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과 나', "저도 원망스럽습니다"

순수 가야혈통, 경상여자의 후광이야기, 후광의 이름으로 역사의 배경이 되길

등록 2009.08.22 13:09수정 2009.08.22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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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과 나>라는 기사는 꼭 올려야 한다는 생각에 새로이 글을 쓰려다 2007년 4월에 블로그에 올린 글을 먼저 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 분을 사유한 경상나라 여자의 후광이야기를 아무리 잘 짜깁기해도 처음의 마음만큼 설명하기 힘들었습니다.

새로이 원고를 써 보았으나 조금은 개인적이고 서툰 그때의 글만큼 풀리지 않아서입니다.

비록, 2년의 시차를 둔 글이지만 그때의 마음을 원고로도 고치지 않고 이 글 다음에 현재의 후광이야기를 이어 부치고자 합니다.

또 "나는"하고 시작해야겠다.

#섬의 탄생

나는 유전 인자가 그러했는지 환경에 의해 스스로 학습을 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내가 다른 이와는 다른 영혼의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런 이유가 "섬"이란 단어를 내가 나를 일찍이 규정하는 이유였으며 또 다른 시각이 또 다른 관찰자 시점을 가져 왔으므로"언제나"를 덧붙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유년의 섬, 섬 생활의 시작

초등학교 들어가고 얼마 아닌 때였던 것 같다. 기억은 안 나는데 유년의 친구가 둘만 있던 동네 골목이었던 것 같은데 내게 작은 말로 귀에 속삭였다.
"너어,00 엄마가 신민당 당원이래. 나쁜 아줌마데이."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이 말은 그 어린 나의 친구가 한 말이다. 그리고 나를 처음으로 고민과 의문을 들게 한 최초의 말이었으므로 어제 일처럼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마음에 충격이었기에 그 친구의 얼굴은 도통 기억나지 않고 지금도 그 목소리만 말갛게 기억된다.

00이란 친구는 나의 소꿉친구며 그때 나와 가장 가까웠다. 또 둘째며 막내라 그런지 고집 센 나를 가장 잘 받아 주던 친구였다. 나도 알고 있었다. 내가 억지를 부릴 때 친구 중 가장 잘 소화 해주던 그 외동딸이었던 친구가 나 스스로도 언니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는 것을. 그 아인 아들 없는 집에 아들처럼 키워 당시의 내 중성적 성격보다 여성스러웠고 거기다 깜찍하게 예쁜 얼굴이 때론 속으로 부러웠던 적이 있는 내 유년의 대표적 친구였기에 그말은 네겐 최초의 충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집안 사정은 서로 지 집처럼 꿰고 있는지라 나도 평소에 그 애 어머니의 유난한 지 새끼만 감싸는 행동은 싫었던 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우리 엄마의 교육과 비교한 나름 경험치의 분석 차원이다. 어린 마음에도 내 소꿉친구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속상할까하며 그 아이의 심정에서 그 말이 다른 어린 친구 입에서 나온 말인 자체가 화가 났다.

내가 그 아이 입장이라면 부모의 행동이 그 친구에게 편견을 갖게 하는 어른들의 무책임하게 아이들이 듣는데도 수군거리는 것은 어른이 할 일은 아니라 싶었다. 그런 어른들이 오히려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위 정치에 관계되는 생각을 부모가 어린 아이들의 놀이 친구까지 조종한다는 그 자체가 무지 화가 났었다.

그 시절 전국이 다 그러했겠지만 유독  경상 나라 사람은 후광 선생님이 적을 두고 있는 당을  무조건 배척했다.―전라 나라만 빼고- 김영삼 씨가 그 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김영삼 씨는 그 모양대로 좋게 생각해도 후광 선생님은 언제나 우아한 말로 좌파였었다. 그 일 이후 나는 세상을 다른 각도로 보는 버릇이 생겼다.

