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서 한글을 배우다

이주여성들의 한글학교, 누리마로 지구촌학교를 가다

등록 2009.07.14 14:27수정 2009.07.14 14:32
0
원고료로 응원
a 손에 손잡고 충남 태안군의 지역자생봉사단체인 (사)태안반도안면청년회가 운영하는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글학교 누리마로지구촌학교의 등굣길.

손에 손잡고 충남 태안군의 지역자생봉사단체인 (사)태안반도안면청년회가 운영하는 이주여성들을 위한 한글학교 누리마로지구촌학교의 등굣길. ⓒ 정대희


늘어나는 시골마을의 다문화가정... 이주여성 증가 

시골마을의 다문화가정 확산은 가히 '속도전'이라고 할 만큼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반면 농촌 총각과 결혼해 가정을 이룬 이주여성들은 아직까지 마땅히 갈 곳이 없다.


외출도 쉽지 않다. 국제결혼이 늘기 시작한 초기, 각종 언론매체에서 이주여성들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 위장결혼을 일삼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부정적인 인식이 짙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시골마을에는 수백 가구의 다문화가정이 존재하고 있는데도 이들 가족이 대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을 관찰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근데 일주일에 꼭 두 번. 더구나 화목하고 웃음이 넘치는 다문화가정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하기에 지난 3일 찾아가 봤다.



세상의 중심(?), 누리마로 지구촌학교에 가다



시골의 여름은 길어진 낮 시간대에 비례해 노동시간도 늘어난다. 흔히들 대도시에서 하던 사업이 실패하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짓는다'고 말하지만 농사일이라는 것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다. 겨우내 꿀맛 같은 휴식을 느끼기도 잠시, 농사가 시작되면 좀처럼 '짬'을 낼 수가 없다. 그래서 자식을 키우는 것도 농사에 비유해 '자식농사 짓는다'라는 말로 어려움을 빗대지 않았는가.

해가 질 무렵 아직은 눈이 어둠보다는 밝은 빛에 익숙해 시야가 좁아지던 그때 멀리서 트럭 한 대가 기자 앞에서 멈춰 선다. 이윽고 트럭에서 내린 일가족으로 보이는 형체가 눈앞으로 다가와 어색한 한국말로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얼굴에 웃음이 한 가득이다.


지역자생봉사단체인 충남 태안군의 (사)태안반도안면청년회(회장 이경신)가 운영하는 '누리마로 지구촌학교'는 지난 2006년 5월에 설립한 한글학교로 이주여성을 위한 한글교육과 문화교육, 자녀교육 등을 하는 곳이다.

'누리마로'란 학교명은 세상을 뜻하는 '온누리'와 마루의 옛말인 '마로'를 합친 순 우리말 합성어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찾는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청년회는 '누리마로'가 '세상의 중심'이란 뜻을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마루'의 일반적인 의미가 지붕 혹은 산 따위의 꼭대기나 하늘 등을 뜻하기에 이는 잘못 이해하고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어떠하리! 꿈보다 해몽이다. 비록 단어를 잘못 이해하고 사용했다고 한들 이름만 좋다. 오히려 세상 꼭대기란 해석도 그곳엔 차별 없이 누구나 평등하게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그래도 부족하다면 최초 설립한 청년회의 뜻을 반영해 '이주여성들, 세상의 중심에서 한글을 배우다'라는 말로 전체 기사내용을 함축해 표현한다.

a 동네 한 바퀴 웬만한 의사소통에도 별 무리가 없는 중급반 학생들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 위주로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들은 은행, 서비스센터, 우체국 등을 차례로 가상으로 둘러봤다.

동네 한 바퀴 웬만한 의사소통에도 별 무리가 없는 중급반 학생들은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언어 위주로 교육을 받는다. 그래서 오늘도 그녀들은 은행, 서비스센터, 우체국 등을 차례로 가상으로 둘러봤다. ⓒ 정대희


학교종이 '땡땡땡', 그들만의 수업속으로

한글교육은 일주일에 화요일과 목요일 두 차례에 걸쳐 저녁 7시 30분부터 두 시간 동안 운영되는데 안면도 일대 현직교사들이 모든 강의를 맡고 있다.

