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 그 자체, 외딴섬 울릉도

도동항의 뜨거운 활기와 나리분지의 고요함

등록 2009.08.05 20:51수정 2009.08.06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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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 행남해안산책로...숨이 멎을 듯 ...바다빛에 압도되어...
울릉도행남해안산책로...숨이 멎을 듯 ...바다빛에 압도되어...이명화

프롤로그

어떤이는 울릉도를 '경이' 그 자체라 했다. 섬은 언제나 가슴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섬은 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섬에는 섬을 둘러싼 바다가 있기 때문에 더욱 빛나고, 섬은 그래서 가슴 설레게 한다. 바다 그 역시 설렘이며, 동경이며, 자유며, 경이가 아니던가.


섬은 그 넓고 끝없이 펼쳐진 망망대해 한 가운데 고독처럼, 처녀림처럼 떠 있어 사람들은 그 섬에 닿고 싶어 한다. 사람들은 닿을 수 없을 것 같고, 쉽게 닿지 않는 것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다. 섬이 있어 바다가 있고 바다가 있어 섬이 빛난다. 화산섬 울릉도...시간과 비용 때문에 마음 내기 힘든 이 섬에 간다. 자 이제, 함께 울릉도 여행을 떠나보자.

외딴 섬, 울릉도 가는 길

오전 8시 50분, 포항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게 웬 일인가.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울릉도 여객 터미널 내에 들어서니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와글와글한다. 모두들 울릉도에 갈 사람들이라니, 울릉도가 그렇게도 좋은가?!

우리가 타고 갈 배는 약 9백 명이 넘는 사람을 태울 수 있다고 하니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를 오간다. 배는 오전 10시에 출항한다. 매점에서 좀 비싼(700원) 커피 한 잔 마시고 간식을 몇 가지 사고 표를 끊고 하다보니 어느새 배에 승선할 시간이 다 되었다. 오늘 우리가 타고 갈 배는 '썬 플라워호'다. 3층으로 된 여객선이다.

포항 항구를 벗어나 바다 한 가운데로 나아가는 썬플라워호는  망망대해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간다. 끝없는 수평선만이 보인다.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갈수록 배 멀미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심하게 요동치는 배에서 웩웩 소리 내어 구토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또 다른 사람들이 멀미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멀미약도 준비 않고 온 나도 덩달아 멀미를 할 것만 같아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꼼짝을 않고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멀미를 할 것 같았다. 바다 한 가운데서의 3시간, 인내의 3시간이었다. 곧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때서야 창문 밖을 내다보니 불끈불끈 기암절벽으로 형성된 울릉도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늘과 바다 그 한가운데 천혜의 요새처럼 우뚝 솟아있는 화산 섬 울릉도, 멀미기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걸 보려고, 이 섬을 만나려고 바닷길로 왔다. 낮 1시 10분,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울릉울릉~ 와글와글 넘치는 활기 도동항

울릉도 와글와글 활기 넘치는 도동항..
울릉도와글와글 활기 넘치는 도동항..이명화

울릉도는 평지가 거의 없고 동서길이 10km, 남북거리 9.5km, 해안선 56.5km에 이르고 연평균 기온 12도의 온화한 날씨를 이루는 곳이란다. 해양성기후로 인해 울릉도는 식물의 곳간이라고 할 정도로 식물이 많으며, 650여 종의 다양한 식물이 자라고 있으며 39종의 특산물과 6종의 천연기념물이 있다.

또한 울릉도 경지는 전체면적의 15%에 불과하며 그것도 산비탈이 대부분이므로 옥수수, 감자 등이 많이 재배된다고 한다. 지금은 산채(미역취, 부지갱이), 그리고 약초(천궁, 더덕, 작약 등)이 농업의 주산물이다. 주민의 절반 가량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으나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게 되면서 관광사업에 눈을 돌리는 주민들도 많다.

3시간 동안 달려온 천혜의 섬, 신비의 섬, 바다 한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섬, 울릉도에 당도했다. 짙은 비취색 바다가 불끈불끈 솟아있는 섬을 에워싸고 있다. 해안가 기암절벽엔 큰 나무 없이 비바람을 견디고 기암절벽에 삶을 잇대어 살아가는 풀과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다.

