란다"며 이명박 정부의 적극대응을 촉구했다.
보수 기독교세력의 이러한 행동은 자신들이 지지한 이명박 대통령이 노 전 대통령 서거이후 사면초가 상태에 빠지자 구원자 역할을 담당하기 위한 것이지만 효과는 거의 없어 보인다. 오히려 후안무치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진보와 개혁진영의 25개 기독단체 및 교회대표자들은 12일 한기총의 시국성명에 대해 권력과 야합하는 내용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에서 지식인들과 시민사회의 시국선언을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법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과 이명박 정부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심각한 왜곡"이며 "각 시국선언에 적절히 담겨있는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를 향한 열정과 의지에 대한 모독이며 언어폭력"이라고 반박했다.
또 자살을 미화하고 민생을 혼란케 하는 선동으로 비난한 것에 대해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단순한 자살로 규정함으로써, 서거와 연관된 정치사회적 맥락과 배경에 대한 성찰을 거부하고 차단하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지적하고 한기총과 자칭 한국교회 원로회는 정치권력에 야합해 공의를 잃어버렸다"며, "이명박 정부의 총체적 실정과 불의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양지만을 찾아 권력과 야합하는 거짓 선지자들의 길을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 "5·16군사쿠테타 이후 기회를 엿보아 독재정권에 아부했던 이들이 과연 원로인가"묻고 "이 시대에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하라"면서 "한국기독교를 사칭해 정권과 영합하는 비기독교적 행태를 중단하라"고 일갈했다. 또 일부 네티즌들은 노 대통령의 서거를 자살로 폄하하고 죄악시한 한기총 원로회 소속인 김준곤 목사, 조용기 목사, 길자연, 김장환 목사 등이 노 전 대통령 국민장의위원회에 버젓이 이름을 올린 것은 자기모순의 극치라고 비꼬기도 했다.
친일-친미-반공을 토대로 역대 독재 정권의 강력한 지지세력 형성
이 같은 기독교 보수세력의 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는 이명박 정부뿐만이 아니라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으로 이어진 바 있고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거나 가장 실패한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이승만 전 대통령 시절 기독교는 가장 수혜를 받는 종교였다. 대한민국 초대 국회 임시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48년 5월 31일 제헌국회 개원식에서 다른 종교를 가진 의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한다"며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첫 국회의 첫 회의를 시작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의원 중 유일하게 목사였던 이윤영으로 하여금 감사 기도를 드리게 했다.
기독교의 득세는 대한민국 정부구성까지 영향을 미쳐 자유당 초대내각 21개부서 장관 중 9명이 기독교 신자였으며 이승만 정권 12년간 이기붕 부통령 등 135명의 장관급인사의 절반이 기독교 인사로 채워졌다. 그 중 백낙준(문교부장관, 전 연세대 총장), 임영신(상공부장관, 전 중앙대총장), 김활란(공보처장관, 전 이화여대 총장) 등 미국 유학파들은 실세로 군림했다.
기독교 지도자들 역시 이승만 정권을 기독교 정권으로 간주하고 노골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절정은 이승만·이기붕이 정·부통령으로 출마한 1960년 대통령 선거였다. 이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국적으로 선거대책위원회를 조직한 후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이용해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은 물론 가톨릭과도 싸워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 2003.6.10, 한길사 참조)
또 기독교는 반공과 친미의 강력한 보증수표였다. 기독교 스스로 반공과 친미를 위해 적극적인 이념성과 정치성을 띠는 걸 마다하지 않았고, 종교지도자들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부추겼다. 해방 전후 월남한 기독청년들은 서북청년단의 발족을 주도하고 반탁운동, 대구노동자파업 진압, 4.3사건 당시 제주도민 학살 등을 통해 이승만 정권의 단독정부추진을 지원했다. 그러나 기독교 세력의 적극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권은 1960년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저항에 무너져 이승만은 해외로 망명하고 역시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부통령 이기붕과 그의 부인이었던 박마리아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기독교는 부정부패집단으로 몰려 제2공화국 때는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박정희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자 정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기사회생했다. 이때 맹활약한 인물이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총재를 역임한 김준곤 목사다. 김준곤 목사는 보수신학의 거두였던 박형룡에게 수학했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한동안 교목으로 일했다가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빌 브라이트를 만나 CCC운동을 접했다. 