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와 '장로'라면 찍던 묻지마 투표에서 벗어나다

등록 2009.08.19 22:14수정 2009.08.1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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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에 첫 인상을 매우 중요하다. 어떤 경우 첫 인상은 평생을 간다. 좋았던 사람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해도 좋게 보이고, 좋지 않았던 사람은 아무리 잘 해도 괜히 밉다. 경상도 사람에게 김대중은 '그냥' 빨갱이였다. 그냥이라는 말 속에는 이유와 논리가 없다는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전기불을 처음 보았고, 5학년 때 텔레비전을 처음 봤을 정도로 우리 동네는 오지였다. 버스가 들어오지 않아 만날 통학을 할 수 없어 중학교 1학년부터 자취생활을 했다. 그러니 19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서울 사람들은 전두환에 충성하는 언론들의 왜곡된 정보라도 얻을 수 있었지만 나같은 촌놈에게는 그런 정보도 들을 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선생님이 광주 이야기를 꺼냈다. 아마 5월 말로 기억된다. 영어 선생님 말씀이 생생하다.

 

"광주에서 폭도들이 방송국을 불태우고, 총으로 군인들을 죽였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을 용서할 수는 없지만 도와주기 위해 성금을 내야 한다는 말을 했다. 100원 정도 성금을 낸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폭도들이라고 하면서 도와주어야 한다는 선생님을 말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폭도 중심에는 김대중이 있었다. 이렇게 김대중은 나에게 빨갱이요, 폭도 수괴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당시(1980년대) 우리 동네(경남 사천)는 이상하게 KBS와 MBC 중 어느 방송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광주방송-지금의 광주방송이 아님-이 잡혔다. 광주 방송이 나올 때마다 화를 내면서 돌려버렸다. 김대중이 그냥 싫듯이 광주가 그냥 싫었다. 이런 마음은 대학 진학을 하면서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군 복무 기간 중 김대중과 광주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목포가 고향인 선임병이 김대중을 말하면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말해주면서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김대중에 대한 심층적인 공부는 하지 못했다.

 

복학을 1990년에 했다. 그 때는 3당 야합과 강경대 학우 등 많은 학우들이 분신으로 자기 몸을 태웠던 해였다.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를 만나고서부터 김대중에 대한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가 쓴 책들을 만나게 되었다. 1992년 12월 나는 김대중을 택했다. 김대중을 택할 때 주위에 있는 동무들은 이유를 물었다.

 

"너 앞으로 목사가 될 사람이 김대중을 어떻게 찍을 수 있느냐, 장로를 찍어야지."
"야 장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김대중이 걸어 온 길이 김영삼보다 더 낫기 때문에 찍는 거다."
"그래도 장로를 찍어야지, 그리고 너 경상도 사람 아니냐."
"경상도 사람! 장로!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엉망이지. 민주주의를 배반한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한다."

 

논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경상도'와 '장로'조합은 경상도 기독교인에게는 생각도 하지 않고, 묻지마 투표를 하도록 했다. 이 조합이 이명박 정권 출범에도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김대중은 '경상도'와 '장로' 조합을 무너뜨리게 한 존재였다.

 

더 이상 동무들과 교인들 설득은 어렵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이라도 김대중을 선택하도록 하기 위해 온힘을 쏟았다. 1997년은 기회였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먼저 설득했다. 끊임없이 김대중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역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음을 김대중에게도 확인했다.

 

1997년은 경남 통영에서 살았다. 경남 사천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를 드릴 때마다 김대중을 말했다. 찾아뵐 때마다 김대중을 말했다. 부모님 설득을 위해 1997년 8월 26일 결혼을 했지만 주소를 옮기지 않았다. 혼인 신고를 통영이 아니라 사천에서 했다. 왜. 선거를 부모님과 같이 하기 위해서다.

 

선거 전날 부모님 집에 갔다. 그런데 이인제 후보가 연설을 하고 있었다. 이인제 후보 연설을 지켜보고 있던 부모님과 막내 동생이 이인제에 마음이 조금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만약 통영으로 주소를 옮겼다면 투표 전날 3표를 잃을 뻔한 것이다.

 

"형님, 나 이인제에게 마음이 간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김대중보다 낫겠는데."
"아버지, 어머니 무슨 말을 하세요. 안 됩니다. 김대중입니다. 흔들리면 안 됩니다."

 

시골이라 투표소에 차를 타고 갔다. 차를 타고 가면서 부모님과 동생에게 흔들리면 안 된다고 했다. 투표소에 들어가면서까지 김대중을 입에 담았다. 투표를 하고 나온 부모님께 제일 먼저 김대중을 찍었는지 물었다.

 

"아이고, 귀찮아서 김대중 찍었다 아이가. 이제 됐나."

"그래 잘 하셨어요."

 

결과는 김대중 후보 승리였다.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다음 해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는 2002년에는 노무현을 선택했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손을 잡는 모습을 보면서 어머니는 "그래 너 말을 듣기 잘했다 아이가"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한 분이 나에게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세뇌시킨 분이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2002년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되었을 때는 "나쁜 놈들이 대통령을 내쫓았다.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을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경상도'와 '장로'라는 이유로 생각도 하지 않고 묻지마 투표를 하는 악폐에서 벗어나게 한 것이다. 이 악폐에서 벗어나게 한 분을 이제 떠나 보내야 한다. 떠나 보내는 마음 아프지만 잊지 않으리라. 묻지마 투표가 아니라 진짜 투표를 하게 해준 사람이므로.




2009.08.19 22:14ⓒ 2009 OhmyNews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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