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정 할머니가 살고있는 인천의 한 연립주택
박현주
모시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이효정 할머니는 처음 보는 기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올해나이 아흔 일곱. 97세.
일제시대엔 이재유, 이관술, 이현상, 김삼룡, 이주하, 박진홍, 김태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고, 해방 이후엔 여운형, 이승만, 박헌영, 김구, 김일성 등이 지도자로 서는 것을 보았으며, 좌우갈등 속 민족분단과 한국전쟁을 몸소 겪었을 그녀. 오랜 군부독재의 철권통치와 치열했던 민주화운동과 정권교체의 과정을 모두 보았을 그녀.
이효정 할머니의 97년의 인생이 곧 우리나라 근현대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약 100년의 세월동안 겪었을 풍파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극우 반공 이데올로기가 반백년을 지배했던 대한민국에서 사회주의 운동 경력자가 숨이나 제대로 쉴 수 있었을까. 그러나 이효정 할머니의 얼굴은 고생한 사람 같지 않게 평화롭고 온화했다. 검버섯이 내려앉았지만 얼굴빛은 맑았고 눈동자는 깊고 또렷했다.
그녀에게 광복은 어떤 의미였을까? 열여섯 동덕여고 시절부터 뛰어든 독립운동의 험난한 길에서 기쁘게 '되찾은 빛'(光復)이 되었을까?
- 선생님, 1945년 해방됐을 때 선생님의 동료들이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에서 일하고 있었지요? 그때 당시 분위기 좀 말씀해 주세요. "해방 당시 저는 서울에 있지 않고 시골에 있었어요. 울산에 있었지요."
- 울산이 고향이었나요?"울산이 시댁이에요. 아주 벽촌에 있었어요. 해방됐다고 소리만 들었는데, 사람(남편)은 없어요. 벌써 가고 없어요. (이효정 할머니의 부군인 박두복 선생은 울산 건준 간부로 일했다.) 너무 감격해서 뭐라고 말할 수 없었어요. 한 달 후에 남편이 가족을 데리러 왔어요. 그때 세 식구였는데, 친정어머니까지 네 식구였는데 울산시내로 나왔어요. 집이 없어서 부녀동맹회관에서 살았어요. 여운형 선생 와서 강연할 때 울산대표로 저하고 어떤 처녀하고 같이 갔었어요. 그때 서울서 활동하던 진홍이(박진홍, 건준 간부, 경성트로이카 동지)도 만나고…. 한 달 후에 이관술 선생(조선공산당 지도자)의 따님이 아버지에게 돈을 전달해달라고 해서 만났지요. 그런데 정판사 사건이 나서 체포되어 이후에는 뵐 수가 없었어요."
그에게 해방은 무엇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