해안절벽에 짙은 초록색 나무들은 대부분 향나무들인데 이곳 향나무들은 육지의 것과 달리 흙에서 자라지 않고 바위에서 자란다하여 '석향'이라 한다. 비바람 때문에 키가 작지만 거의 다 수령이 오래된 것들이다. 2천 여년이 넘은 향나무들도 있다.

벼랑 가에 붙어 핀 섬 나리꽃들도 바위에 거의 붙은 듯 꽃잎이 작다. 도동항에 발을 딛자 한여름 뙤약볕 아래 섬 마을의 활기가 와글와글 밀려들어 아찔할 정도였다. 아직 바다에 떠 있는 듯 울렁거림도 잦아들지 않았는데 수많은 여행객들과 장사하는 사람들과 빵빵대는 차량들에서 엉키는 소음으로 속도 울렁울렁 눈앞도 울릉거렸다.

사람들과 이리저리 부딪치며 빠져나오는데 울릉도 오징어 냄새가 먼저 반겼다. 반 건조오징어를 여행객들을 상대로 팔고 있는 아주머니들이 여기저기 앉아있었다. 오징어 다리를 건네며 '이것 먹으면 멀미를 안한다'고 했다. 구수한 오징어 냄새에 끌려 오징어 몇 마리를 샀다. 신기하게도 오징어다리를 먹으니 매스껍던 멀미기가 없어지는 것 같았다.

선착장 주변을 벗어나기까지 사람과 차량들로 넘쳐나는 좁은 도로 가운데서 낑낑거렸다. 유람선이나 여객선이 드나드는 '울릉도의 서울'로 불리는 도동은 평지가 얼마 없고 비스듬하게 올라간 비탈에 좁은 골목골목 크고 작은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처음엔 마치 소인국에 온 듯했다.

그 안에서 북적대니 울릉도 전체가 울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순환관광버스는 좀 있어야 온다고 했다. 우린 그동안 짐을 내려놓고 도동항을 잠시 돌아보았다.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앉은 건물들, 도동엔 있을 건 다 있었다.

농협, 우체국, 경찰서, 모텔, 유흥가, 주점, 노래방, 각 상점들이 좁은 비탈에 비좁게 들어앉은 건물들 속에 있었다. 기암절벽으로 된 섬의 형상처럼 비탈에 앉은 마을 집들...또한 느긋하게 보이기보다는 왠지 각박하고 안정이 안 되는 바쁜 느낌, 숨 가쁜 활기가 뜨거운 태양 아래 더욱 넘치는 듯 했다

차와 차가 엉키고 사람과 사람들이 좁은 거리에서 엉키는 시간, 여행객들을 한 배 가득 싣고 와 내릴 때마다 이런 북새통이 되는 것 같았다. 조금은 인적 드문 섬을 처음부터 기대했던 나의 생각이 포항에서 출발할 때부터 어긋나기 시작했다. 도동항의 활기는 육지의 것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미어터지게 많은 여행객들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주민들이 빚어내는 섬의 숨 가쁜 활기는 한 여름 땡볕 아래서 들썩거렸다. 관광객들을 태우고 섬 곳곳을 돌 승합차량들과 자가용, 그리고 사륜구동 울릉도 택시들...오징어 파는 사람들, 단체로 관광을 와서 피켓을 들고 줄을 선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순환관광버스 타고 울릉도 한바퀴?

한참 만에 우리가 탈 순환 관광버스가 도착했고 차에 올라앉았다. 한 차 가득 실은 버스는 도동항구를 벗어나 정해진 코스대로 관광코스를 안내했다. 기사가 소개하는 울릉도는 대충 이랬다.

울릉도에는 약 내수전과 섬목 사이 해안도로(약 4.4km)가 없다. 울릉도에는 또한 맑은 날이 연중 55일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특산품은 오징어, 호박엿, 산채나물, 취나물, 부지깽이, 더덕 등 많고 울릉도 인구는 약 1만 명 가량 된다. 울릉도에는 모래사장이 없고 몽돌밭이고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졌다. 울릉도는 화산이 두 번 폭발하여 형성된 섬이다.

