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오릉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부인,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파사이사금의 분묘가 있다고 전한다.(사적 제 172호)
문화재청
수로왕의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많다. <가락국기>의 내용을 모두 역사적 사실로 인식하기엔 무리인 부분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는 별도로 기록에서 수로왕의 존재가 보인다는 점을 볼 때 무조건 가상인물로 보기도 힘들 듯하다.
<삼국사기>에서도 수로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삼국사기> 내용 자체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썼기에 가야에 대한 내용은 약간씩 언급되는 정도일 뿐이어서 건국신화를 비롯한 다양한 이야기가 없다는 점은 아쉽다. 신라 파사이사금(婆娑尼師今) 23년, 음집벌국과 실질곡국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고 이를 파사이사금이 중재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파사이사금도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한다.
이때 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아는 게 많다고 하여, 그를 초청하여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수로왕은 음집벌국에게 그 땅을 주기로 하였고, 문제가 해결된 것을 기념하여 신라에서 연회를 베풀게 되었다. 이 연회는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집단인 6부에서 관장하였는데, 이중 5부에서는 두 번째 관등인 이찬을 보내는데, 한기부에서만 직위가 낮은 자를 보냈다. 이를 본 수로왕은 크게 노하여 그의 종인 탐하리를 보내 한기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여 버리고 가야로 떠나버리는 국제적인(?) 사건을 일으킨다.
수로왕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신비로우면서도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탈해이사금과의 대결이나 신라에서의 일을 본다면 결코 인자한 할아버지라기보다도 한 성질 있으면서도 오만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그래도 왕으로서 품격이 떨어진다고 보기보다 인간적이면서도 카리스마가 있다는 것은 과한 시선일까?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수로왕의 태도가 건방지고 오만하다고 보기보다 역시 시조왕다운 모습이 아닐까란 생각이 든다. 한 왕조의 시조는 유화하고 인자하기보다도 강하면서도 확실한 지도력이 필요하다. 석탈해나 신라에서의 이야기는 그러한 수로왕의 진면모를 그대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다. 파사이사금이 신라의 대표적인 귀족을 죽인 수로왕에게 해코지는커녕 항의조차 못하고 음집벌국을 정벌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을 본다면, 수로왕 또한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고, 신라 또한 이를 응징하기엔 어려운 처지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고대의 인물들은 고리타분하고 온화하다고만 인식하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그 면모를 바라보면 인간적이면서도 강한 모습을 더러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의 역사가 지금보다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은, 훨씬 다양하고 역동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시대였기 때문이리라.
덧붙이는 글 | 수로왕과 관련된 설화 중 석탈해와의 대결 이야기를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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