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김빈길은 천대 받고 있는가?"

[09-006] 김빈길 장군 개인의 불행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수치

등록 2009.08.02 12:45수정 2009.08.0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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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밖 임경업 사당인 충민사에 모셔진 김빈길 장군 영정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았고, 낙안팔경을 최초로 을픈 낙안 출신 김빈길 장군에 대한 예우는 남의 사당 한편에 영정이 모셔질 정도로 초라하다. 문진한씨는 "이건 뭔가 잘 못된 일이다"고 개탄한다 ⓒ 서정일


낙안읍성은 김빈길 장군이 최초로 쌓은 것


'낙안읍성'과 '낙안팔경'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서는 유명하다. 혹자는 고작 어디 면 단위에서 유명한 것을 가지고 연재 한 꼭지를 들고 나왔냐고 얘기할지 모르지만 그 속에는 한 개인의 비애를 넘어 사회적 불행이 숨겨져 있어 다루게 된 것이다.

전남 순천시 '낙안읍성'하면 대부분 임경업 장군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 뒤에는 꼭 "낙안읍성을 임경업 장군이 하룻밤 사이에 쌓았다더라"하는 얘기를 덧붙인다. "정말 그랬나요?"라고 미심쩍어하면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1626년 5월∼1628년 3월)로 부임해서 석성으로 쌓았다는 얘기가 있다고 얼버무리는데, 그 이유는 그저 구전일 뿐, 임경업 장군이 낙안읍성을 쌓았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세종편을 보면 세종6년(1423) 전라도 관찰사의 장계(조선시대 지방에 파견된 관원이 글을 써서 아뢰는 문서) 내용에 <"낙안읍성이 토성으로 되어 있어 왜적의 침입을 받게 되면 읍민을 구제하고 군을 지키기 어려우니 석성으로 증축하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왕이 승낙하여 세종9년(1426) 되던 해에 석성으로 증축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임경업 장군이 낙안군수로 부임하기 200여 년 전에 벌써 석성으로 증축했다는 증거다.

하지만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주장하든, 그보다 200여 년 전에 석성으로 증축했다는 기록이 있든, 이 모든 것은 낙안읍성이라는 성을 보수하거나 개조한 것에 불과하다. 최초로 낙안읍성을 쌓은 인물은 낙안군 낙생동(지금의 옥산) 출신 김빈길 장군이다. 조선태조 6년(1397년) 왜구가 침입하자 그가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은 것이 곧 낙안읍성이다.

낙안팔경은 김빈길 장군이 노래했다


낙안군에는 낙안지역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낙안팔경이라는 시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저 옛날부터 내려오던 시였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근에는 낙안읍지의 기록을 근거로 이 지역 출신 근대 향토한학자인 J씨가 1960년대 말경에 지었다고 못 박는 이들도 있다.

J씨가 지었다는 낙안팔경의 내용은 <금강모종><백이청풍><오봉명월><보람조화><옥산총죽><원포(단포)귀범><안동화류><용추수석> 등이다. 하지만 이 낙안팔경이라는 것이 이미 600여년(1400년대) 전, 김빈길 장군이 망해당에서 읊었던 일구팔경에 대부분 들어 있다.

고성 김씨 족보 문헌록 39쪽은 600여 년 전에 '김빈길 장군이 낙안면 낙생동 (현 옥산리 부근) 백이산 자락에 망해당을 짓고 당시 낙안군수인 신원절과 마주앉아 노래한 시 구절인 '망해당기'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 놓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낙안팔경에 대해 노래한 부분이 나온다.

<금강모종><백이청풍><보람명월><옥산취죽영><징산숙로><평지부사><단교어화><원포귀범> 등이 바로 그 내용으로 놀랍게도 J씨가 지었다고 하는 낙안팔경과 너무 흡사해 지역민들은 J씨가 지었다는 이야기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표정들이다.

즉, 1400여년 경에 김빈길 장군이 망해당에서 낙안군 지역 팔경을 노래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그저 떠도는 이야기로 전해 내려오다가 1960년대 말 J씨가 그것에 두 가지를 변경해서 세상에 내 놓은 듯하다는 평가다.

김빈길 개인의 불행이 아닌 사회적 수치

왜구로부터 낙안군을 지키기 위해 낙안읍성을 쌓은 인물은 누구인가? 낙안군 지역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낙안팔경은 누가 지었는가? 바로 김빈길 장군이다. 어찌 보면 이 지역에서 그보다 더 큰일을 한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들이 다른 이의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지고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칭송받고 있다. 낙안읍성내에는 '낙안성은 김빈길 장군이 쌓았다'는 글귀 하나 없고, 낙안군수로 2년여밖에 있지 않았던 임경업 장군의 비각이 서 있다. 뿐만 아니라 낙안의 기록을 담은 낙안읍지에 김빈길 장군의 낙안지역 팔경은 어디에도 없다.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은 "진실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이런 모습들이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 "김빈길 장군은 다른 고장 출신도 아닌 이 고장 출신으로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큰 업적을 이룬 인물인데 왜 이렇게 천대받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혀를 찼다.

김빈길, 그의 묻힌 업적을 개인적 불행이라고 치부하기엔 지역 사회와 지역민의 큰 수치다. 그나마 다행스럽게 최근 뜻있는 지역민들은 "낙안읍성은 김빈길 장군이 쌓았으며, 낙안팔경은 김빈길 장군이 쓴 시다"고 주장하며 여론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무슨 이유가 됐든 왜곡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라고 그들은 강조하고 있다.

김빈길 장군의 간단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 김빈길 장군은 지금의 순천시 낙안면 옥산에서 태어났다. 왜구와의 싸움에서 혁혁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영정은 낙안땅 삼현사라는 사당에 모셔졌지만 불타 없어졌는데 한일합방때 일제가 폐쇄했다는 설과 여순사건때 소실됐다는 설이 있다. 지금은 낙안향교 옆 임경업 장군 사당인 충민사에서 더부살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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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김빈길은 천대 받고 있는가?" 낙안읍성을 최초로 쌓은 인물, 낙안팔경을 최초로 노래한 인물, 김빈길 장군은 왜 제대로 대우를 받고 못하고 있는가에 대해 뜻있는 지역민들은 개탄하고 있다 ⓒ 서정일


낙안군과 낙안군 폐군(廢郡)
현재의 순천시 외서면을 비롯해 낙안면, 별량면 일부, 보성군 벌교읍 그리고 고흥군 동강면, 대서면 일부의 땅은 옛 낙안군이었다. 101년 전인 지난 1908년 10월 15일, 일제는 항일투쟁무력화, 동학혁명진원지분산, 침략거점도시화를 위해 낙안군 자체를 없애버리고 주민들을 인근 지역 세 곳으로 강제 편입시켰다.

덧붙이는 글 | [09-010]예고: 행복마을 즐비한 낙안면은 행복한 마을?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09-010]예고: 행복마을 즐비한 낙안면은 행복한 마을?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낙안군 #남도TV #스쿠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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