울릉도에는 '삼무오다'가 있다. 여기서 '삼무'란 뱀, 공해, 도둑'이 없다는 것이고, '오다'는 돌, 바람, 물, 향나무, 미인'이 많다는 것이다. 지금은 1만 여명이 살고 있지만 예전에는 3만 5천 명 가까이 살았다고 한다. 세상에, 평지도 거의 없는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신 섬과 좁은 땅에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살았을까.

젊은이들이 뭍으로 나가니 인구가 줄어든 것이라 한다. 관공서와 공무원 외에는 젊은이들이 없단다. 도동에서 88다리를 지나고 사동항, 그리고 통구미로 차는 점점 우리를 실어 날랐고 비탈을 곡예라도 하듯 비틀대며 지그재그로 운전했다.

울릉도... 행남해안 산책로에서...
울릉도...행남해안 산책로에서...이명화

버스는 비틀비틀 출렁출렁, 육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높은 비탈길과 내리막길을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운전하면서 기사는 통구미 마을 거북바위 앞에 잠시 멈추었다. 거북바위 앞에서 사람들은 사진을 찍고 화장실도 가고 10분간 휴식이었다. 다시 버스는 출발, 기사는 운전대를 잡은 손을 쉬지 않고 운전했고, 그 와중에 말도 쉬지 않고 계속했다.

울릉도에는 신호등이 없다. 터널 앞에 딱 두 개 뿐이다. 울릉도는 하나의 산이다. 겨울엔 눈이 많이 내리는데 춥지 않고, 여름엔 또 시원해 선풍기나 에어컨이 필요가 없다. 울릉도 사람들은 생업에 종사하는 기간이 짧다. 오징어잡이가 8월부터 12월까지 가장 바쁜 철이고 그 외엔 조용하다.

할일이 없으니 먹고 자고 먹고 자고 하다보니 애들이 많다(?). 겨울엔 눈이 많이 오고, 일손을 놓고 쉰다. 한 폭의 수채화가 따로 없다. 울릉도엔 식물이 약 1천여 종이 넘는다. 묘지가 거의 없는데 일찍부터 화장 문화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울릉도엔 제주와는 달리 남자들이 잠수하는 해남이 있다.

울릉도는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다. 물을 건너오기 때문이다. 택배를 택배회사로 부치면 상차할 때 돈 받고 하차 할 때 또 돈 받고 운임을 옮길 때 돈 받고 요금이 각각 따로 붙다보니 비쌀 수밖에 없다. 지나가다가 얼핏 본 두 봉분은 바람에 깎여 거의 삼각형 모양이다. 이것이 모두 바람이 만들어낸 모양일까.

이곳에 와서 처음 찾은 여행지라 그렇기도 하겠지만 첫 눈에 느낀 것은 평지가 거의 없어서인지 넉넉함이나 편안함 같은 것을 느낄 수 없었다. 바쁘고 숨 가쁜 활기 그 자체였다. 태하터널을 지나 태하동에 이른다. 태하동은 최초의 도읍지로 오징어, 나물 등을 알아준다.

오징어를 밤새 잡아와 새벽에 할복해 그날에 팔기 때문에 싱싱하다. 태하초등학교는 한 반에 두세 명 정도밖에 없는데 모두 우수한 학생들이라고 기사는 능청을 떨었다. 못해도 3등은 하기 때문이란다. 태하중학교는 폐교위기에 처해 있으나 올해 아주머니 두 사람이 학교에 입학해서 폐교위기를 면했다 한다.

태하마을 마을정보센터에서 명이나물, 미역취나물, 머루주, 부지깽이 등을 시식했다. 먹어보고 또 사기도 했다. 태하마을에서 출발, 울릉도에서 제일 높은 고개로 간다. 지그재그 오르막길이다. 춤추듯 비틀거리며 순환버스는 출렁출렁 관광객들을 들썩이게 하며 올라갔다.

재를 넘어가면 북쪽이다. 울릉도는 3.8선과 아주 가깝다. 점포마을에 도착한다. 코끼리바위를 보고 울등로에서 두 번째 항구라는 현포항을 지나 50년대에 만들어진 수력발전소가 있는 추산마을, 북쪽 끝 천부마을을 지났다. 천부마을에 높이 솟은 십자탑이 두 개 보인다.

