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트름 허믄 후딱 약을 먹어야지!”

아내와 함께 보낸 여름휴가. 마지막 날

등록 2009.08.29 13:10수정 2009.08.2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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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일축하송을 부르는 외손녀가 내민 손을 잡고 잠시 동심에 빠지는 장모님. 무척 행복하게 보입니다.
생일축하송을 부르는 외손녀가 내민 손을 잡고 잠시 동심에 빠지는 장모님. 무척 행복하게 보입니다. 조종안
생일축하송을 부르는 외손녀가 내민 손을 잡고 잠시 동심에 빠지는 장모님. 무척 행복하게 보입니다. ⓒ 조종안

 

부산 방문 사흘째 되는 날(12일)은 장모님 생일이었습니다. 열일곱에 시집가서 고집쟁이 시어머니 밑에서 자식들 낳고 키우느라 일흔이 다 되도록 고생만 하면서 살아오셨는데요. 지금은 막내딸과 사위가 보물단지처럼 모시고 있어 노년을 편하게 보내고 계십니다.    

 

올해 여든셋인 장모님은 사위와 대화를 하다가도 "나는 오래 살다 보닝께 이르케 존 꼴을 보고 사는디, 그 냥반은 고생만 징그릅게 허다가 돌아가셨어!"라며 사별한 지 10년도 넘은 남편을 못 잊어하는 '순정파 여인'이기도 합니다. 

 

셋째 날도 전날처럼 새벽에 눈을 떴는데요. 갑자기 잠자리가 바뀌니까 깊은 잠에 빠지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까 아내와 처제가 아침드라마를 시청하고 있었는데요. 아내는 드라마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밖에 나와서도 TV만 찾는 아내가 답답해서 장모님에게 하소연했더니 "야들은 그 전이도 배우들이 앞으로 어트게 허는 것까장 다 알고 있었당게!"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군요. 그래도 제 편은 장모님밖에 없었습니다.

 

아침 메뉴는 뭐냐고 물으니까 장모님이 "하이고, 여그는 별시럽게 아침을 굶는당게, 우유 하나여다 빵 하나믄 끝나!"라고 하시더군요. 아침을 우유와 빵으로 대신하는 것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는데요. 그래도 장모님 생일이어서 미역국은 끓여 먹었습니다. 

 

시원한 미역국에 밥을 말아 맛있게 먹고 트림을 하니까 옆에 있던 장모님이 "왜 속이 이상혀? 기트름 허믄 후딱 약을 먹어야지!"라며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는데요. 장모님과 대화를 하면 재미있습니다. 어쩌다 듣는 고향의 방언이 한동안 잊고 있던 친구를 만난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처제는 점심때 일식 코스요리를 먹는다며 "연세도 있고 하니까 아무리 어려워도 1년에 한 번뿐인 엄마 생일에는 비싼 요리를 먹어야 한다며 며칠 전에 유명한 일식집 방을 계약해두었다고 했습니다.

 

TV 뉴스를 보면서 얘기를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정치 이야기가 나왔고, 대통령 이름까지 나오면서 잠시 시사에 대한 얘기가 오갔는데요. 장모님은 김영삼 전 대통령보다 이명박 대통령이 더 싫다고 했습니다. 

 

97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를 찍으려고 서울에서 군산까지 내려왔던 장모님에게 "어머니는 이명박하고 김영삼하고 누가 더 좋으세요?"라고 물으니까 "음, 그려도 김영삼이가 낫지"라고 하면서 "이명박은 말허는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아녀서 맘에 안 든당게, 돈도 많이 둥글려서 혀놨담서!"라며 씁쓸해했습니다. 

 

일식집 '동경'에서

 

 새우, 소라, 멍게 모듬. 초밥집이라고 기대를 하고 갔는데 해서 코스요리가 일인당 2만5천원이라고 하니까 특별한 날 먹기에 부담이 가는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새우, 소라, 멍게 모듬. 초밥집이라고 기대를 하고 갔는데 해서 코스요리가 일인당 2만5천원이라고 하니까 특별한 날 먹기에 부담이 가는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조종안
새우, 소라, 멍게 모듬. 초밥집이라고 기대를 하고 갔는데 해서 코스요리가 일인당 2만5천원이라고 하니까 특별한 날 먹기에 부담이 가는 가격은 아니었습니다. ⓒ 조종안

 

12시 조금 넘어 일식 '코스요리'로 유명하다는 식당으로 향했는데요. 실내는 비교적 깨끗하고 분위기도 괜찮았는데, 서비스하는 아가씨들이 일본을 상징하는 '기모노'를 걸치고 있어 조금 어색하고 야릇하게 느껴졌습니다. 

 

안내하는 방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고 순서에 의해 '생일축하노래'을 부르고 케이크를 자르고 하나씩 나오는 요리를 먹었는데요. 먹은 것 같지도 않고, 안 먹은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배는 든든하더군요.

 

식사 중간에 병원에 누워 있을 큰 누님 얼굴이 떠올라 지우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4-5년 전만 해도 저에게 "야, 안나 외할머니(장모) 건강이 안 좋다면서 어떻게 헌다냐, 느 처갓집은 그 양반이 오래 살어야 허는디···."라며 걱정했던 누님이거든요.

 

처제는 "엄마 덕에 비싼 요리를 먹는다"면서 "작년에는 중국식, 올해는 일식 코스요리를 먹었으니까, 내년에는 한정식을 먹어야겠다"고 하더군요. 벌써 기대가 되는데요. 장모님 생일날 먹었던 일식 요리를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포만감을 느낄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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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종안

 

출발은 저기압, 돌아오는 길은 맑음

 

일식 코스요리를 먹고 오후 2시쯤 처제 아파트로 돌아왔는데요. 식당에서 못했던 말들을 하느라 거실이 왁자지껄했습니다. 특히 아내와 장모님이 얘기하는 걸 보니까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더군요. 해서 아내가 먼저 가자며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결국, 저녁을 먹고서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밤 10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는데요. 아내는 운전 면허증을 따고부터 주로 야간에 운전했고, 평소에도 차가 뜸한 밤에 운전하는 게 편하다는 말을 자주 했기 때문에 마음이 놓이더군요. 집에는 새벽 2시 가까이 되어 도착해서 샤워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부산여행 사흘 동안 저는 몇천 원밖에 쓰지 않았습니다. 장모님 생일 선물로 우렁이를 몇 봉지 사다 드리려고 했는데 처제가 부탁하는 바람에 돈이 굳었고, 큰 누님이 마실 음료수 대금도 아내가 입금하고, 왕갈비탕 식대도 치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다만 얼마라도 장모님 손에 쥐여 드리고 왔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올해 여름휴가는 시작하기 전날 밤에 프로야구 야간경기를 관람하고, 부산을 다녀오기로 정해놓고도, 큰 누님을 모셔오는 일 때문에 저기압으로 출발했는데요. 돌아오는 길은 며칠 동안에 있었던 얘기도 하면서 분위기도 좋고 맑았습니다. "이런 게 부부가 사는 거구나!"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오더군요.        

 

휴가는 시원한 계곡이나 바닷가에서 보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요. 집에서 시원한 수박을 썰어 먹으면서 독서를 하거나, 흩어진 사물을 정리하기도 하고, 설이나 추석명절 때 뵙지 못했던 어른을 찾아뵙는 것도 알찬 휴가가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장모생일 #생일축하 #일식코스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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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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