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는 근데 '깽깽이'(한발 뛰기)를 못해. 다른 애들은 다 잘하는데."
얼마 전 다섯 살 된 딸아이가 나를 방으로 잡아끌며 고민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한발로 뛰는 시늉을 하는데 우스꽝스러운 자세 때문에 웃음이 나왔다. 무안해하는 딸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웃기는 했지만, 속으로는 뜨끔했다.
'아니, 이제 만 48개월이 갓 지난 아이도 이렇게 자기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친구들과 비교하면서 자기를 평가하는데, 민감한 사춘기를 보내는 우리 학교 아이들은 어떨까'하는 연민 때문이었다.
일제고사가 양산하는 영어 교과 학습 부진아에 대한 대책을 고민하면서 왜 이 장면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내가 딸아이를 보면서 품었던 연민이나 영어 부진 아이들을 보면서 품었던 연민이나 다 같은 것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사교육으로 영어를 못 배운 아이
세상에 부진아가 되고 싶은 아이는 하나도 없다. 영어 교육 광풍이 몰아치는 이 나라에서 영어 부진아가 된다는 것은, 먹고 살 만한 집 아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내가 근무했던 학교에는 영어 부진아가 넘쳐났다.
현재 시행 중인 7차 영어 교육과정은 일제고사와 같은 지필 시험을 전제로 만들어진 교육과정이 아니다. 영어 의사소통 능력을 강조하지만, 3학년 때는 일주일에 한 시간 노래나 챈트, 놀이 학습 등을 통해 기초적인 회화 표현을 배울 뿐이다. 평가 역시 배웠던 표현에 대한 듣기와 말하기 수행평가가 있다.
말하기 평가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림을 보고 교과서에서 나왔던 표현을 말하는 정도의 아주 기초적인 수준이다. 4학년 역시 일주일에 한 시간, 노래나 챈트, 놀이 중심의 학습을 한다. 3학년 때와는 다르게 알파벳 읽기와 아주 간단한 몇 개의 영어 단어 읽기가 들어간다.
사교육을 받지 않고 학교에서만 영어를 배우는 아이들은 3, 4학년 때 이미 부진아이다. 꾸준히 복습을 해야 그나마 배운 표현이라도 까먹지 않을 텐데, 일주일에 한 시간 노래 흥얼거리고 놀이 하나 하다 보면 그냥 지나가기 때문이다.
원어민이 협력 수업을 하는 경우는 더 심하다. 수업 대부분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소통이 되지 않은 상태로 보내기 때문이다. 원어민과 함께하면 저절로 실용 회화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는 거대한 착각이 사회 일반에 만연되어 있지만 절대 아니다. 이미 조기외국어교육의 시기도 지났고 제2언어가 아닌 외국어 학습 상황에 놓인 열 살짜리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생각해보자.
영어 사교육을 전혀 받지도 않은 아이가 1:1 상황도 아니고 30:1의 상황에서 원어민과 무슨 소통을 할 수 있을까? 잔뜩 긴장하거나 귀를 닫거나 둘 중 하나다. 거기에 사교육을 받아 이미 어느 정도 회화를 할 줄 아는 아이들이 끼어 있으면 수업은 100% 그런 아이들 중심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사교육으로 영어를 못 배운 아이는 그 나이에 이미 절망을 내면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3학년 4학년을 보내고 5학년이 되었다.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훨씬 민감해지는 시기이다. 5학년이 되면 영어 단어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 당장 Tuesday, Wednesday와 같이 어려운 단어들이 등장한다. 음철법에 대한 어떤 학습도 없이 단지 주어진 제시문을 듣고 따라 했을 뿐인데 이런 단어를 읽으라고 한다.
또한, 알파벳을 쓰면서 단어도 외워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나마 영어를 좋아하던 아이들도 5학년이 되면 단어 읽기를 포기한다. 물론, 사교육을 통해 영어 단어나 문자에 익숙해졌고 그런 훈련을 받아 온 아이들은 예외이다.
6학년이 되면 영어 문장을 읽어야 하고 배웠던 표현에 한해 작문도 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영어 단어 읽기를 제대로 학습한 아이라면 영어 문장 읽기는 '관심'과 '노력'의 문제일 뿐이다. 그러나 기초 학습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6학년이 되었다고 문장을 읽고 쓸 수는 없다. 5학년 때 포기한 아이들이 6학년 때 영어 학습에 의지를 보인다면 그것은 부모님의 관심과 계도, '영어 안 하고 어떻게 먹고 살래'와 같은 협박으로 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어 부진아들을 지도에 영어 읽기 교육 절실
이런 현실에서 일제고사에 영어가 포함되었고 영어 부진아가 만들어졌다(일제 고사가 실시되기 전까지 초등학교에는 영어 부진아는 없었다. 국어와 수학 교과 부진아만 있었을 뿐이다). 영어 부진아가 지역별로, 학교별로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다. 지난해, 내가 근무했던 학교가 속해 있는 교육청이 다른 교과는 그나마 차이가 덜한데 영어에서만 유독 강남교육청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는 교육장의 일장 연설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뿐이다.
교육과학기술부 홈페이지를 뒤져봤지만, 부진학생을 책임지도 하겠다는 말만 무성하지 어떤 기초적인 정보도, 대안도 보이지 않는다. 영어 부진아 보충 지도를 위한 자료를 살펴보았지만, 이렇게 쉬운 문제도 틀리는 아이들이 왜 생기는지 이해도 못 한 이들이 집필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한마디로 영어 교과서를 충분히 다 이해한 아이들을 위한 보충 학습 교재 같은 것이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초등학교에서 영어 부진아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읽기 학습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영어 사교육을 받을 만한 형편에 있는 아이들은 다 받고 있다. 그럼에도 구멍이 생기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 계층에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아이들을 부진아라고 모아 놓고 방과 후에, 심지어 여름방학에도 학습을 시키는 것이 최대한의 배려라고 한다면, 아침도 제대로 못 먹고 학교에 오는 아이들의 처지를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알파벳 읽기부터 음철법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원어민 교사 필요 없다. 그 아이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줄 아는 '멘토'가 필요한 것이다.
영어는 외국어다. 외국어이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영어는 말하고 듣는 것보다 읽을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읽을 줄 알면 언제라도 말하고 듣는 영어는 배울 수 있다.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흥겨운 리듬에 몇 마디 흥얼거리다가 5학년이 되어 단어를 읽고 문장을 읽어야 한다는 암담함에 아이들을 던져 넣지 않으려면, 읽기 교육에 조금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나, 사회 취약 계층의 아이들, 영어 부진아들을 지도하는데 영어 읽기 교육은 절실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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