울릉도에는 교회가 총 41군데 있고 성당이 두 개라고 한다. 천부마을을 벗어나면서 길이 더 험해진다. 지그재그로 높이 올라가는 길을 따라 춤추듯 비틀비틀 한참동안 올라가던 버스는 '나리분지', 유일하게 평지에 있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올라가느라 비틀거렸던 버스는 또 비틀대며 얼마쯤 내려오자 넓은 분지가 나왔다.

울릉도 유일한 평지, 고요한 나라 나리분지

나리분지... 울릉도의 유일한 분지...
나리분지...울릉도의 유일한 분지...이명화

나리분지는 분화구 전체가 60만평이다. 나리분지에 들어선 버스는 마을 한가운데 나 있는 길로 접어들면서 '늘 푸른 산장'이라는 식당 앞에 차를 세웠다. 버스기사와 함께 타고 온 사람들은 모두 식당 안으로 저녁을 먹기 위해 들어갔고 우린 버스에서 바로 내려 무거운 짐을 들고(무슨 짐을 이렇게 많이 갖고 왔을까)나리분지에 있다는 야영장을 찾아 갔다.

오늘 여행 목적지는 나리분지다. 하지만 마을 한쪽 구석에 있는 야영장에는 기대했던 것과 달리 야영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야영장은 평소에 풀들이 웃자라 있는데다 마을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 이런 야영장에서 하룻밤, 아니 2박 3일을 묵을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갑자기 여행하는 곳에서 몸을 쉴 야영장이든 뭐든 내 한 몸 누일 곳이 없다 생각하니 암담했다.

남편은 이리저리 궁리를 했지만 이런 곳에다 나를 재울 생각을 하는 것이 더 얄미워서 화가 났다. 사람들은 야영장에 아무도 없어도 무서울 것 없다고 했지만 으슥한 곳에서 밤을 새고 싶지 않았다. 도둑이 없고 뱀이 없는 곳, 사람 해치는 짐승이 없는 곳이라지만 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울릉도.. 너와집 앞에서...
울릉도..너와집 앞에서...이명화

나는 내 배낭 하나만 달랑 매고 남편을 두고 나리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 같아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혼자 어디를 갈 수도 없었다. 마을 한 가운데 있는 정류소에 혼자 한참동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잠잘 곳이 없는 내 신세가 한심스럽고 남편이 괜시리 미워져서 꼴도 보기 싫었다.

근처 민박집에선 활기가 느껴졌다. 서서히 해는 기울고 저녁이 되었다. 궁리 끝에 남편은 마을 한 가운데 있는 나리교회를 찾아갔다. 또 교회에 신세지려고?! 와락 짜증이 났다. 남편은 목사님을 만나 한참동안 얘기하는 듯 싶더니 교회 마당에 텐트를 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울릉도... 나리분지에 저녁이 내리고...
울릉도...나리분지에 저녁이 내리고...이명화

교회 안에서 자든지 사택에 들어오든지 하라고 했지만 남편은 텐트를 치겠다고 했다. 차라리 야영장에 갈 걸...더 신경 쓰이고 불편할 것 같아 마음 편치가 않았다. 교회 옆 나무그늘 아래 텐트를 칠만한 공간이 있었다. 텐트를 다 치고 나니 어느새 밤이 내리고 있었다.

남편은 밖에 산책이라도 나가보자고 했지만 마음이 상해있던 나는 움직이기조차 싫었다. 풍경이 빛을 잃었다. 호기심도 죽어버렸다. 그냥 우울했다. 어두워지면서 텐트 주변에는 공 벌레, 민달팽이, 지렁이 등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고 어떤 달팽이 놈은 텐트 위로 기어오르기도 해 나는 기겁을 했다.

눅눅한 숲, 눅눅하고 습한 곳을 좋아하는 벌레들이 활동하기 시작하는 밤이었다. 벌레를 유독 싫어하는 나는 텐트 밖을 나갈 수가 없었다. 밤중에 화장실에 가고 싶어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는데 사택 옆에 붙어있는 화장실로 들어갔을 때도 놀래 자빠지는 줄 알았다.