"김대중이 빨갱이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우위에 서며 빨갱이하면 학을 띠는 이 땅에서 다른 혹자들에게는 존경받는가?"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리고 몇 년 뒤 나의 사랑하는 선생님을 만나고 나의 이데올로기는 시작과 동시에 구체화되었고 탄력을 받아갔다.

#후광을 思惟하다.

경상 나라 사람이 것도 여자인 내가 후광을 머리로 껴안는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 한 섬 생활이었다. 그런 思維의 섬 생활이 외려 남몰래 그를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러다 전라 남자와 결혼하면서 전라 나라 사람인 후광 선생님을 더욱이 연민 하게 되었다.

#인동초란 닉네임이 싫다.

그를 흔히"행동하는 양심" 또는 "인동초"라 부른다. 92년인가? 3당 야합 이후 대선 투표 결과 카운트다운을 반쯤보고 잠자리로 들었다가 새벽 내 투표 결과 죄는 남편에게 괜히 신경질을 부렸다.

"그거 척 보면 아닌 것 모르겠어. 그냥 자."하며 전라 나라 사람보다 더 화가 났고 그 담날 눈물로 은퇴 발표하는 그를 보고 괜히  그  "인동초"란 별칭에 그냥 화가 났었다. 평생을 인고만 해야 하는 그의 운명이 그 "인동초"란 별칭 탓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민국의 대표 상품이다.

IMF 사태 이 후 후광이 대선에 당선되자마자 미국에서 들려온 현지인의 얘기가 있다. 무디스사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자 한국의 신용도를 상향시켰다고. 그래서 그가 치루는 IMF 를 순조롭게 하게 했다고. 그만큼 국가의 신용도보다 후광의 신용도가 더 앞선다했다.

그때만 해도 대한민국의 어떤 산업보다 민주화에 기여하는 평화 주의적 정치인으로 세계가 더 존경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를 "존재만으로도 대한민국 대표 상품"이라 지칭한다. 그는 세계에서 만델라보다 더 인정받았다. 그러나 조국은 늘 그를 배척했었다.

내가 사유하는 그가 취임하던 날 나는 그의 초췌한 모습만 기억한다. 그처럼 대통령이 되기 위해 살아왔다면 그의 취임은 잔칫날이어야 했는데 나는 그때 그 을씨년스럽던 날씨와 더불어 초췌한 그의 모습에 속이 상했다. 근데 IMF를 질른 장본인은 상도동 골목서 부터 잔칫집이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현수막이 눈에 가시가 되었다. 죄인이어야 하는 사람은 신나게 골목으로 입성하고 후광 선생님은 취임전 부터 고스란히 IMF 의 빚을 혼자 갚는 작업을 해야만 했었었다. 더 늙어버린 그의 모습을 보니 상도동의 꽹과리 소리만 내 귓가에 맴돌았다.

#참 복도 없는 양반

노벨상도 그렇다. 전 땡 뉴스 하던 언론과 방송은 건국 이래 그토록 열망하던 노벨상을 내 나라 대통령이 받는데도 여엉 축하의 분위기가 아니었다. 기가,코가 막혔다. 하다못해 돈으로 샀댄다. 6.15도 돈으로 퍼줘서 그랬는데 하며.

그러나 떼돈을 갖다 바쳐도 어떤 정권의 책임자가 목숨 걸고 그 적지를 가겠는가. 또한 무엇보다 김정일이 오라고도 안한다. 후광이었기에 김정일이 오라고 한 거다.

북한도 사람인데 더구나 정치적으로는 그가 좌파라서가 아니고 그들도 정치적 쇼를 하기위해서라도 후광만큼은 예우한다. 그 동안 남한을 비방할 때 민주적으로 탄압받는 인사로 소개하였기에 북한의 주민에게 그 민주 투사의 방문을 보여줌으로 정치적 이익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니 김정일이 아무나 허깅하지는 않는다. 박 여사는 아버지 시대의 세습된 정치인으로 끼리끼리 친한 느낌이며 여자이기에 봐 주는 것이다.

