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빛 포도송이 익는 골목길

[인천 골목길마실 58] 대추와 호두와 감과 모과와 밤 들을 보면서

등록 2009.08.09 10:02수정 2009.08.09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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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육사 님 시 〈청포도〉를 읽으면,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고 첫머리를 엽니다. 푸른포도는 이 시마따나 칠월 무렵에 익고, 먹포도는 팔월 무렵에 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 밥상에는 일찌감치 유월부터 포도가 오르내립니다. 능금이며 배며 매한가지입니다. 수박이며 참외며 다르지 않고, 딸기는 한겨울에도 맛볼 수 있습니다.

 

 철을 잊고 때를 잃습니다. 참 열매를 잊고 참 곡식을 잃습니다. 사람이든 푸나무이든 알맞게 씨내리고 뿌리내리며 줄기를 뻗어야 튼튼하고 알차게 자라건만, 사람이건 푸나무이건 빨리빨리 심고 거두어 맺으려고만 합니다. 얼른얼른 끝을 보려 하고, 천천하고도 느긋하게 어린 나날을 즐기며 함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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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집 문간 위로 자라고 있는 먹포도들. 소담스레 익어 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골목집 문간 위로 자라고 있는 먹포도들. 소담스레 익어 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엊그제 동네마실을 하다가, 골목집 담벼락마다 푸른포도와 먹포도가 잔뜩 익은 모습을 곳곳에서 보았습니다. 낮나절에 도서관을 열기 앞서 자전거를 타고 모처럼 도화동 쪽으로 달려가다가 숭의4동 안쪽 골목으로 접어드는데, 두어 집 건너 한 집마다 소담스레 익은 포도넝쿨이 줄줄이 걸려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까치발을 해도 닿기 어렵지만, 어른들은 그저 손을 뻗으면 열매에 닿습니다.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살며시 포도알을 만져 보면서 눈과 사진에 담습니다. 골목집 담벼락을 타고 자라는 포도는 어떤 맛일지 궁금했지만, 한 알도 따먹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손인지 포도나무 임자인지 몇 알 따먹은 자취가 있어, 저 또한 한 알쯤 따먹어도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저 혼자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르되, 이 포도넝쿨 옆을 지나다니는 사람이 모두 이렇게 생각한다면, 포도나무 임자는 애써 심어 가꾸었어도 포도송이 하나 거두지 못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동네 팔월은 먹포도가 익어 가는구나!" 하고 새삼 깨달으면서, 하루하루 푸르디푸르게 익어 가는 대추를 보고 감을 보면서, 이 열매들이 바알갛게 익어 갈 날이 언제일까 하고 손을 꼽습니다. 모과나무를 보고 호두나무를 보면서, 이 열매들이 무르익었을 때 놓치지 않고 다시 찾아와 사진으로 한 장씩 담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해 봅니다.

 

 동네 골목길이라 동네사람 스스로 키우면서 동네사람 누구나 포도내음 감내음 호두내음 대추내음을 흐드러지게 맡을 수 있습니다. 동네 골목길을 호젓하게 거닐거나 조용히 오가는 길손 또한 갖가지 나무내음 꽃내음 열매내음을 듬뿍 나누어 맡을 수 있습니다. 머잖아 대추며 감이며 호두며 알맞게 익을 무렵에는 우리 집 아이도 웬만큼 아장걸음을 잘 뗄 수 있어, 집부터 이곳까지 사뿐사뿐 걸어서 함께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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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에 포도내음이 솔솔 퍼져 나간다고 느낍니다. 이 포도내음을 맡으면서 사람들마다 ... ⓒ 최종규

골목길에 포도내음이 솔솔 퍼져 나간다고 느낍니다. 이 포도내음을 맡으면서 사람들마다 ...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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퍽 많은 집마다 문간, 또는 담벼락에 포도넝쿨을 기르는 모습을 만난, 인천 남구 숭의4동 골목길. ⓒ 최종규

퍽 많은 집마다 문간, 또는 담벼락에 포도넝쿨을 기르는 모습을 만난, 인천 남구 숭의4동 골목길.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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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간에 가지가 닿도록 감나무를 키우는 집. 도화1동. ⓒ 최종규

문간에 가지가 닿도록 감나무를 키우는 집. 도화1동.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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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벼락 안쪽 마당에서 키우는 대추나무가 가지를 골목으로 뻗습니다. ⓒ 최종규

담벼락 안쪽 마당에서 키우는 대추나무가 가지를 골목으로 뻗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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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뻗으면 무르익어 가는 호두알을 만질 수 있습니다. 단단하게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손을 뻗으면 무르익어 가는 호두알을 만질 수 있습니다. 단단하게 여물어 가고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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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골목길에 가장 많이 심은 열매나무라면, 첫째로 감나무, 다음이 대추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와 배나무와 포도나무 들이 있습니다. ⓒ 최종규

동네 골목길에 가장 많이 심은 열매나무라면, 첫째로 감나무, 다음이 대추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포도나무와 배나무와 포도나무 들이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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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그마한 땅뙈기에도 대추나무와 감나무를 나란히 심고, 열매 거둘 날을 기다립니다. 송림1동. ⓒ 최종규

조그마한 땅뙈기에도 대추나무와 감나무를 나란히 심고, 열매 거둘 날을 기다립니다. 송림1동.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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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길 전봇대 옆으로 키작은 밤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 최종규

골목길 전봇대 옆으로 키작은 밤나무 한 그루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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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규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08.09 10:02 ⓒ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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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마실 #골목여행 #골목길 #인천골목길 #사진찍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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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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