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 발인을 하루 앞둔 28일 오전 경남 김해 봉하마을 분향소 공사 현장 가림막에 추모글을 붙여있자 지나가는 추모객들이 서서 읽고 있다.
유성호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하기 전부터 봉하마을에 자주 들렀다. 역시 트럭에 펼침막을 붙여 마을 주차장에 세워놓기도 했고, 마을 곳곳에 각종 주장과 호소하는 내용을 담은 펼침막도 내걸었다.
오해를 많이 받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한 뒤 생가 입구에 베니어판 12장을 나열하듯 설치해 놓고 방문객들이 소감이나 격려의 글을 적도록 했다. 그런데 며칠 뒤 와서 보니 베니어판이 없어졌더라는 것. 공사를 하면서 포클레인으로 파서 묻어 버렸다고 한다.
그는 "아마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노 전 대통령과 관련한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 되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그게 바로 국민의 소리인데, 치워버렸던 것"이라며 "베니어판이 없어진 사실을 알고 봉하마을에 와서 흥분하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는데, 노 전 대통령한테는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린다고 보고가 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술을 입에 대지도 못한다. 봉하마을에서 그를 만나 자주 연락하는 정연하(58)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 고문은 "최씨야말로 진정 용기있는 사람으로, 이전에 노 전 대통령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할 때 그는 한결 같은 마음이었다"면서 "여러번 그를 만났지만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으로, 방문객들이 소감을 적을 수 있도록 한 베니어판이 없어졌다는 말을 듣고 답답했다"고 말했다.
또 최씨는 봉하마을에서 장사해서 돈을 벌려고 한다는 오해도 받았다. 그는 "정말 봉하마을 사람이 되어 노 전 대통령을 위한 일도 하고 봉사하면서 살고 싶었다"면서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저의 뜻과 상관없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그를 가족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부인과 딸 넷에 사위도 있다. 그는 "집사람뿐만 아니라 사위들도 좋아하지 않았다"면서 "돈도 생기는 일이 아닌데다 돈을 쓰고 다니니 더 그랬던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노 전 대통령 서거 뒤 그래도 지금은 좀 나은 편"이라고 덧붙였다.
노 전 대통령 귀향 3개월 뒤 사저에서 처음 만나이랬던 최점금씨가 노 전 대통령을 '독대'한 것은 딱 한번뿐이다. 노 전 대통령이 귀향한 지 3개월 정도 지나서였다. 최씨가 했던 일들이 노 전 대통령한테 알려진 것이다. 최호철 전 비서관과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사저로 '초대'받아 갔던 것.
그는 "노 전 대통령을 만나 '귀향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서울에 집을 두고 봉하마을에서 한두번 다녀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실제 귀향해 주셔서 고맙다'고 했다"면서 "봉하마을 땅 한 평만 주면 물건을 팔아 봉사도 하고 마을을 위해 쓰겠다고 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2009년 5월 23일 아침. 최씨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노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소식을 듣고 곧바로 부산에 있는 부산대병원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노무현 죽었으니 이제 부산사람들 박수 치겠네"라며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다시 노 전 대통령이 양산부산대병원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동했다. 김해 진영읍에 있는 펼침막 제작업체로 가서 10m 길이의 펼침막을 만들어 양산으로 갔던 것. 거기서도 그는 울면서, 때로는 고함을 질렀다. 노 전 대통령의 서거를 누구보다 서러워했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냐"고 했더니 예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떨어졌던 봉화산 부엉이바위에 가서 떨어져 죽을 거다"고. 그는 "지금 마음은 자살하고 싶다는 것 뿐"이라며 "노 전 대통령은 혼자 고초를 당하셨고, 저는 못 배웠지만 노 전 대통령이 잘한 일이 많다는 사실을 알리는 일을 해 왔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또 해야지"라고 말했다. 49재 뒤 노 전 대통령이 잘했던 일들을 펼침막에 낱낱이 적어 트럭에 매달아 전국을 다닐 것이라고 한다.
"노 전 대통령 잘한 일 적은 펼침막 매달고 전국 다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