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난데없는 색깔론, 연쇄살인도 좌파?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9회- '법원 검찰청' 편

등록 2009.07.28 10:47수정 2009.10.11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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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에 대하여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실제와는 크게 다르다. 그것은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 등의 영향 때문이다. 한국 희대의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즐겨 보았다는 영화 <공공의 적>에 나오는 지능적인 부자 펀드매니저 살인범이나, 다른 영화 <텔미썸싱>에 등장하는 베일에 가려진 듯한 미모의 여성 연쇄살인범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사건 담당 형사에게 개인적으로 도전 의식을 가지고 살인을 하는 영화 <왓처>의 키아누 리부스나 <세븐>의 캐빈 스페이시같이 지력과 재능을 겸비하고 있는 연쇄살인범도 현실성이 희박하다.

범죄 살인 영화의 수작이라고 회자되는 <양들의 침묵>에 나오는 랙터 박사(안소니 홉킨스 분)는 가장 비현실적인 연쇄살인범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고전음악과 현대미술에 조예가 깊은 천재적인 정신과 의사였다.

이러한 비현실적인 이미지가 언론을 타고 확산되면 수사 방향에 혼선을 주거나 대중에게 근거 없는 신비감을 조장하기도 한다.'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쳤던 인질 살인범 지강헌이나, '부자들을 더 못 죽여 한스럽다'고 한 지존파들의 보도에는 심각한 과장이나 왜곡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조수경은 한국의 범죄학자 표창원의 책을 꺼내 펼쳤다. 조수경이 보기에 경찰대학 표창원 교수의 글은 F.B.I를 자문하는 어떤 미국 학자의 것보다 더 정확했다. 그는 현실과 이론을 아우르는 학구파였다.

조수경은 표창원의 책에 담긴 연쇄살인범의 일반적인 특성을 읽어 보았다.

1. 일정한 직업이 없거나 있더라도 비정규직이고 직장에서 인정받지 못한다.
2. 20대 후반에서 40대 후반이다.
3. 대부분이 백인, 황인 남성이고 드물게 흑인, 여성도 있다.
4. 결혼하지 않았거나 결혼에 실패한 독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5. 평소 속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하여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6. 간혹 사소한 일로 상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하며 싸늘한 표정으로 돌변한다.
7. 자신의 사생활을 철저히 감춘다.
8. 진지한 대화를 하지 않고 상대의 말을 경청하지도 않으며 가까운 친구도 없다.
9. 과묵하고 반항적인 모습이 일부 여성에게 매력적으로 어필한다.
10. 이성 관계에 서투르면서도 때로는 심하게 집착하거나 지나칠 정도로 잘해준다.
11. 일방적인 애정 표현으로 상대방에게 부담감을 준다.
12. 상대가 헤어지려고 하면 갑자기 폭력을 휘두르거나 섬뜩할 정도로 차가워진다.
13. 거짓말을 하면서 본인도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길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한다.
14. 좋아하는 일이나 취미 등에는 끈질긴 집중력과 인내력을 보인다.
15. 절도나 성범죄 등의 전과가 있거나 이와 관련된 조사를 받은 일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연쇄살인범은 소설이나 영화 등에 출몰하는 비범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 주변에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인 수가 많다. 그들은 대체로 침울한데, 자신의 침울함을 이웃에게 잘 드러내지 않는다. 이것은 그들이 내면의 문제를 심각히 앓고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는 소통 수단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수경은 표창원 교수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두 번의 사건은 아무리 보아도 연쇄살인의 일반적 추세와는 차이가 있었다. 오히려 이번 사건들은 소설이나 영화 속의 연쇄살인범을 닮아 있었다. 범죄자가 메시지를 남기면서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 이유의 정당성을 표현하는 경우는 주로 미국에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기껏해야 사타니즘을 표방하거나 자칭 예수를 내세우는 등의 유치한 종교적 행위를 모방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다시 말해 종교적인 신념에 의한 살인 범죄는 많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적이나 정치적인 이념에 의해 연쇄살인이 이루어진 예는 조수경이 아는 바로는 없었다. 그녀는 오랫동안 숙고에 잠겨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런 유형의 범죄는 한국에서 본 적이 없고 미국에서도 들은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는 내면으로 은밀하고도 무서운 충격을 받았다. 최근의 두 살인사건은 일반적인 범죄가 아니라 정치 테러로 접근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치밀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번 두 사건에 보이는 한국 사회의 반응이 의외로 정치적이기 때문에 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수경은 테러라는 말을 함부로 발설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타고난 성격이었고 수사관으로서 길들여진 처신이기도 했다.

사건은 다음 날 아침 여지없이 대서특필되었다. 보수신문들의 기사에는, '가진 자와 보수 세력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라는 추정에서부터, '불온한 세력의 사주'라는 분석도 있었고, '진보, 개혁 지상의 풍조가 빚은 불행'이라는 논평도 있었다. 어떤 신문은, '한국의 좌파 세력은 이 사건에서 도덕적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연쇄살인범에게도 난데없이 빨간색을 덧칠하는 이른바 색깔론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조수경은 섣불리 프로파일링에 손을 댈 수 없었다. 용 부장은 조수경의 눈치만 살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위로부터 받는 압력은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피살자의 신원이 확인되기 전에는 아무 보고도 드릴 수가 없어요."

지극히 당연한 조수경의 말에 용 부장은 고개를 주억거리기만 할 뿐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강력 수사의 베테랑 소리를 수없이 들었던 그가 사건의 성격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건의 성격이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점에서 두 사람은 암묵적으로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었다.

"부장님, 옛날에도 이런 연속 살인이 한국에 있었나요?"

용 부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보통 연쇄살인과는 달라 보입니다."

용 부장은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보통 연쇄살인이 아니라면?"
"...왠지 정치적 테러 같습니다."

용 부장은 둘째손가락을 들어 입술에 열십자로 포갰다.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턱을 끄덕였다.

조수경은 말을 꺼낸 김에 내쳐 하기로 했다.

"부장님, 한국에도 과거에 정치적인 테러 살인이 있었나요?"

용 부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 역시 말이 나온 김에 마저 하겠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조 팀장, 피살자의 신원 확인이 될 때까지 특별히 할 일도 없을 테니 해방 정국의 살인사건들을 공부해 보지."

조수경은 용 부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번 사건이 정치적인 것이라면 뭔가 실마리가 나올 수도 있지 않겠어?"
"알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두 사건이 정치적 테러라는 것은 우리들의 희미한 가설일 뿐임을 유념해야겠지?"
"물론입니다."

조수경은 조용히 문을 닫으며 부장실에서 나왔다.
#연쇄살인 #색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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