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익명성·탈중심성·탈규제' 등의 특성으로 인해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오마이뉴스>의 성공 비결을 '뉴미디어'와 '신기술'에서 찾을 수 있을까?
오마이뉴스 그래픽
지금은 좀 수그러졌지만, 인터넷은 거의 예외 없이 '민주적 가능성'과 결부되곤 했다. 쉽게 말해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며, 그것도 '민주적'으로 바꾼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인터넷에 '내재된' 특성 때문이라는 것이 학계의 신나는 설명이었다. 이 특징은 '익명성·탈중심성·탈규제' 등이다.
과연 그런가? 한국의 인터넷이 '익명성'을 특징으로 하는가? 소수 포털이 독점한 인터넷 환경이 '탈중심'적인가? 규제가 어려운가?
흔히 인터넷을 단수의 고유명사('the Internet')로 표기한다. 그러나 인터넷은 하나가 아니고, 모두 같지도 않다. 무수히 많은 '인터넷들'이 있으며 이들은 같은 성질을 공유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인터넷의 민주적 가능성'에 비추어 사회변화를 예측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뿐이다. '뉴미디어'보다는 그 매체를 받아들인 사회를 면밀히 고찰하는 것이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데 더 큰 도움이 된다. '기술이 어떻게 사회를 바꾸는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사회가 어떻게 기술을 바꾸는가'다.
인터넷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이제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됐다'고 흥분했다 (아직까지 흥분을 계속하는 사람도 있다). <오마이뉴스>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추기 시작하자, 전 세계의 학자들은 '뉴미디어의 가능성이 실현된 사례'라고 분석했다. 그리고는 같은 일이 세계 전역에서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타자기가 모든 이들을 작가로 만들지 않았듯, 인터넷은 모든 이들을 기자로 바꿔놓지 않았다.
<오마이뉴스>의 '올드미디어'적 전통나는 <오마이뉴스>로부터 신기술의 특성이나 가능성보다는 한국사회의 특징과 전통을 발견한다. 마치 <오마이뉴스>라는 첨단의 미디어가 '잉걸'이나 '생나무' 같은 한국 고유의 나무꾼 용어로 소통하듯 말이다.
<오마이뉴스>는 한국의 두 가지 매체적 특성을 계승하고 있다. 종이 대자보와 국민 주주 신문 <한겨레>다.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던 시절, 시민과 학생들은 커다란 종이와 매직펜으로 소통했다. 그 시절, 대자보는 '뉴미디어'는 아니었을망정, 더없이 훌륭한 '민주적 매체'였다. 종이와 펜만 있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물론 종이와 펜이 발명되었을 때 그것은 엄연히 '뉴미디어'였다).
물론 정부·회사·학교의 당국자들은 틈만 있으면 게시물을 떼어내고 글쓴이를 색출하려 했다. 지금 인터넷에서 하듯 말이다. 역시 역사는 반복되는 모양이다.
한국사회 민주화를 '종이의 매체적 특성'이나 '주주의 조직적 특성'에서 찾을 수 없듯, <오마이뉴스>의 성공 비결을 '뉴미디어'와 '신기술'에서 찾는 것은 어리석다. 이것은 무엇보다 피로 싸우고, 땀으로 글을 써 온 시민들에게 더없이 무례한 일이다. <오마이뉴스>의 존재가 말해주는 바는 여전히 한국의 언론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며, 시민들은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는 틀림없이 성공적인 실험이었다. 이것이 '실험'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성공'이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면, 여기 우리의 몫이 있다. 어떤 신기술도 시민들의 참여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