이경신 회장은 "언제부턴가 갑자기 지역에 다문화가정이 늘어나면서 언어문제와 문화차이로 힘들어 하는 이주 여성들이 늘어나 뜻 있는 교사들과 함께 한글학교를 운영하게 됐다"며 "지역구성원으로써 다문화 가정을 이해하고 이들의 사회참여를 돕는 것은 결국 모두가 행복하고 잘 사는 지역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저녁 7시 20분. 수업시간이 가까워지자 오토바이, 자가용 등 각종 이동수단이 학교 입구에 모여든다. 학생들 대부분은 남편과 아이를 대동하고 학교를 찾았다.

이윽고 수업이 시작됐다. 누리마로 지구촌 학교의 전교생은 16명이지만 오늘 출석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하는 7명이 전부다. 농번기에는 일손이 바빠 출석이 저조하다고는 한다.

그래도 학교에 등록된 학생들의 가정은 행복한 축에 속한다. 청년회 관계자는 남편과 시댁식구들의 이해와 배려가 없는 가정은 이주여성들의 외출 자체를 꺼려한다고 귀띔했다.

이날 수업은 초급반과 중급반으로 나눠서 진행됐다. 학급을 나눴다고 해봐야 교실이 별도로 마련된 것은 아니고 조립식 건물 내부에 칸막이를 설치한 것이 전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급반에서 수업을 받더라도 초급반 학생들이 받는 학습 내용이 귓가에 들려오고, 반대로 중급반 수업은 칸막이 사이로 전해져 초급반 학생들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모니카, 윌마, 징글, 카리마, 젤라 등은 모두 중급반 학생들이다. 학교가 설립되고 나서 꾸준히 학업 생활을 이어온 이들은 대화를 주고받기에 어려움이 없었다.

반대로 옝과 레오노라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어와 한국어를 혼용해서 사용해서 한글교육을 받고 있었다.

보통 외국어를 접할 때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배운 후에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말들을 배우듯 중급반 학생들의 수업도 은행에 가서, 서비스센터에 가면, 우체국 방문해서, 쓰레기 버리는 방법 등 실생활 언어를 배우는 동시에 문화도 배우고 있었다.

교과서는 연세대외국어학당에서 펴낸 교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인근에 위치한 안면도농협 전용국 조합장이 핌 프로젝트를 기증해 인터넷을 활용한 교육도 진행하고 있다.

충남 태안군 안면고등학교 최원범 교사는 "일반 학생들도 그렇듯 수업이 재미없으면 듣지 않고 딴청을 부리는 사람이 많아 목소리 톤도 크게 하고 과장된 몸동작도 서슴지 않고 있다"며 "최근에 인터넷을 활용해 수업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반 가정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처럼 애니메이션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a 한지붕 두 교실 이주여성들이 한글교육을 받고 있는 교실은 조립식 건물 내부에 칸막이를 이용해 교실을 둘로 나눈 것이 전부다. 이날 초급반 학생들은 주구장창 '애국가'를 열창했다.

한지붕 두 교실 이주여성들이 한글교육을 받고 있는 교실은 조립식 건물 내부에 칸막이를 이용해 교실을 둘로 나눈 것이 전부다. 이날 초급반 학생들은 주구장창 '애국가'를 열창했다. ⓒ 정대희


넌 아직도 '애국가' 부르고 있니?

중급반 학생들이 동네를 한 바퀴 다 돌고 애니메이션을 시청하기까지 초급반 학생들은 주구장창 '애국가' 열창이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학창시절 조회시간과 군복무시절 아침점호를 거쳐 이제는 각종 의식행사에까지 줄곧 부르고 있어 무미건조해진 애국가. (심지어 TV 정규 방송프로그램이 끝나도 흘러나온다.)

굳이 힘들게 입을 열지 않아도 도입 부분 간주가 끝날 때면 흡사 커피자동판매기에 동전을 넣으면 나오는 값싼 커피와 같이 자동반사적으로 뱉어내던 단어들이 왠지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동해물'이란 단어를 입에서 채 뱉어내기도 전에 수업을 듣고 있던 초급반 학생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동해물이 뭔데요?" 기자도 갑자기 말문이 막힌다. 마음속으로만 생각한다. "동해물? 동해에 있는 바닷물이 동해물 아닌가?"