그는 1958년 귀국해 한국CCC를 창립한 후 학원 전도에 성공해 한국교회내에서 지도적 위치를 확보했고 독재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정권안보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김준곤 목사과 비슷한 시기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김장환 목사다. 그는 경기도 화성의 농촌 출생으로 6·25 직후 미군 부대에서 사환으로 일하다 미군 상사의 주선으로 1951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인종차별로 유명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밥 존스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미국 기독봉사회 선교사로 귀국해 수원중앙침례교회를 설립하고 1966년 2월에는 한국YFC를 결성해 초대 회장이 되었다. 김장환은 1973년 빌리 그레이엄 초청집회 때 그래함의 설교를 유창한 영어로 능란하게 통역해 '빌리 킴'이라고 불리며 한국 교회 신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한국 교회의 지도적 인물 중에서 가장 극우적이면서 가장 친미적 성향을 인물로 미국 내 탄탄한 인맥을 바탕으로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정권시절 미국 관련 현안을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2000년에는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세계침례교연맹(BWA) 회장에 선출되었고 2006년 극동방송 창립 50주년 행사 때 전두환 전 대통령을 공식 초청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김준곤과 김장환은 조용기와 함께 60년대 말부터 80년대까지 반공과 안보를 내세워 민주화운동을 용공세력의 준동이라고 비판하면서 군부통치를 옹호하는 역할을 했다. 김준곤은 1966년 미국 조찬기도회를 모방해 '밤낮없이 일하시는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대통령 조찬기도회'를 주관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했고 이듬해인 67년에는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것은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켰기 때문"이라며 노골적으로 독재정권을 찬양했다. 김준곤과 조용기는 1969년 8월 15일 김재준, 박형규 목사, 함석헌 등 기독교 진보인사들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을 반대운동을 하는 성명을 내자 9월 2일 박형룡, 김유찬 등 242명의 기독교 보수인사들과 함께 '개헌문제와 양심자유선언'을 발표하면서 진보인사들의 선언을 "순진한 성도들의 양심의 혼란을 일으키는 선동적 행위"라고 비난하고 교회는 정치적 문제에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9월 5일 '대한기독교연합회'라는 단체 명의로 발표된 '개헌에 대한 우리의 소신'이라는 성명에 서명하면서 3선 개헌을 지지해 자신들의 정치적 중립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1972년 발표된 10월 유신으로 박정희 정권과 기독교 진보세력과의 갈등이 커지고 1973년 남산 부활절예배 때 반정부 유인물 배포사건이 발생하자 5월 1일 김준곤은 교계 보수인사들을 규합해 유신의 앞날을 축복하는 열린 제6회 국가조찬기도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김준곤은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설교했다.
1975년 김장환은 박정희 정권이 캄보디아와 베트남의 공산화를 핑계로 4월 9일 인혁당 관련자에 대한 사형, 5월 13일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을 원천 봉쇄하는 긴급조치 9호 선포, 미국인 조지 오글 목사와 시노트 신부에 강제추방 등으로 국제여론 특히 미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벽산그룹 회장이자 교회 장로였던 김인득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목사 중에 구속된 사람은 그 사람이 순수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아닌 정치 목사"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김준곤도 1975년 5월 서울 정동 CCC 대강당에 학생 1천여 명을 동원해 반공구국기독학생운동 특별기도회를 열어 "나라를 위해서는 순국을, 주님을 위해서는 순교를, 공산주의자들의 무력도발에는 육탄으로 맞서는 의지를 가지고, 반공의 면역체가 되고 전도의 새 종족이 될 것"을 다짐했다. 순복음교회 당회당이었던 조용기 목사도 같은 해 6월 장충체육관에서 '민족복음화와 국가안보'라는 제목으로 대중집회를 열어 유신지지 집회를 개최했다. 이처럼 조용기, 김준곤, 김장환 등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활용해 민주화운동을 용공세력으로 비난하는 대규모 부흥집회를 개최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를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의 열렬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전대통령은 자신의 부하였던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국민과 소통부재, 이 대통령도 실패할 가능성 높아져
박정희가 암살당한 후 군부 내의 암투 끝에 전두환을 중심으로 신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자 이번에도 보수기독교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1980년 8월 6일 기독교 유명목사들은 그해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무참하게 짓밟은 전두환을 위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개최했다. 이 날 조찬 예배는 정진경 당시 성결교 증경총회장(현재 신촌성결 교회 원로 목사)은 전두환은 막중한 직책을 맡아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제거하고 정화해준 인물로 극구 찬양하고 남북통일과 대한 민국의 번영, 민주화 실현 등 민족의 열망들을 이루는데 큰 일꾼이 되어 그 업적이 후세에 영원히 남길 바란다고 축원했다.