공 벌레, 민달팽이 놈들은 어디든지 타고 올라 다니고 있었다. 어떻게 지낼까 참으로 암담했다.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누웠지만 온 몸에 스멀스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느낌에 잠을 잘 수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피곤했던지라, 깊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새벽에 깨어난 나는 역시 그때도 난감 그 자체였다.

아침엔 목사님이 사택에서 함께 밥을 먹자고 했다. 남편은 거절 하는 척도 하지 않고 '예!'하고 대답했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택으로 갔다. 목사님 내외분과 함께 식사도 하고 수박이랑 커피랑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목사님을 통해 나리분지가 총 60평이라는 것도 근처 알봉분지가 40만평, 합해서 총 100만평이라는 것도 알았다.

울릉도 나리분지...
울릉도나리분지...이명화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기고 마음이 펴지면서 나리분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리분지가 보였다. 나리분지는 기암절벽으로 된 울릉도에서 유일하게 분지(평지)인 곳인데 산 중턱 위에 넓게 펼쳐진 평지마을이다. 미륵산과 형제봉, 송곳산, 나리봉, 말잔등 및 성인봉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화산성 분지지형의 이곳엔 사람 사는 지붕들, 17가구가 산다.

원래 울릉도에서 나리분지는 제일 후진 곳 중의 한 곳이었고 관광객들이 들어오지 않았던 곳이었으나 공군부대(2001년)가 들어오면서 길을 만들고 정리가 되어서 출입이 그나마 수월해졌다 한다. 그 전에는 말잔등 고갯길을 걸어서 넘어 다녀야 했다.

자연히 관광객들의 발길도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거의 모두 더덕농사를 짓는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울릉도엔 물이 귀할 것 같지만 의외로 물이 아주 풍부하고 맑고 깨끗해 아무데서나 물을 마셔도 좋다고 한다. 물은 부드럽고 또 시원하다.

제주도에는 물이 땅으로 다 스며들지만, 그래서 스며든 물을 건져 올려 삼다수라 하지만 울릉도의 물은 땅으로 스며든 뒤 다시 올라오는 용천수란다. 나리분지는 높은 산봉우리들이 둘러친 한가운데 편편한 땅이다. 그 안에 하나 둘씩 집이 박혀있어 천혜의 요새와도 같다. 마치 세상의 소요와 오염에서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을 놓고 조용히 쉬어 가고 싶다면 나리분지에서 민박하며 며칠 푹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겠다. 아침밥을 사택에서 먹고 난 뒤 울릉도의 최고봉 성인봉 등산을 했다. 오후 늦게 돌아온 우린 여유를 가지고 저녁이 되도록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나리분지에 밤이 어떻게 내리는지 보고 싶었다.

교회 바로 근처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투막집과 너와집 두 채가 있어 돌아보았다. 나리분지의 투막집은 '1940년 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며 사람이 살던 집이었으나 문화재로 지정된 후 1987년에 울릉군에서 토지와 가옥을 매입하여 보수관리하고 있다고 한다.

눈이 많이 내리고 바람이 센 울릉도의 독특한 주거양식으로 억새를 베어다가 추녀 밑에 달아 만든 투막집은 겨울에는 눈과 바람을 막아주어 따뜻하고 여름에는 직사광선을 피할 수 있어 시원하다고 한다. 투막집과 너와집은 울릉도 개척 당시의 주거구조와 양식이 잘 보존하고 있어 그 때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나리분지엔 또 울릉국화, 섬백리향 군락지, 용출소, 신령수 등이 있다. 나리분지에 밤이 내리기 시작하면 낮 동안 졸고 있던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그제서야 기지개를 켜며 깨어나기 시작한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별들은 더욱 빛을 내며 흐르고 이지러진 창백한 달빛 조요하다.

어둠에 웅크린 나리분지를 둘러싼 높은 산봉우리들은 짙은 어둠에 잠겨 그 기이한 실루엣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리마을 한 가운데 길 곳곳에 불을 밝힌 가로수 외에는 하나둘씩 불이 꺼지고 태고의 밤처럼 깊고 고요해진다. 겨울이 오면 온통 하얀 눈에 갇혀 설국이 되는 이곳은 흰눈이 몇 미터씩 쌓이지만 춥지 않고 포근하다.

