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평리 석불좌상이 화풀이를 하는 건가?

[다 같이 돌자 문경 한 바퀴: 비지정 불상과 석탑을 찾아] ③ 불상

등록 2009.07.01 10:32수정 2009.07.01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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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평리 5층석탑은 축소 비율이 일정하다

 

a  갈평리 5층석탑

갈평리 5층석탑 ⓒ 이상기

갈평리 5층석탑 ⓒ 이상기

 

성불암에서 문경읍소재지로 나온 우리는 금강산 가든에서 식사를 한다. 왜냐하면 앞으로 답사할 곳이 전부 오지인지라 밥 먹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 비가 세차게 와서 밥을 먹으면서 날이 좋아지기를 기다리는 의미도 있다. 이 식당이 문경에서는 음식을 잘 하는 집인지 사람들이 꽤 많다.

 

점심을 먹고 우리는 이제 문경의 옛길 하늘재 쪽으로 향한다. 그곳으로 가면서 갈평리와 관음리의 탑과 불상을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가는 길에 보니 도로공사가 한창이다. 이곳 용연리에 농업용 저수지인 문경저수지를 만든다고 한다. 동네 이름이 마치 저수지 축조를 예상한 듯 용연(龍淵)이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동네 이름이 미래를 예측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저수지를 만드는 작업보다 산 쪽으로 우회도로를 내는 일이 더 큰 것 같다. 조금씩 내리는 비와 도로 작업 때문에 길이 좋지 않지만 우리는 갈평리 5층석탑을 찾아간다. 갈평리는 하늘재와 동로면 방향이 갈라지는 삼거리 지역이다. 갈평리 5층석탑은 이곳 문경읍 갈평리 갈평출장소 안에 있다.

 

a  모서리가 깨진 갈평리 5층석탑

모서리가 깨진 갈평리 5층석탑 ⓒ 이상기

모서리가 깨진 갈평리 5층석탑 ⓒ 이상기

 

출장소 안에 탑이 있다니! 의아해 물어보니 원래 관음리 관음사지에 있던 탑이라고 한다. 1935년 반출되었는데 다시 되찾아 이곳에 갖다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출장소 안 주차장에 차를 대고 5층석탑을 살펴본다. 높이가 2.7m 되는 크지 않는 석탑이다. 모양이 단아하면서도 비교적 세련되어 보인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옥신의 형태가 사다리꼴로, 위로 올라가면서 일정한 비율로 축소되어 있다. 그 때문에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탑의 안정감은 사다리꼴에도 있지만 1층 몸돌의 받침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 탑에도 아쉬움은 있다. 1층 기단 갑석의 모서리 일부가 깨져나갔고, 1층과 5층의 옥개석 일부도 깨져 나갔다. 상륜부도 많이 파손되어 노반과 복발만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탑이 참 소박하고 아름답다. 요즘 많이 쓰이는 말로 고려시대 지방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갈평리 5층석탑은 경북 유형문화재 제185호로 지정되어 있다. 

 

갈평리 석불좌상님이 노하셨나?

 

a  갈평리 석불좌상

갈평리 석불좌상 ⓒ 이상기

갈평리 석불좌상 ⓒ 이상기

 

갈평리에서 관음리로 향하다 보면 길 왼쪽에 보호각이 하나 나타난다. 이곳에 석불좌상이 있다. 우리는 길옆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부처님을 보러 간다. 이 부처님의 공식 명칭은 갈평리 석불좌상이다. 아직도 비가 조금씩 내려 우산을 써야 한다. 보호각 문을 열고 보니 안에 화강석의 돌부처님이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때가 많이 탄 연화대좌와 깨끗한 석불좌상이 대조적이다. 연화대좌의 앙련조각이 석불좌상보다 훨씬 더 분명하고 선명하다. 연화대좌 위의 부처님 옷은 우견편단이다. 왼손에 약함을 들고 있으니 약사여래부처님이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09㎝이고, 연화대좌의 크기는 가로 106㎝ 세로 82㎝이다. 그런데 우리 회원들이 이 좌불상을 보는 과정에 문제가 생겼다.

 

a  갈평리 석불좌상

갈평리 석불좌상 ⓒ 이상기

갈평리 석불좌상 ⓒ 이상기

 

길 쪽에서 뻥 또는 꽈당하는 소리가 들린 것이다. 길 쪽을 바라보니 오토바이 사고가 일어난 모양이다. 넘어진 오토바이에서 젊은이가 일어나는데 일어나자마자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는다. 문화유산 답사도 좋지만 사람이 다친 것 같으니 우리 회원들이 달려간다. 가까이 가 보니 주차한 차 뒤에 부딪친 다음 넘어진 것이다. 고등학생인 그 젊은이가 비가 오니까 머리를 숙이고 전방 주시를 태만히 한 것 같다.