하다못해 퇴임 후의 이 곳 부산은 노벨상 탄다고, 북한에 퍼 주어서 경제가 엉망이다 며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가 끊이질 않는다. 돈은 김영삼 정부의 3분의1 밖에 안 줬다는 건 거의 모른다.

또한 퇴임은 어땠는가. 하필 그 날 대구 지하철 사건이 터져 일산 자택 동민을 설득시켜 조용히 죄인처럼 지하철 사건의 슬픔을 건들이지 않으며 외로운 모습으로 집으로 들어 가셨었다.

지하철 유족 내지 가족, 당사자에게 하는 말은 아니고 나도 그 날 무지 슬프다 못해 화가 났었지만 '참 경상 나라는 여러 가지로 도움 안 되네.'했다.

영호남 화합이라는 이유로 정신 사나운 일이 태산이어도 그 노구를 이끌고 취임 후 젤 먼저 찾은 곳이 부산인데 부산 사람들은 거의가 그 이가 얼마나 영남을 품으려 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후광 이후 영호남의 갈등은 상당히 완화된 건 피부로 느낄 수 있긴 하다.

#그래서 저도 원망스럽습니다.

후광부터 고위 공직자 책임 우선이 되면서 위로부터 청탁이 없어지면서 따라서 밑으로도 부조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워낙 민주에 한이 맺혀서인가.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라는 이름으로 정착이 되기 시작했고 워낙 외교적으로 대접을 받으셔서인지 외교적 차원의 무역 협정을 고수하시기 시작했다.

내 생각엔 그랬다. 그 해박한 지식의 풍부한 역량보다 한 맺힌 민주화의 투쟁이 그로 하여금 미국식 신자유주의가 국익에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하는 성향이 깊으신 것 같다.

사실 이 신자유주의는 요즘에 와서야 그 허상을 지식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땐 막연히 관념적이긴 했었다. 그러나 그의 최대 실수는 노 대통령을 제대로 밀어주지 않은 것 같다. 이왕 이 신자유주의가 세습이 될 거면 이왕지사 노대통령이 대통령이 될 거면 제대로 노 대통령의 그늘이 되어 조언을 해 줬다면 여기까진 아니었을 거라는 미련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너무 많이 많은 사람을 용서했다는 것 그것 때문에 조중동과 딴 나라의 속죄도 모르는 후안무치의 상황이 되어 경제라는 이름으로 서로 적이 되어 가는 세상이 된 것 같아서이다.

사람들이 "박 정권"의 경제만은 잘 했다는 논리를 심어 주게 해서도 원망스럽다. IMF 때의 책임을 언론을 비롯해 역사적 심판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쉽게 용서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래서 밀어 붙이고 땜빵씩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며  "박 정권"의 경제 개발논리를 따르는 추종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말았어야 했었다. 정직한 정권이었더라면 좀 느린 경제 성장이라도 이처럼 삼풍백화점처럼 넘어지는 경제가 되진 않았을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했어야 했다. 나는 내 조국의 역량으로는 그와 같은 성장은 집권자의 강제가 아니어도 충분히 이루어 낼 수 있는 민족임을 믿는다. 그리고 그 시절은 세계 경제가 급속도로 함께 발전하던 시기였기 에도 가능하지 않았던가.

경상 나라 여자가 의식화 교육을 어디에서도 한 적이 없이 홀로 후광 선생님을 선생님이라 부르는 일은 쉽진 않다. 그래서 힘든 섬의 인생이어도 내일의 소망을 족히 걸고 살아도 괜찮았다.

그러나 FTA협정이 조국의 민중을 나누고 이 경제 논리로 대통령조차 땅에 깔고 가야 분이 풀리는 세상이 원망스러워서이다.