겨울에, 하얀 눈으로 뒤덮인 설국의 나리분지를 보고 싶어진다. 그때도 별들은 더욱 빛나고 시리도록 흰 달빛은 희다 못해 푸른 눈과 마주하겠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먹물 풀리듯 조금씩 어둠이 물들기 시작했다. 푸르렀던 하늘도, 진초록으로 물든 산봉우리들도, 온통 더덕과 나물들이 심긴 연초록 밭에도, 지붕위에도 어둠이 내렸다.

저녁공기는 서늘하다 못해 늦가을 날씨처럼 선선했다. 밤이 깊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릉도 여행 마지막 날인 다음 날 아침은 또 사택에서 사모님이 차려주시는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마지막 날이라 미처 돌아보지 못한 곳곳을 봐야지 싶어 새벽 일찍 나가려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이 새벽예배를 마친 뒤 아침밥을 같이 먹자고 해서 거절할 수도 없었다. 함께 식사하며 대화가 무르익다보니 어느새 아침 9시가 넘었고 우린 아쉬움을 남기며 일어서야했다. 사모님은 직접 담근 명이나물 장아찌를 챙겨주셔서 감사하게 받았다.

'명이'는 '명을 이어준다'는 뜻이란다. 울릉도에서만 자생하는 울릉도의 효자나물로 옛날 개척민 시대에 긴 겨울을 지나고 나면 식량이 모두 떨어져 굶주림에 시달리곤 했는데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모두가 산에 올라가 눈을 헤치며 솟아난 명이를 캐다가 삶아먹고 '명'을 이었다 해서 명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비타민이 풍부해 봄이 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춘곤증과 식욕부진을 이기는데 효과가 있어 봄 식탁의 단골메뉴로 사랑받는단다. 텐트를 걷는데 몇 십분, 이래저래 오전 10시가 다 되어서야 교회를 나섰다. 버스를 타고 가려고 사택에 인사하러 가니 목사님이 직접 태워주시겠다고 했다.

여러 가지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사양했지만 한사코 목사님은 태워주신단다. 여기서 버스는 1시간에 한 대 정도밖에 없고, 그 버스는 천부까지만 가는데다가 천부에서 다시 갈아타고 가야했다. 지나가는 아무 차나 세워도 태워주니까 버스가 없으면 그러려고 했다. 이래저래 교회에 신세를 많이 지게 되었다.

천부까지 태워주신 목사님과 사모님께 인사하고 도동행 승합버스에 올랐다. 처음엔 불편하고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웠지만 짧은 시간동안 함께 밥을 먹고 얘기도 하면서 정이 든 것 같다. 참 고마운 분들이다. 도동으로 가는 버스는 군데군데 섰고 그때마다 사람들을 태웠다.

숨이 멎을 듯 압도하는 행남등대 해안산책로

울릉도.. 행남 해안 산책로에서...
울릉도..행남 해안 산책로에서...이명화

눈을 들어 바라보는 곳마다 마가목나무에 열매가 익어가고 있고 울릉도에서만 자생한다는 섬 나리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도동까지 가는데 1시간 10분이나 소요되었다. 나리나 천부에서는 끝에서 끝에 위치해 있나보다. 도동에 도착하자 첫 날 이 섬에 들어올 때 북새통을 이뤘던 도동항은 조용한 활기에 차 있었다.

배가 들어오기 한참 전의 풍경이다. 텅 빈 선창과 그렇게 많은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던 텅 빈 거리엔 햇빛이 쏟아져 내렸다. 우린 선창가 옆 '행남등대 해안산책로'를 따라 걸어보기로 했다. 첫날 도동을 빠져 나가기 바빠 도동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곳을 남편은 진작 오자고 하지 않았을까.

얄미울 생각이 들 정도로 행남등대 해안산책로는 기암절벽으로 되어 있는데다 비취빛 맑은 바다를 끼고 도는 길은 환상적이었다. 울릉도가 화산이 두 번 폭발해 형성된 섬의 진면목을 실감나게 느낄 수 있는 해안산책로였다. 기기묘묘한 기암절벽이 고개를 꺾어 한참을 올려다보아도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었고 바위들 모양은 특이했다.

