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2009.07.22 14:59수정 2009.07.22 14:59
숨이 콱콱 막히고 곧 죽을 것 같았다. 어찌나 날씨가 더운지 찜통에 들어간 영계의 심정이 절절이 이해될 정도였다. 분명 눈은 깼는데 몸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몇 번 뒤척이다 가까스로 침대에서 일어나 밖에 쳐 있던 해먹(hamaca)에 쓰러지듯 몸을 맡겼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새벽 3시. 기상하고 하루를 시작하기엔 어지빠른 시간이다. 벌써 몇 번째인지 정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얼마 눈을 붙이다 다시 방에 들어가고, 다시 그물 침대로 오기를 반복. 뇌는 맥박처럼 심하게 요동쳤고, 두통은 점차 심해졌다. 몸을 가눌 수도 없을 정도의 이런 농밀한 더위는 불면의 밤이 지속되도록 깊은 잠에 헤살을 놓았다. 몇 차례 눈을 감았다 떴지만 그때마다 하늘엔 별이 총총히 박혀 있었고, 아침은 정녕 오지 않을 성 싶었다.
어느 순간 내 몸이 아닌 것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마당에서 떨어진 화장실로 터벅터벅 걸어가 몸에 한 바가지 물을 끼얹었다. 순간의 시원함이 좋았지만 땀에 절은 몸을 사랑한 모기의 입맞춤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동네 친구 움베르토 소개로 나를 빈 방에 재워준 안토니오는 아침 일찌감치 간단한 식사를 차려 주었다. 그의 배려가 눈물겨웠지만 맨 정신도 아닌데 굳이 아침을 먹어야 했던 나는 다시 해쓱한 얼굴로 아마카 위로 속절없이 쓰러졌다.
두 번에 걸친 새벽 등목도 모자랐다. 나는 해가 중천으로 달음질하는 때에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시 좀비걸음으로 화장실로 다가가 이번엔 팬티까지 벗어던졌다.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찬물을 마구잡이로 뿌려댔다. 마침 안토니오 집에 우물물이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그제야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1994년 그 때 그 기록적인 더위도 잘 참아냈었다. 그런데 이런 고극(高極)한 더위 앞에 결국 흰 수건을 던질 수밖에 없다니. 벌써 수개월째 열대지역을 지나오며 그간 너무 안 먹고, 너무 안 쉬었기 때문이리라. 젊음 하나만 믿고 대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도전은 도태되기 마련이다. 창조주의 매뉴얼엔 우리 몸은 분명 자연에의 도전보다 조화를 명시해 놓았을 것이다.
정말 나의 자전거 여행 열의는 대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몸은 이미 현대문명에 익숙해져 버렸다. 자연에 최적화된 몸이 아니라 기계문명에 익숙해진 몸인지라 버텨내기 고달팠던 것이다. 이제는 더위 속에 에어컨과 선풍기, 냉장고의 시원한 음료와 과일이 없으면 충격과 공포가 시작된다.
설상가상으로 한동안 잠잠했던 설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신경이 날카로워질 정도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나는 길에서 파는 묵직한 망고 두 알을 샀다. 그리고는 식사와 약 대신 먹었다. 이전에 멕시코에서 망고를 섭취했을 때 컨디션이 좋았던 생체 기억이 몸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플라시보 효과라고 해도 나에겐 유일한 희망이었다.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일체 다른 음식을 먹지 않고 고집스레 망고만 섭취했다. 다른 거 찾아 먹기도 귀찮을 정도로 지쳐 있었다. 그랬더니 역시나 몸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느껴졌다. 시간을 두고 완연한 회복세를 보였다. 이틀 만에 근육에 에너지가 차오르는 경험을 한 나는 더 이상 더위가 두려워지지 않았다. 망고 백신의 효과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 있어서 절묘한 궁합이라는 게 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징크스라고 한다. 또는 심리가 만들어 낸 허상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환경에서 기대치와 결과물을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할 순 없다. 그런 장면에서 일어나는 범상찮은 해프닝은 하나의 믿음으로 발전시켜 준다. 그렇기에 탈진 시 망고 섭취는 나에겐 진리 그 자체가 되었다.
거의 회복되는 와중에 산살바도르에서 지인을 통해 안드레아 최 사장님을 만났다. 그녀는 지극한 정성으로 내 몸이 확실하게 회복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더위로 달아오르고, 영양부족으로 헤진 속에 각종 산해진미로 기름기 넘치는 위로를 준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단한 몸이 새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잠자리에도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덕분에 습여성성해진 노숙모드 중에 며칠간은 꿀잠을 청할 수 있었다.
수도 산살바도르를 떠날 때, 이곳에서 제법 규모 있는 무역을 통해 인생의 희로애락을 맛 본 그녀는 여행을 통해 또다른 인생을 배워가는 나에게 귀한 메시지도 잊지 않았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돼요. 거친 도전도 즐겁게 받아들여야 하고,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핸디캡도 프로 정신으로 이겨내야 해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편한 것에 안주하지 마세요. 무엇보다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스스로에게 철저히 정직해야 합니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유야무야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바르게 잡아야 하고요. 그게 바로 보람찬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곁들여 들려주는 삶의 철학.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성공한 인생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그녀는 매사 자신에겐 엄격하게 그러나 남에게는 관대하게 대했다.
몸은 다시 최상의 상태로 재정비 되었다. 두통과 불면에 뒤척이지 않고 생기를 되찾았다. 사흘 간 막내 동생처럼 나를 아껴준 최 사장님과 감사의 작별인사를 하고 출발할 때 만병통치약 망고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작고 노란 망고보단 굵고 불그스름한 망고를 챙겼다. 단지 1달러어치면 건강을 챙길 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입이 심심한 것도 막을 수 있다. 무엇보다 배설에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묽었던 변이 다시 덩어리로 변하는 소박한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만고불후망고사랑. 탈진한 자전거 여행자가 벌떡 일어난 비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를 명쾌하게 찾아준 망고가 그래서 좋을 수밖에 없다. 정말이지 나에게 씨알 굵은 탐스런 망고 하나면 열 인삼 부럽지 않다. 끝이 보이지 않는 자전거 세계일주 중에 또다시 지긋지긋한 불면의 밤이 돌아온다면? 아마 영혼을 팔아서라도 망고와 바꿀 것이다. 이미 중독성 짙은 짜릿한 해방을 맛 봤기에. 망고는…마약이다. 아니 사랑이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2009.07.22 14:59 | ⓒ 2009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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