너무 쉽게 용서하지 않아야하는 이를 용서하셨고 신자유주의를 관념적으로 도입하셨고 글로벌시대를 너무 빨리 여셔서 이 FTA의 어려운 숙제를 해결해야만 하게하셔서 원망스럽다. 너무 오랜동안 내가 그를 머리로 가슴으로 사유했으므로 원망스럽다. 어떤 댓글러의 말처럼…….

"저도 후광 선생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슬픔이 깊으면 슬퍼할 여력도, 겨를도 없나 봅니다. 그토록 병상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접해도 차마 상상조차 못했던 며칠이었습니다. 유년의 골목에서부터 만났던 선생님의 정치세월만큼 늙은 제게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조국은 텅텅 비었습니다. 과연 제게 있어 선생님은 대한민국, 그 자체였는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슬픔이 힘들었던 것도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일개 시민일 뿐이라 도리질 쳐보면서 알았습니다. 저와 더불어 우리들 정신의 DNA로 계신 이름이셨다는 사실 말입니다. 단지 한 세대에만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방황변이처럼 김대중이라는 DNA인 한 세대의 염색체로만 말입니다. 그는 저의, 우리의 일부입니다.

마지막으로 순수 가야혈통의 경상여자의 후광이야기 두 가지를 이야기하렵니다.

# 열린 이, 후광 김대중

선생님처럼 모두에게, 어느 누구에게, 어떤 지식에도 열린 지성과 마음을 가지신 지도자는 없었다고 단언합니다. 대체로 화해는 그 열린 지성과 마음의 곁가지입니다. 후광선생님께서 대통령으로 취임하시면서 모든 문화와 모든 지식과 산업을 함께 보게 하셨습니다. 해서, 딴에는 불안하던 일본문화 개방이 오히려 한류의 바람으로 감당케하는 현재를 가능하게 하셨던 겁니다. 젊은 세대보다 더 진취적인 시각을 여러 분야에 정책적으로 실현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일례로 IT의 강국이라는 별명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노무현대통령께서도 대통령 일을 해보시니 선생님이 천재라는 사실을 알았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는 차치하고서라도 말입니다.

#그의 눈물, 그의 유머

돌이켜보면 노무현 대통령님과 김대중 대통령님의 공통점은 눈물과 유머입니다. 그리고 이 두 공통점은 역대 어느 대통령에게서 볼 수 없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단 두 분의 대통령님만 자주 우시고, 자주 좌중을 웃기고 싶어 하셨다는 사실이 참 그립습니다. 두 분 대통령님만큼 개그맨 이상으로 남들을 웃게 하는 일을 열심히 하셨던 대통령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눈물 나게 우습게 하시는 후광선생님의 생전 남긴 테이프에 남은 말씀이 "에, 에 마이크 테스트."였었다는 이야기가 웃다가 울다가하다 너무 보고 싶게 합니다. 이 나라 대다수의 국민이 아무리 경하다고 평가절하를 하여도 그 두 분의 개그맨적인 감각이 곳곳마다 그리움이 될 것 같습니다.

또, 국민이 감사하므로, 국민이 위대하므로, 국민이 아프므로, 그 사실이 목이 메어 펑펑 슬퍼하시기도 하시며 기뻐 우시기도 하시는 모습을 이제는 두 번 다시 생시에 뵐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아픕니다. 정녕 국민의 감정 하나하나 당신들의 것으로 여기시는 마음 따뜻하신 두 분이셨습니다. 그런 대통령이 두 분, 계셨습니다.

후광선생님은 첨엔 저의 카오스, 즉 혼돈이셨습니다. 그리고 어느새 그 분을 통해서 세상의 진실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을 배우는 저의 정신적인 배경이 되어 계셨습니다. 하여, 정치 지도자 내지는 대통령이라는 이름보다는 언제나 선생님이십니다. 아무리 대한민국의 어느 부분이 선생님을 내칠지라도 항상 조국의 배경을 빛나게 하시는, 후광의 이름으로 빛이 되어 우리의 배경으로 늘 계실 것을 믿습니다.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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