 

우리를 안내한 김경식 선생이 119에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부른다. 또 젊은이의 아버지에게도 전화를 해 상황을 알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에서 우리 모두는 초조한 마음으로 구급차를 기다린다. 그 동안 우리 차를 살펴보니 뒤 범퍼가 찌그러들고 왼쪽 미등이 조금 깨졌다. 지금까지 문화유산 답사를 다니면서 이런 사고를 당하기는 처음이다. 석불좌상이 그동안 대우를 못 받아 우리에게 화풀이를 한 건가?

 

얼마 후 구급차도 오고 젊은이의 아버지도 오고, 우리 회원도 차의 파손된 부분을 자신이 고치겠다고 해서 무난히 사태가 수습되었다. 비가 오는데도 이렇게 열심히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정성 때문에 탱화를 보는 행운을 누렸나 했더니 또 교통사고를 당하는 불운도 만났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상(無常)이고, 유교식으로 말하면 인간만사 새옹지마다.

 

관음리 석불입상이 어머니라고 하지 아마

 

a  보호각 안에 들어있는 관음리 석불입상

보호각 안에 들어있는 관음리 석불입상 ⓒ 이상기

보호각 안에 들어있는 관음리 석불입상 ⓒ 이상기

 

석불좌상을 보고 우리는 다시 관음리 석불입상으로 향한다. 석불입상은 하늘재로 이어지는 길 오른쪽 사과밭 가운데 있다. 작은 도랑을 건너 사과밭을 지나니 역시 보호각 안에 키가 큰 석불입상이 서 있다. 높이가 3.5m나 된다. 과거에는 그냥 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는데 최근에 보호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보호각을 설계한 사람이 오늘 함께 답사를 하는 건축사 신종기 선생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 선생은 관음리 석불입상과 갈평리 석불좌상에 대해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전해준다. 이 두 석불이 원래는 모자관계였다고 한다. 이들 모자는 남편과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구하려 사방을 돌아다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는 약을 구해 집으로 돌아왔고 아들은 구하지 못해 갈평리에서 어머니를 바라보며 앉아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석불좌상은 북쪽인 관음리 쪽을 바라보고 있고, 석불입상은 남쪽인 갈평리 쪽을 바라보고 있다.

 

a  관음리 석불입상

관음리 석불입상 ⓒ 이상기

관음리 석불입상 ⓒ 이상기

 

관음리 석불입상은 미학적인 면에서는 볼품이 없다. 얼굴은 마모가 심해 이목구비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몸체와 목이 분리되어 있던 것을 콘크리트로 붙였다. 어깨에서 아래로 드리워진 법의는 통견으로 양쪽으로 흘러내렸다. 오른손은 다리부분까지 내려진 상태고 왼손은 구부려 뭔가를 들고 있다. 이게 보주로도 보이고 약함으로도 보인다. 그래서 이 부처를 약사여래로 보고 있다.

 

또 이 석불입상 주변에서 와편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이곳에 절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동국여지승람>문경현 조에 보면 관음사가 나오는데 그 절터를 이곳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이 지역의 이름 관음리도 관음사라는 절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관음리 마애반가사유상은 자비로운 미소를 숨기고 있다

 

a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명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명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 ⓒ 이상기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명상에 잠겨 있는 반가사유상 ⓒ 이상기

 

관음리 마애반가사유상은 정말 안내자 없이는 찾기가 어렵다. 관음리 문막 마을로 들어선 다음 좁은 길을 따라 사과밭 속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안내자인 김경식 선생을 따라가면서도 앞차를 놓칠 정도로 길이 꼬불꼬불하고 좁다. 또 차를 가지고 가도 차를 돌릴 곳을 찾아야 한다. 우여곡절 끝에 차를 세우고 반가사유상을 보러 간다.

 

이제 비가 그쳐 편안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마애불은 암벽에 만들어지는데 이 부처님은 독립된 돌에 새겨져 있다. 얕은 돋을새김으로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미소는 정면에서보다 측면에서 볼 때 좀 더 분명해 보인다. 가는 눈, 오똑한 코, 두터운 입술, 통통한 볼이 자비로운 상호를 만들어낸다.

 

a  측면에서 바라 본 반가사유상

측면에서 바라 본 반가사유상 ⓒ 이상기

측면에서 바라 본 반가사유상 ⓒ 이상기

 

오른손으로 턱을 받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의자에 걸터앉은 모습은 마모가 심해 분명치 않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경건성과 예술성이 느껴지는 걸작이다. 그러면 이 부처님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을까? 옮겨진 것 같다. 왜냐하면 마애불은 대개 암벽에 새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의 아랫부분이 가로로 깨져있는데 이것도 역시 옮기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문화재 중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 몇이나 될까? 이름 없는 비지정 문화재일 경우 제자리를 떠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진다. 

2009.07.01 10:32ⓒ 2009 OhmyNews
#갈평리 5층석탑 #갈평리 석불좌상 #관음리 석불입상 #관음리 마애반가사유상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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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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