이어진 질문은 더욱 당황스럽다. "동해물하고 백두산이 마르고 닳는다니요? 무슨 뜻입니까?" 어색한 한국어를 읊조리며 겨우 물어본 질문에 선생님도 즉각 대답을 하지 못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란 단어는 그럭저럭 설명하다고 해도 '마르다', '닳는다'란 표현을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킬 것인가? 초급반 학생들의 수업이 쉬울 줄 알고 기웃거렸는데, 더 어려운 것 같다. 설명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그래도 역시 현직 교사는 기자와는 달랐다. 다양한 표현과 방법을 동원해서 비슷한 느낌의 단어를 계속해 설명하니 학생들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한 수 배우는 순간이다.

힘겨운 단어 설명이 끝나자 곧바로 또 다시 다함께 합창한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순간 지금까지 애국가를 제대로 음미하지 못한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칸막이를 젖히고 중급반으로 몸을 옮겼다.

a 받아쓰기 시험 수업의 대미를 장식한 받아쓰기 시험 시간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커닝 사건이 발생했다.

받아쓰기 시험 수업의 대미를 장식한 받아쓰기 시험 시간에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커닝 사건이 발생했다. ⓒ 정대희


시험의 묘미 '커닝', 국적을 초월하다

칸막이를 넘어 중급반으로 들어서자 이주여성들의 한글 받아쓰기 시험이 시작됐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그토록 기자를 괴롭혔던 것이 받아쓰기 시험이었다. 기자는 그 시절 항상 나머지 공부를 하고 나서야 시험에 통과해 또래 아이들과 달리 오후가 돼서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순간이다.

시험이라는 것은 항상 부담스러운 존재다. 이는 남들과 나를 비교하는 좌표로 시험성적이 사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남보다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는지 여부가 상대적으로 남보다 내가 얼마나 우월한지를 보여주는 기회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행위도 자주 일어난다.

속칭 '커닝'은 시험의 묘미다. 커닝 없는 시험은 '팥 없는 붕어빵'이요, '강호동 없는 1박 2일'이고, '유재석 없는 무한도전' 등과 같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또한, 커닝은 성공과 실패에 관계없이 그것 자체가 주는 흥미와 스릴에 온몸에 전율이 감돈다. 그래서 한 번 커닝을 해 본 사람은 또 다시 커닝을 하게 된다. '도둑질도 해 본 놈이 한다'는 옛말처럼….

이날 수업의 대미를 장식한 받아쓰기 시험에서도 커닝을 하는 순간이 기자의 눈에 포착됐다. 아주 짧은 순간, 이날 수업을 진행한 교사가 받아쓸 문장을 읽던 찰나 미리 접어둔 책장을 들추는 빠른 손길과 정확히 받아써야 할 문장을 향해 커진 눈동자. 정말이지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커닝을 알아채는 사람은 없었다.

소원을 말해봐, 비비디 바비디부

수업이 끝난 밤 9시 30분. 교실밖에는 아내와 엄마를 기다리는 남편과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밤이 늦었지만 모두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벌써 야외 탁자 위에는 주문한 피자와 통닭이 차례로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주여성들은 한글학교에 다니면서 자체적으로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고 한다. 깊어가는 여름 밤. 이날 이들에게 소원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주여성들은 입을 모아 "고국에 가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의 남편들은 "다문화가정에 대한 보다 많은 관심과 지원이 있기를 바란다"고 합창했다. 그리고 청년회원들은 "보다 많은 이주여성들이 한글학교를 찾아와 멀리 타향에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기자는… "이들이 소원하는 모든 일들이 다 이뤄지길 바란다. 비비디 바비디부~"
#태안 #이주여성 #다문화가정 #한글교육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얼굴 창백한 계산원을 보고 손님이 한 행동
  2. 2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유럽인들의 인증샷 "한국의 '금지된 라면' 우리가 먹어봤다"
  3. 3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일타 강사처럼 학교 수업 했더니... 뜻밖의 결과
  4. 4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꼭 이렇게 주차해야겠어요?
  5. 5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알고도 대책 없는 윤 정부... 한국에 유례 없는 위기 온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