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입니다[1]

두 번째로 잘사는 집

등록 2009.08.15 19:23수정 2009.08.15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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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금부터 10년쯤 전일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지가 독립유공자 후손 모임에 갔다 온 날로 기억한다.

'우리 집이 두 번째로 잘산단다.'

아버지가 모임에 갔다 온 후, 허탈해 하며 하신 첫마디다. 내가 사는 지역의 독립유공자 후손 중에서 우리 집이 두 번째로 잘 산다는 뜻이었다.

자식에게 본인의 고생을 물려 주기 싫은 탓이었을까. 나는 어려서부터 부족함 없이 자랐다. 적어도 사고 싶은 책을 못 산 기억은 거의 없다. 철이 들고서야 알았지만 나의 환경과는 반대로 우리 집은 어머니가 올 때만 해도 빛이 많았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지, 어머니 모두 직장이 있으셨고 먹물이 든 할아버지께서 스스로 용돈벌이를 하신 덕에 그 빚은 빨리 청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지역에서 두 번째로 잘 살 정도는 아니었다. 이사를 하면서 눈에 띄게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TV가 믿을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적어도 두 번째라면 준 재벌급 아닌가. 당시 5명이 사는 우리 집이 2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40평으로 간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니 아무리 생각해도 '두 번 째'는 아니었다.


2.

유전적인 영향인지, 성격 탓인지 우리 집안은 대대로 돈이 안 되는 일을 좋아했다. 고조부께서는 당시 혹심한 가뭄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을 위해 곳간을 푸셨다. 그 규모가 꽤 어마어마했던 지라 고종황제에게도 표창을 받았다. 그리고 평생을 항일운동과 동학운동에 몸 바쳤다.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증조부는 어릴 때부터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미 20살 때 주동자로 체포되어 손가락을 못 쓸 만큼 고문을 받았으니 그 고통을 상상하기 힘들다. 증조부는 끝까지 고문과 회유에 굴하지 않았고 드디어 이 땅의 광복을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독립운동가들의 한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바로 1945년 8월 15일.

덧붙이는 글 | 우리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그렇듯 약간은 긴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나누어서 연재하는 점 양해해 주시길.


덧붙이는 글 우리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그렇듯 약간은 긴 이야기가 될 듯 합니다.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나누어서 연재하는 점 양해해 주시길.
#독립운동 #독립운동가 #광복절 #독립유공자 #친일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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