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인혁당 재심과 연쇄살인의 서막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5회) '돈을 밝히지 않는 여자' 편

등록 2009.07.13 09:44수정 2009.07.13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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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경은 차분한 어조로 외삼촌에게 물었다.

"삼촌, 잠깐만요. 혹시 우리 아빠가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8명 중의 한 분이라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닌지요?"

옆에서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에 놀라는 빛이 나타났다. 외삼촌은 무겁게 턱을 움직였다.

"알고 있었구나."
"어제 신문을 본 순간부터 왠지 우리 아빠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 죽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네 아빠는 평범한 대학 강사였다."
"삼촌, 그렇다면 우리 아빠는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어요. 그때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은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했다고 하더군요."

"맞다. 일본 놈들도 그렇게 애먼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고 하더라."
"삼촌, 저는 아빠를 죽인 사람들한테는 관심이 없었어요. 아빠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랐었으니까요. 제가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단지 나의 아빠일 뿐이어요. 그리고 30년을 혼자 살아오신 우리 엄마이고요."

외삼촌은 잠시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왠지 수경의 말에 섣불리 동의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느 면에서 그것은 아름다운 생각이다. 현실적인 생각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의 사색 끝에 조수경은 그런 아버지의 딸로서 경찰이 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아버지를 죽인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기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그들의 공소시효는 끝난 지 오래였다. 분명히 어머니와 외삼촌은 인혁당 사건 재심 공판장에 다녀왔을 것이라고 생각 들었다. 조수경은 인혁당 사건으로 인해 아버지가 죽은 것일지라도 자기에게는 그 일에 관여할 권한이나 능력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녀는 30년 전의 일은 어머니와 외삼촌에게 맡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증거도 없이 사형수가 되었고, 판결 당일에 전격적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죽었다고 했다. 조수경으로서 그것은 믿을 수도 없었고 믿어지지도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독재정치 치하의 공권력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녀는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었다.

- 증거가 없으면 범죄도 없다.

이것은 과학수사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누누이 강조되는 말이었다.

제3장. 돈을 밝히지 않는 여자

사무실에 들어가 커피를 채 두 모금도 마시기 전에 수사부장은 조수경을 호출했다. 용 부장의 얼굴에는 어제보다 더 두터운 수심이 배어 있었다.

"판교 사건 보고가 올라왔어."

용 부장은 책상에 놓여 있던 두터운 서류뭉치를 집어 조수경 쪽으로 놓았다.

"검토하고 나서 다시 얘기하자고."
"알겠습니다."

조수경은 서류를 두 손으로 집었다. 용 부장은 어서 가 읽어 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문을 나서려던 조수경은 고개를 돌려 부장에게 물었다.

"부장님, 요즘 무슨 걱정거리가 있으신지요?"

용 부장은 말없이 조수경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하군. 사적인 일을 부하에게 들키다니."

조수경은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상대가 사적인 일이라고 선을 긋고 나오는 데야 달리 방도가 없기 때문이었다. 조수경은 용 부장의 부부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장의 부인은 허구 한 날 골프에 미쳐 돌아다닌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가정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했다. 노골적으로 외간 남자들과 해외 골프투어를 하는 일도 종종 있다고 했다. 언젠가는 용 부장이 골프채를 다 분질러 버린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이혼을 요구한다고 했다.

용 부장에게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아들이 있었다. 그것은 용 부장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라고 했다. 다른 속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조수경이 보기에 용 부장은 남자로서, 아버지로서, 그리고 직장인으로서 별반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조수경은 그들 부부의 문제가 더 심각해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던 조수경은 문득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부장에게 받은 서류를 읽기 시작했다. 서류에는 부장 말대로 신문에서 본 판교 사건이 담겨 있었다.

사건 현장에서는 어떤 증거물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여인의 사체는 완전한 알몸이었다. 범인의 혈흔이나 지문은 물론 족적도 없었다. 여인은 예리한 것으로 심장이 찔려 죽었는데, 그것이 칼인지 아니면 송곳이나 꼬챙이 같은 것인지조차도 확실히 판별할 수 없었다. 그만큼 여인의 가슴에 난 자상(刺傷)은 경찰로서 처음 접해보는 요상한 자국이라고 했다.

결국 칼도 아니고 송곳도 아니며 꼬챙이도 아니라면 그것은 특수 제작된 흉기일 가능성이 높았다. 사체에는 손상이 전혀 없었고 성폭행 징후도 없었다. 하지가 경직되었고, 배꼽 주위와 사타구니 피부가 조금 변색되어 있으며, 여러 군데에 부패포가 나타나 있었다고 했다. 아직 구더기나 번데기가 생기지 않은 것으로 보아 사망 시간은 사체 발견 전 3 ~ 7일 정도로 추정된다고 했다.

사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모류(毛類, 털 종류)가 발견되었는데, 국과수(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 결과 그것은 사람의 털이 아닌 강모(剛毛, 짐승의 빳빳한 털)로 판정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여자의 가슴 위에 씌어 있는 글씨였다. 검은 매직펜으로 쓴 영문 대문자 글씨였는데, 신문에서 본 대로 GREED와 B.K.였다. 잉크 성분을 데이터베이스에 맞춰 본 결과, 매직펜은 한국 유명 문구 회사인 A사의 제품으로 판정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A사의 매직펜을 취급하는 문방구만 해도 전국에 수만 군데 이상이라고 했다.

다행히 여자의 신원은 우여곡절 끝에 확인되었다. 이전에 실종신고된 사람 중에서 피살된  여자와 나이가 비슷한 한 여자의 집에서 찾아낸 머리카락을 채취하여 추출한 유전자를 피살자의 유전자와 비교하는 방법을 썼다고 했다. 물론 가족들은 피살자의 얼굴을 보고 머리를 끄덕였었다. 하지만 물증을 남기기 위해서 피살자의 유전자를 머리카락의 유전자와 맞춰본 것이었다.

피살된 여인은 어마어마한 부동산 재력가였다. 그녀가 서울 강남권과 신도시에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만도 10여 채 이상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녀는 충남 연기군에도 차명으로 노른자위 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철거 아파트 딱지를 수십 장이나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강남과 신도시권 부동산 업자들에게는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유명 복부인이었다.

덧붙이는 글 |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이 소설은 주 2~3회씩 금년 말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덧붙이는 글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이 소설은 주 2~3회씩 금년 말까지 연재될 예정입니다.
#인혁당재심 #연쇄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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