해안절벽과 바다를 끼고 걷는 길, 물감을 풀어놓았어도 이런 빛깔은 낼 수 없을 것이다. 숨이 멎을 정도로 비취색 바다 빛은 나를 압도했다. 제주의 바다와는 또 다른 바다색이었다. 제주의 바다가 연두색이 섞인 듯한 맑은 옥빛이라면, 울릉도의 바다빛깔은 더 깊은 옥빛이었다. 나는 화산섬 울릉도의 기암절벽과 바다 빛을 보면서 걸음을 걷다 멈추다 했다.

어떻게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졌을까, 어떻게 이런 바다 빛일 수 있을까 입을 떡 벌리며 돌아보는 나를 남편은 앞서가며 자꾸 손짓했다. 천천히 느긋하게 돌아보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잰 걸음으로 해안산책로를 돌아보았다. 도동 등대까지 돌아보지 못하고 등대 진입로 근처에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울릉도... 행남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경이 그 자체다...
울릉도...행남해안 산책로를 따라 걷다...경이 그 자체다...이명화

오랜 세월동안 파도와 바람과 비가 조각한 행남해안산책로는 그야말로 비경이었다. 우뚝 솟은 기암절벽 아래 펼쳐진 짙은 비취색 바닷물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깨끗하고 맑아 할 말을 잊었다. 행남등대 해안산책로를 돌아 도동항 선착장에 이르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항구에 썬 플라워호를 비롯해 배가 들어와 있었다.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첫날 도동항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그 어지러운 활기를 다시 느꼈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도동항 일대였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나가 도동 시내 한가운데로 파고들었다. 비탈진 골목 한가운데 길로 쭉 올라가 다닥다닥 붙어 앉은 건물들 사이에 인터넷에서 소개되었던 한 식당을 찾았다.

좁은 식당 안에는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였다. 울릉도의 음식을 먹어보자는 생각에 식당에 들어왔으나 육지보다 곱 이상으로 비싼 음식, 맛은 거저 그랬다. 내게 맛있는 음식을 큰 맘 먹고 사 주리라 기대했던 남편은 몹시 실망하는 눈치였다. 2시 30분 가까이 되어서야 배에 올랐다. 썬 플라워호는 울릉도 항을 벗어나 바다 한가운데로 나갔다.

울릉도에 올 때 고생한 걸 생각해 미리 귀밑에를 붙였건만 의외로 돌아오는 물길은 순풍에 돛단 듯 순항이었다. 두고 온 울릉도의 비취빛 바다와 도동의 넘치는 활기와 나리분지의 고요함...지그재그로 비틀거리며 산 위로 올라가던 버스며 길이 눈에 어른거렸다. 우린 나란히 앉아 도동 선착장 근처에서 샀던 반 건조 오징어를 맛있게 먹었다. 오후 5시 30분에 포항 항구에 도착했다.

에필로그

외딴섬 울릉도를 울릉울릉 울렁거리면서 다녀오는 길,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살지 않을 것 같은 외딴 섬, 그 어디에서도 사람들은 생을 기대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8선이 가까운 외딴섬에도 삶은 활발했다.

포항을 벗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주를 지났다. 좁고 가파른 섬 울릉도를 막 다녀오는 길이어서일까, 넓고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경주는 그야말로 하염없이 넓어 보였다.돌아와 한숨 돌리며 생각해보니 첫 울릉도 여행은 빙산의 일각, 코끼리 코만 만지고 온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든 '처음'의 것이란 언제나 서툴고 서두르고 아쉬움이 남고, 돌아보면 다하지 못했던 것들이 더 많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2박 3일 동안의 울릉도 섬여행...짧은 시간에 신비의 섬 울릉도 속살을 어떻게 다 볼 수 있으랴. 화산이 세 번 폭발하여 형성되었다는 울릉도,

천혜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오각뿔 모양의 섬,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포근한 섬, 평지가 거의 없고 우뚝우뚝 하늘 높이 치솟은 기암절벽과 높은 암봉으로 된 신비의 섬, 도동항의 넘치는 활기와 나리분지의 고요함을 동시에 갖고 있는 화산섬 울릉도를 만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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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화

덧붙이는 글 |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여름을 시원하게] 응모글입니다.
#울릉도 #도동항 #행남해안산책로 #나리분지 #명이, 나물, 오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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