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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마을 '방갈새미'가 복원됐다. ⓒ 허귀용
▲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마을 '방갈새미'가 복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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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새미'? 알 듯 모를 듯한 이 말은 무슨 뜻이지? 아마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도 생소한 단어가 아닐까 싶다. 사실 기자도 설명을 듣기 전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한문과 경상도 사투리가 섞인 이 단어는 웬만한 한문 실력이나 경상도 사투리를 알지 못하고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듯하다.
'새미'는 샘터의 경상도 사투리다. 즉 우물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방갈'은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막아주는 의미라고 한다. 이 정도면 대충 그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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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갈새미' 안 모습. '새미'는 샘터 경상도 사투리, '방갈'은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막아주는 의미. ⓒ 허귀용
▲ '방갈새미' 안 모습. '새미'는 샘터 경상도 사투리, '방갈'은 많은 사람들의 갈증을 막아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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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또는 샘터의 모습은 수돗물이 보급되기 이전 마을 곳곳에 하나 이상은 있을 정도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 중에 하나였다. 집안에서 수도꼭지만 틀면 나오는 편리한 수돗물이 본격 보급되면서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우물 주위로는 차츰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물이나 샘터도 시대 흐름에 따라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방치되는 운명을 맞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아직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오지에서는 그나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찾지 않아 방치됐던 우물이 다시 사람들의 손길로 부활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방갈새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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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일 오전 10시30분 '방갈새미·너머새미' 정화식이 열렸다. ⓒ 허귀용
▲ 3일 오전 10시30분 '방갈새미·너머새미' 정화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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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로 유명한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마을 주민들의 식수원이었던 '방갈새미'가 새 모습으로 단장된 것이다. 마을주민들에게 외면 받았던 '방갈새미'는 근 20여 년만에 사람들을 맞게 됐다.
가산마을은 정부의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사업에 선정됨에 따라 '방갈새미'의 복원을 추진했다. 마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상징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다.
3일 참살기 좋은 마을가꾸기 가산마을추진위원회(위원장: 한남수 이장)는 지역주민과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갈새미, 너머새미 정화식'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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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갈새미' 물을 음미하고 있는 마을 어르신. ⓒ 허귀용
▲ '방갈새미' 물을 음미하고 있는 마을 어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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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을 넘긴 마을주민들은 여전히 맑은 생명수를 쏟아내고 있는 '방갈새미'의 물맛을 느끼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허 시원허다. 내가 50년 전에 이 물을 먹었는데, 옛날 맛 그대로네"
"내가 어릴 때 동네 아지매(아줌마)들이 줄을 서서 물을 긷고 그랬지. 나도 이걸 먹고 살았지 뭐 껄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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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주민들은 '방갈새미'가 영원토록 샘솟기를 바라는 제를 지냈다. (왼쪽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기능보유자 한우성 옹, 한남주 위원장 ) ⓒ 허귀용
▲ 마을주민들은 '방갈새미'가 영원토록 샘솟기를 바라는 제를 지냈다. (왼쪽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73호 가산오광대 기능보유자 한우성 옹, 한남주 위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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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주 위원장은 "방갈새미는 역사적 의미가 깊다. 조선시대까지 우리 마을에 조창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일하는 인력들과 마을주민들의 갈증을 풀어준 게 이 새미다. 그동안 방치되어 있어서 안타까웠는데 그래서 복원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방갈새미'는 3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다. 조선 영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 위원장의 얘기처럼 조선시대 말까지 세곡을 보관하고 운반했던 조창이 있었던 가산마을은 그 당시에만 300호가 거주했고, 특히 조창에서 일하던 인력만 1000여 명이 상주할 정도로 인구가 많았던 번창한 곳이었다. 지금은 30가구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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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수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허귀용
▲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서 두 번째로 수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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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인구가 늘어나다보니 식수가 부족하게 됐고, 1760년 영조 36년에 '방갈새미'가 탄생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증가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방갈새미' 인근에 '너머새미'가 추가로 만들어졌는데, 이 역시 새롭게 단장됐다. '너머'는 물이 철철 넘쳐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붙여진 것으로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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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갈새미에 달린 '두레박' ⓒ 허귀용
▲ 방갈새미에 달린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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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갈새미'는 가산마을 백성들에게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가산마을 천용제(동제)에 쓰이던 정화수로 '방갈새미'의 물이 사용됐는데, 천용제 전날 우물에 금줄을 치고 덕석을 덮어 신성시했다. 하루하루를 고단하게 살았던 민초들에게 한 줄기 생명수와 같았던 샘터이기에 당시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귀중했던 것은 아닐까.
'방갈새미'의 수질은 어떨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행사에 참여한 가산마을의 한 어르신이 궁금증을 풀어줬다.
"일제 강점기에 전국의 우물 수질을 검사했는데, 두 번째로 좋았다고 동네 어르신들이 얘기를 하더라고…."
한 위원장은 복원된 "'방갈새미'의 수질은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얼마 전부터 주민들이 이 물을 이용하고 있는데,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고 했다. 조만간에 수질 검사를 의뢰할 예정이란다.
박동선 사천문화원장은 "마을의 역사를 담고 있는 '방갈새미'를 가꾸는 것은 주민들의 몫이자 책임이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아름답게 가꾸어 갈 것"을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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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갈새미와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세곡을 보관·운반하는 조창이 있었던 자리. ⓒ 허귀용
▲ 방갈새미와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세곡을 보관·운반하는 조창이 있었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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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뉴스사천(www.news4000.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09.09.04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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