정진경 목사외에도 문만필 목사(전 보안사 군목), 조향록 기장 총회장(초동교회 원로목사), 김지길 감리교 감독 회장(아현교회 원로목사), 김인득 장로(전 벽산 그룹 회장), 한경직 예장 통합 증경총회장(작고, 영락교회) 등이 사회, 설교 등의 순서를 맡았고 강신명 새문안 교회 담임 목사(작고), 김창인 예장 합동 증경총회장(충현교회 원로목사), 김준곤 목사(전 CCC총재) 등이 배석했다.
전두환 정권의 탄생에 적극 동참했던 기독교 보수세력은 1989년 한기총을 결성해 역시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주역인 노태우 정권을 지지하는 데 앞장섰다. 이때 한경직 목사가 한기총의 대표 회장을 맡았으며 정진경, 조향록 목사 등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이들이 그토록 찬양해마지 않았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결국 12.12와 5.18 내란 및 군사반란 모의, 주요임무 종사자로 기소된 후 법정에 섰고 이후 거의 연금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 유지에 적극 동참했던 기독교 세력들은 그 어떤 반성도 없이 이번에는 민자당 김영삼후보를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충현교회 장로였던 김영삼을 당선시키기 위해 <장로대통령만들기>를 명분으로 내걸고 전국적인 조직을 만들어 당선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1992년 2월 대선을 앞두고 조용기 목사는 한국 정치는 기독교가 일어나서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회의원은 기독교인이, 대통령은 장로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독교의 무차별적인 지원으로 당선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중에 외환위기를 초래해 국가와 국민들을 도탄에 빠뜨려 이승만이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무능한 인물로 꼽히는 수모를 당했다.
김영삼 정권이후 역대 처음으로 자신들과 반대입장을 가졌던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 기독교 보수세력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용공좌경정권으로 규정하고 수구세력과 연대해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면서 정부를 압박했다. 특히 사학법개정에 대해서는 한나라당과 함께 전교회적으로 정권타도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2007년 대선때는 소망교회 장로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대통령에 옹립하기 위해 제2차 장로대통령만들기에 나서 결국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기독교 보수세력의 지원을 등에 없은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내각과 청와대를 이른바 고소영으로 불리는 편중인사를 단행해 물의를 일으켰고 기독교 중심의 종교편향정책으로 불교계와 큰 마찰을 빚기도 했다. 또한 광우병위험이 위험이 있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해 촛불시위를 불러일으켰고 종부세 폐지 등 소수 특권층 위주의 정책을 펼쳐 사회양극화를 심화시키고 있다.
한편 제국주의침탈을 받은 나라에서는 유래가 없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면서 일제침략을 옹호하고 이승만․박정희 등 독재권력을 정당화하는 뉴라이트 세력의 역사관에 동조해 역사교과서를 수정하는 작업을 강행하기도 했다. 이후 KBS장악, 인터넷에 대한 규제, 미디어법 강행처리시도, 각종 집회에 대한 물리적 탄압 등을 통해 헌법에 보장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훼손시키고 있다. 결정적으로는 노 전대통령의 서거에 원인의 제공해 국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국민들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고 지지율이 폭락하자 이대통령은 국면전환을 위해 서민들을 끌어안겠다고 했지만 이미 경제는 파탄상태에 이르러 이를 믿는 국민들은 많지 않다. 말과 행동이 다르고 이미지정치를 통해 국면을 돌파하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주류 기독교 목사들은 이대통령에 대한 그들의 일방적 사랑(?)을 멈추지 않고 있다. 자신들의 이해와 요구에 맞는 역대 독재권력과 장로 대통령을 지지해온 기독교 보수세력은 돈과 교세를 바탕으로 여전히 위력을 과시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도는 최악이어서 이대통령처럼 소리를 내면 낼수록 역효과만 낼 뿐이다.
이처럼 기독교 보수세력이 지지한 역대 대통령들이 비참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들 정권이 국민 대다수의 이익을 저버리는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제외하고 역대 모든 정권들은 친일-친미-군부-친재벌에 기반을 둔 기득권 세력의 지지를 받고 탄생했다. 이들은 소수 특권층을 위해 노동자-농민들의 고혈을 짜고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민들을 군과 경찰, 검찰, 사법부를 동원해 탄압하는 등 절대권력을 행사하다가 결국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주류 기독교 세력 역시 친일-친미-반공을 모토로 정권을 비호하면서 교세를 성장시켜켰기 때문에 역대 정권의 비리와 부패를 눈감고 지지를 계속하다 교세가 줄고 젊은 층으로부터 개독교로 불리는 등 큰 망신을 당하고 있다. 종교가 본연의 임무를 무시하고 정권과 한통속이 되면서 같이 몰락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정권은 유한하지만 교회는 영원하다고 주장했던 주류 기독교세력도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사필귀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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